글/ 목목(木木)
【정견망】
《고승전(高僧傳)》3권에 따르면 구나발마(求那跋摩) 가문은 대대로 계빈국 국왕을 지낸 크샤트리아다. 부친인 승가아난(僧伽阿難)이 왕위를 포기하고 산림에 은거했다.
구나발마가 14세가 되자, 예리한 식견으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았고, 깊고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덕을 숭상하며 착함에 힘썼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짐승 고기가 먹고 싶다면서 구나발마에게 요리하게 했다. 구나발마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해 생명을 해치는 일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
“만약 죄를 짓는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감당하겠다.”
어느 날 구나발마가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었다. 이에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를 대신해서 고통을 감당해주세요.”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네 몸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겠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도 오히려 대신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삼도(三塗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니가 이에 전에 했던 잘못을 뉘우쳐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가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는 말했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큰 나라에서 군림할 것이고, 만약 세속의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과(聖果)를 얻을 것이다.”
스무 살에 출가해 계(戒)를 받았다. 그는 각고의 수련을 통해 백여만 자에 달하는 많은 경전을 암송했다. 선기(禪機)를 환히 꿰뚫어 당시 사람들이 다들 삼장법사(三藏法師)라 불렀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마침 계빈국의 왕이 죽었는데 계승할 후손이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후예로, 재주가 밝고 덕이 높으니 그를 환속시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합시다.”
이에 수백 명의 신하들이 두세 차례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구나발마는 모두 거절했다. 또 시비를 피하기 위해 사부님과 헤어져 산림에 들어가 은거했다.
산림 속에서 몇 년간 수행한 후 사자국(師子國)에 가서 풍속을 살피고 불법을 널리 선양했다. 식견이 있는 이들은 그가 이미 초과(初果) 과위를 증득했다고 했다.
그의 의젓한 외모는 보는 사람들마다 친근감과 고상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발마는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그가 도착하기 하루 전날 사바왕의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도사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구나발마라는 승려가 찾아왔다. 이에 왕의 모친은 성스러운 예식으로 공경하고, 5계(戒)를 받았다. 그녀는 또 국왕에게 이렇게 권했다.
“우리는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금생에 모자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지만 네가 불법을 믿지 않는다면, 후세에는 인연이 끊어질까 두렵구나.”
이에 국왕은 처음에는 모친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계를 받았지만 나중에 점차 독실해졌다.
얼마 후 이웃 나라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자 국왕이 구나발마에게 자문을 구했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을 하려 합니다. 만약 상대해서 전투를 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막지 않으면 장차 위태로워져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존귀하신 스승님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했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그 사나움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은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왕이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웠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문득 적들이 물러나 흩어졌다. 왕은 날아온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해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은 그를 공경하는 믿음이 더욱 충만해졌고 이에 출가해서 도를 닦고자 생각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다른 사람을 왕으로 뽑으라고 했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면서 저지하려 했다.
국왕이 차마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이 출가하지 않는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전국의 백성들이 다 불법을 믿을 것.
둘째, 전국적으로 모든 살생행위를 중단할 것.
셋째, 모든 재산을 기증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도와줄 것.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한결같이 공경하며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전 국민이 다 계를 받았다. 국왕은 또 발마를 위해 정사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발마의 명성이 멀리까지 널리 알려졌다.
당시 중국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문제(文帝) 시기였다. 경성의 승려들 중 혜관(慧觀)과 혜총(慧聰)이 유명했다. 이들은 구나발마가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을 생각에 원가(元嘉) 원년(424) 9월 문제에게 구나발마를 초빙해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곧장 교주(交州)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 구나발마를 배로 모셔오게 했고 혜관 등도 승려를 구나발마에게 보냈다. 또 구나발마와 사바왕 파다가(婆多加) 등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송나라에 왕림해 불법(佛法)을 널리 펴주길 희망했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마땅히 넓히고자 함에 있어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구나발마가 광주(廣州)에 도착하자 문제가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모든 비용을 부담해 그를 경성으로 모셔오게 했다. 경성으로 가는 길에 시흥(始興)을 경유했는데 발마가 이곳에서 1년 가량 머물렀다. 시흥에는 호시산(虎市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팔랐다. 구나발마는 산 모습이 기사(耆闍)와 유사하다면서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으로 바꾸었다.
영취산 절의 밖에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매번 때가 되면 구나발마가 이르렀다. 간혹 비가 내려도 젖지 않았고 진흙을 밟고 와도 젖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많은 도인과 속인들이 그를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흥(始興) 태수 채무(蔡茂)는 구나발마를 몹시 공경했다. 나중에 채무가 임종할 때가 되자 구나발마가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하고 편안히 위로해주었다. 나중에 채무의 가족이 꿈속에서, 채무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와 함께 법을 강론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구나발마가 교화한 결과였다.
한편 이 산은 원래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하지만 구나발마가 이곳에 거주한 이후로는 호랑이 피해가 전혀 없었다. 한번은 그가 길을 가다 호랑이를 만났는데 그저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를 두드리기만 하면 호랑이가 곧 길을 피했다. 이에 산길을 가는 여행객들이 막힘이 없었다. 이런 구나발마의 덕에 감동해 귀의하는 자들이 열에 일곱 여덟이 되었다.
한번은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사미가 들어가서 보니 한 마리 흰 사자가 마침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끝까지 가득히 청색 연꽃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사미는 사자가 발마를 해친 것으로 오해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아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신령하고 기이함이 이와 같았다.
문제가 거듭 혜관(慧觀) 등을 보내 빨리 경성에 오실 것을 청하자 원가(元嘉) 8년(431) 정월 마침내 건업(建鄴 남조의 수도로 지금의 남경)에 도착했다.
문제가 그를 불러 만나보고는 제왕의 지위에 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구나발마가 대답했다.
“대저 도(道)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법(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帝王)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합니다.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을 떨치지 못합니다. 만약 자신을 다스려 고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백성을 자식으로 삼으니, 한 마디 좋은 말만으로도 사람들을 모두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훌륭한 정치를 펴면 신과 사람[人神]마저 함께 화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형벌을 쓰시되 너무 잔인하지 않게 하시고 노역을 시키되 너무 지나치게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기후가 순조롭고 날씨가 적당해져서 온갖 곡식이 풍성하고 뽕과 삼도 무성할 것입니다
이렇게 꾸준히 지켜 나가신다면 이것이 바로 재계(齋戒)이고 이 역시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살생하지 않으신다면 덕(德) 역시 많다 할 것입니다. 어찌 반나절의 고기를 먹지 않아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하는 것으로 널리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이 말을 듣고는 깊이 찬탄했다.
이에 기원사(祇洹寺)를 하사해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자 공경 및 제후왕과 뛰어난 선비들이 그를 높이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나발마는 원가 8년 9월 28일 점심을 먹지 않고 먼저 일어나 자신이 머물던 각(閣)으로 돌아갔다. 그의 제자가 나중에 가서 보니 이미 원적(圓寂)해 있었다. 향년 65세였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미리 제자에게 유언을 남겼고 송나라와의 인연이 이미 다했다고 했다.
입적한 뒤 얼굴 모습이 평소 입정(入定)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도인과 속인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향기가 강렬하게 감돌아 풍겨 나오는 것을 맡았다. 뱀이나 용처럼 생긴 한 필쯤 되는 길이의 물체 하나가,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를 수 없었다.
곧 남림(南林)의 계단(戒壇) 앞에서 천축 방식에 따라 화장했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였다. 향과 섶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를 뿌려 시신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왕성하게 타올라 하늘까지 빛났다. 이때 하늘은 맑고 환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모두 슬퍼하며 탄식했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 화장 후 흰 재를 모신 탑으로 후대의 부도)을 세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