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이윤은 올 때는 빈 몸으로 왔지만 갈 때는 성대하게 갔고 사후에 인기가 더 높아졌다.
삼황(三皇)부터 한위(漢魏)까지 역대 제왕에 관한 사학 전문서인 《제왕세기(帝王世紀)》는 서진(西晉)의 대학자 황보밀(皇甫謐)이 찬술한 것이다. 여기서는 상왕(商王)이 이윤의 장례를 얼마나 후하게 치렀는지 기록이 남아 있 있다.
“옥정제(沃丁帝) 8년 이윤이 졸(卒)했다. 향년 백 살이 넘었고 큰 안개가 사흘간 끼었다. 옥정은 천자의 예로 장례를 치렀고 대뢰(大牢)를 올렸으며 직접 3년간 상을 치러 이윤의 큰 덕에 보답했다.
”큰 안개가 사흘간 끼었다“는 말은 고인들은 며칠간 지속된 큰 안개를 좋은 일로 여기지 않았는데, 천지의 기운이 막힌 것으로 보았다. 인체에 비추자면 건강하지 못하고 국운에 비추면 순조롭지 못한 것이며 상조(商朝)에 비추면 곧 어른이 떠난 것이니 상왕들은 이후 자신의 길을 홀로 걸어야 했다. 그러므로 황보밀이 이 구절을 기록한 것은 단순히 날씨를 기록한 게 아니라 나라의 형세(形勢)를 예고한 것이다. 옥정제 이후 과연 서서히 은나라의 도가 쇠약해져 지방의 여러 제후들이 혹 조공을 바치러 오지 않았다.
또 ‘대뢰(大牢)’란 ‘태뢰(太牢)’라고도 하는데 극히 존숭한 제사의례로 소, 양, 돼지 3가지 희생을 모두 갖춘 것을 말한다. 《예기・왕제(王制)》에서는 ”천자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는 대뢰로 하고 제후와 그 사직은 모두 소뢰(小牢)로 한다“고 했다. 여기서 소뢰란 소를 빼고 양과 돼지만 희생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옥정제 뿐만 아니라 후세 상왕들도 이윤에 대한 ‘보답’을 아주 성대하게 했다. 갑골문 복사(卜辭) 기록을 보면 이윤은 공신들의 우두머리로 성탕과 함께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또 단독으로도 제사를 올렸다. 역사서에는 이윤을 존경하고 숭배한 상황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윤은 5대에 걸쳐 군왕을 보좌했고 수명이 백 살이 넘었다. 현대에 들어와 상조가 점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짐에 따라 이윤의 후손들 역시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윤의 후손이 공개한 《윤씨가보(伊氏家譜)》에는 “130살을 살았다”고 한다.
또한 현재 이윤의 묘로 알려진 곳이 적어도 4~5곳에 이르는데 하남성 개봉의 기현(杞縣), 낙양의 이천(伊川), 숭현(嵩縣) 등에 이윤의 묘가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지역이 이윤이 살던 곳이라고 여긴다. 또 산동 하택(荷澤)시 조현(曹縣) 은묘촌(殷廟村)에도 이윤의 묘인 원성사(元聖祠)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성탕의 묘와 7리 떨어져 서로 멀리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산동성 성급문물(省級文物)이다. 그가 성인(聖人)이라 이렇게 인기가 좋은 것이다.
한편 성탕 묘의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설이 있는데 산동 조현, 하남 언사(偃師), 부풍(扶風), 보정(寶鼎), 우성(虞城), 상구(商丘), 박주(亳州)에 모두 성탕의 능이 있다.
이중 이윤의 묘와 가장 가까운 것은 조현에 있는 탕릉이다. 진짜 탕의 능묘는 이미 전쟁으로 훼손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며 지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는 탕의 능묘는 안휘성 박주에 있다. 이곳 무덤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주변보다 약 5미터 높고 옛날 비석이 남아 있다. 상족의 후손들에게는 이곳이 성지이고 역시 성급문물이다.
임금과 신하 두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약 천년이 지난 춘추시기 제(齊)나라에 안자(晏子 안영)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그는 제경공(齊景公)의 재상으로 묵가(墨家)학파에 편찬한 《안자춘추(晏子春秋)》의 기록에 따르면 제경공이 꿈에 성탕과 이윤을 보았다고 하는데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제경공이 병사를 동원해 송(宋)나라를 치려하자 대군이 태산을 지날 때였다. 경공의 꿈에 두 남자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경공이 속으로 두려워하다 깨어난 후 곧 문을 열어 꿈해몽하는 이를 불러오게 했다.
해몽하는 사람이 오자 경공이 물었다.
“오늘 꿈에 화난 표정으로 서 있던 두 남자를 보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그저 그들이 몹시 화가 난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외모와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자 해몽하는 이가 말했다.
“군대가 태산을 지나가면서 제사를 지냈지 않았기 때문에 태산의 신(神)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축사(祝史)를 불러다 태산에 제사를 지내시면 됩니다.”
이에 경공이 알았다고 했다.
이튿날 안영(晏嬰)이 경공을 알현하자 경공이 해몽하는 사람이 한 말을 들려주었다.
“해몽하는 사람이 그러는데 군대가 태산을 지나면서 산신께 제사를 지내지 않아 태산의 신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축사를 파견해 태산에 제사를 지내려합니다.”
안영이 고개를 숙여 한번 생각해보더니 경공에게 말했다.
“해몽하는 사람이 틀렸습니다. 꿈에 나타난 두 사람은 태산의 신이 아니라 송나라의 조상인 성탕과 이윤입니다.”
경공은 믿을 수 없어하면서 여전히 태산의 신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안영이 말했다.
“만약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게 성탕과 이윤의 외모를 묘사해보겠습니다. 성탕은 피부가 새하얗고 키가 크며 얼굴에 수염이 있는데 얼굴형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으며 몸이 좀 굽어 있고 목소리 톤이 높습니다.”
경공이 말했다.
“맞소, 그런 모습이었소.”
안자가 또 말했다.
“반면, 이윤은 피부가 검고 키가 왜소합니다.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고 수염이 있는데 얼굴형이 위는 풍만하고 아래가 가늡니다. 허리가 좀 굽었고 말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습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맞소, 그런 모습이었소.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오?”
안영이 대답했다.
“성탕, 태갑(太甲), 무정(武丁), 조을(祖乙) 이런 분들은 모두 천하에 어진 덕을 지닌 임금이니 마땅히 후사(後嗣)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유일하게 남은 상족(商族)의 후손이 바로 송나라인데 임금님께서 병력을 보내 공격하셨기 때문에 성탕과 이윤이 화를 낸 것입니다. 부디 군대를 철수시켜 송나라를 평안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제경공은 안영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송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안영이 말했다.
“무고한 나라를 공격해 신령을 노하게 하고도 자신의 행위를 바로잡아 양국 관계를 좋아지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군사공격을 하신다면 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군대가 만약 계속 전진한다면 반드시 장수가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이튿날 제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공격했지만 부대가 2사(舍 약 60리에 해당)를 전진했을 때 갑자기 전고(戰鼓)가 망가졌고 대장도 전사했다.
그러자 제경공이 안자에게 사죄하고 군대를 철수시켰으며 이후로 더는 송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안자가 살던 춘추시기는 상조(商朝)와 1천여 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성탕과 이윤 두 사람이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흥미롭지만 또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상나라 사람들이 조상이 죽은 후 단지 다른 곳에 떨어져 있을 뿐 다른 형식으로 살아간다고 여긴 것을 단순히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지금 이런 문제에서 너무 맹목적으로 현대의 일부 천박하고 비루한 현대관념을 미신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현대과학에서도 이미 우리의 지혜가 고인(古人)보다 고명하지 않으며 단지 오늘날 문명의 형태가 고대와 다를 뿐임을 인식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이아》
2. 《여씨춘추》
3. 《상서‧함유일덕》
4.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5. 《황람(皇覽)》
6. 《금루자(金樓子)・흥왕편(興王篇)》
7. 《안자춘추‧안자간(晏子諫)》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