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배도(杯渡)는 속가의 실제 이름을 알지 못한다. 평소 늘 나무로 된 술잔을 타고 강을 건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배도(杯渡 잔을 타고 건넌다는 의미)라 불렀다.
배도는 기주(冀州)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수행이 세밀하진 않았지만 신력(神力)이 탁월해 그 유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어느 날 북방에서 한 집에 기숙했는데 그 집에 금불상이 하나 있었다. 배도가 훔쳐서 떠나자, 집주인이 알아차리고 뒤쫓았다. 배도는 천천히 걸어가고 주인은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다 강가에 이르자 배도가 등에 진 꼴망태에서 나무 술잔을 꺼내 물 위에 띄우더니 여기에 올라타고 강을 건넜다. 바람과 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볍고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아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얼마 후 강을 건너 경성(京城 건강 지금의 남경)에 도착했다. 이때 그 외 외모는 약 40세 정도로 보였고 새끼로 띠를 두르고, 남루한 차림으로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다. 하는 말도 들쭉날쭉했고 기쁨과 노여움이 일정하지 않았다.
때로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들어가 그 속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신발을 신고 침상에 오르기도 했으며, 때로는 맨발로 시장을 활보하기도 했다. 가진 거라곤 오직 꼴망태 하나뿐이었고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연현사(延賢寺)의 법의(法意) 도인의 거처를 찾아가니, 법의가 따로 방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고정된 거처가 생겼다.
나중에 그가 강을 건너 광릉에 가려고 강가에서 배를 찾았지만 사공이 그를 태우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배도가 한탄하며 말했다.
“그대와 내가 인연이 없으니 억지로 할 순 없소이다. 내게는 또 자가용 배가 있다오.”
그리고는 다시 나무 잔을 꺼내 타고 물결을 따라 내려갔다. 술잔이 저절로 흘러가더니 곧바로 강 건너 북쪽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이 마을의 이(李)씨 집에서 팔관재(八關齋)를 하고 있었다. 배도가 곧바로 재당(齋堂)에 들어가 앉으면서, 꼴망태는 뜰 가운데 놓아두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누추하므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 씨는 꼴망태가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담장 밑으로 옮겨 놓으려 했다. 몇 사람을 시켜 치우게 했으나 아무리해도 들 수 없었다.
배도가 식사를 마치고, 이를 집어 들고 떠나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사천왕(四天王)이 장차 이 씨 집안에 복을 내릴 것이다!”
이 때 심부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자신이 배도의 망태 속을 엿보니 네 명의 작은 아이가 있었고 모두들 키가 몇 치가량 되었는데 얼굴 생김이 단정하고, 옷이 선명하고 깨끗하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에 그가 신승(神僧)임을 알았다. 밖에 나와 찾아보았지만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마을 서쪽 경계의 몽롱(蒙籠)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배도를 발견했다. 이 씨 주인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집으로 가실 것을 청했다. 그리고 날마다 공양드렸으나, 배도는 재계를 지키는 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었다. 심지어 매운 생선회까지 먹어, 속인과 다르지 않았다. 여러 백성들이 물건을 가져다주면,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였다.
당시 연주(袞州)자사 유흥백(劉興伯)이 그의 신기한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을 보내 맞아들였다. 배도가 등에 망태를 지고 가서 유흥백을 만났다. 유흥백이 10여 명의 사람들에게 망태를 들어보라고 했지만 들지 못했다. 유흥백이 직접 망태 속을 보니, 오직 다 떨어진 납의(納衣) 한 벌과 나무 술잔 하나만 보였다. 유흥백이 몹시 실망해서 배도에게 어찌된 이유인지 물었지만 배도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연주에서 며칠을 머문 배도는 다시 이 씨 집으로 돌아왔다. 또 20여 일을 묵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더니 갑자기 말했다.
“내가 가사 한 벌이 필요하니, 점심때까지 마련해 주게.”
이 씨 집에서 곧바도 옷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점심때까지 만들지 못했다.
그러자 배도가 말하였다.
“내 잠시 나갔다 오겠네.”
집을 나가더니 날이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현(縣) 전체 백성들이 일종 기이한 향기가 나는 것을 맡았는데 몹시 의아하게 여겨 도처로 배도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배도가 북쪽 바위 밑에서 다 떨어진 가사를 땅에 깔고, 그 위에 누워 이미 원적(圓寂)한 것을 발견했다. 머리 앞부분과 다리 뒤편에 모두 연꽃이 피어 있었는데 이 꽃이 아주 신선하면서도 향기로웠다.
하루 저녁이 지나자 시들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함께 시신을 장례 지냈다.
며칠 후 어떤 사람이 북쪽에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배도가 망태를 지고, 팽성(彭城)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소.”
이에 사람들이 관을 열어보니, 오직 미투리 신발만 남아 있었다.
배도가 팽성에 와서 불법(佛法)을 독실하게 믿는 황흔(黃欣)이란 사람을 만났다. 황흔이 배도를 자기 집으로 모셔다 공양했다. 황흔은 집은 몹시 가난해서 공양이라곤 보리밥뿐이었지만 배도는 이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반년을 그 집에 머무르다가, 어느 날 문득 황흔에게 말했다.
“꼴망태 서른여섯 장을 준비해주게. 내가 꼭 쓸 곳이 있다네.”
황흔이 말했다.
“집안에 십여 장 가량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돈이 없어서 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배도가 말했다.
“자네 집안을 잘 찾아보면 아마 있을 걸세.”
황흔이 샅샅이 집을 찾아보니, 과연 서른여섯 장을 얻었고 더욱이 다 떨어지고 헌 것도 완전히 새것처럼 변했다.
배도가 이것들을 잘 밀봉한 후 황흔에게 봉한 것을 열게 했다. 그러자 그 안에 돈과 비단이 가득했다. 대략 백만 냥쯤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배도의 분신(分身)이 다른 곳에서 탁발해 얻어온 것을 가져다 황흔에게 보답한 거라고 설명했다. 황흔은 이것을 받아 모두 공덕(功德)을 위해 썼다.
약 1년이 지나자 배도가 황흔과 헤어져 떠나려 했다. 황흔이 그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었지만 이튿날 아침 양식은 그대로 있고, 배도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배도가 송강(松江)에 이르자 여전히 나무 잔으로 강을 건넜다. 회계(會稽) 섬현(剡縣)을 유람한 후 마지막으로 천태산에 올랐다. 몇 달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배도는 행방이 일정하지 않았고 설사 황제가 칙령으로 불러도 따르지 않았다.
이 때 남주(南州)에 진(陳)씨 일가가 있었다. 자못 의식이 넉넉한 집안이었다. 배도가 그 집에 가자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도하(都下 경성 아래)에 또 다른 배도가 있다고 말했지만, 진 씨 집 5부자는 모두 믿지 않았다. 나중에 도하에 직접 가서 보니 과연 자기 집에 있는 배도와 형체나 모습이 똑같았다.
진 씨는 그를 위하여, 한 홉의 꿀에 잰 생강과 작은 장도칼·훈륙향(熏陸香)·수건 등을 마련하였다. 배도는 곧 꿀에 잰 생강을 다 먹어 치우고, 나머지 물건은 그대로 무릎 앞에 두었다. 그들 부자 다섯 사람은 혹 그가 그의 집에 있는 배도가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곧 두 아우는 그곳에 남아 머물면서 지켜보게 하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의 배도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무릎 앞에도 역시 향과 작은 칼 등이 있었다. 다만 꿀에 잰 생강을 먹지 않은 것만이 다를 따름이었다.
이어 그는 진 씨에게 말하였다.
“칼이 무디니, 갈아놓는 것이 좋겠소.”
나중에 두 아우가 돌아와서 말했다.
“그곳에 있던 배도는 이미 영취사(靈鷲寺)로 떠났습니다.”
당시 오군(吳郡)에 주영기(朱靈期)란 사람이 고려(高驪)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면서 폭풍을 만나 9일간 표류하다 어느 섬에 이르렀다. 섬에는 아주 높고 큰 산이 있었다. 산에 들어가 땔감을 채집하다가, 사람 다니는 길을 발견하였다. 주영기는 곧 몇 사람을 시켜 길을 따라가 먹을 것을 얻어오게 했다. 10리 남짓 가니, 경쇠소리가 들려오고 향을 사르는 냄새가 났다.
이에 그들이 함께 부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한 절이 나타났다. 매우 빛나고 화려하여 대부분 7보(寶)로 장엄되어 있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돌로 만든 사람으로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조금 걷자니 창도(唱導)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돌아가 다시 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은 돌로 만든 사람이었다. 이에 주영기 등은 서로 생각하였다.
‘이 분들은 성승(聖僧)이며, 우리들은 죄인이어서 만나볼 수 없는 분들이다.’
그래서 함께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고, 다시 가서 보았다. 그랬더니 진짜 사람(眞人)이 나타나 주영기 등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여 놓았다. 음식은 채소였으나, 향과 맛이 세속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함께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속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그 중 한 승려가 말하였다.
“여기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0여 만 리나 됩니다. 그렇지만 지극한 마음만 있다면,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어 주영기에게 물었다.
“배도 도인을 아십니까?”
“매우 잘 압니다.”
그러자 북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바랑이 있고 석장과 발우가 걸려 있었다. 그 승려가 말하였다.
“이것은 배도의 물건입니다. 이제 그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발우를 그에게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편지를 써서 함 속에 넣었다. 따로 푸른 대나무 지팡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뱃전 앞 물 속에 던져 놓고, 배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도 속히 고향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헤어졌다. 한 사미를 시켜 산문까지 전송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 길로 7리를 가면 곧 배 있는 곳에 이를 것입니다. 먼저 온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7리 가량을 가자 배 있는 곳에 닿았다. 곧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하였다. 오직 배가 산꼭대기 나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 석두회(石頭淮)에 이르러 머물렀다. 또한 다시는 대나무 지팡이가 있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회수(淮水)로 들어가서 주작문(朱雀門)에 이르렀다. 곧 그곳에서 배도를 만났다.
그는 큰 배의 난간에 올라타고, 지팡이로 뱃전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말아, 말아, 어째서 가지 않는 것이냐?”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주영기 등이 배 멀리에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배도는 곧 스스로 배에서 내려왔다. 편지와 발우를 받아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무도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배도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더러 돌아오라고 하는구나.”
발우를 집어 공중으로 던졌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4천 년이 되었구나.”
또 제해(齊諧)라는 사람의 처 호모(胡母)씨가 병이 들었다. 온갖 치료를 해도 고치지 못했으나 배도를 청해 주문을 한번 외우자 즉시 나았다. 이에 제해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받들었다. 또 그를 위해 전기(傳記)를 만들었다.
원가(元嘉) 3년(426) 9월, 제해가 집을 떠나 경성으로 들어갔다. 1만 냥의 돈과 물건을 남기며, 제해에게 맡겨서 재(齋)를 열게 했다. 이에 작별하고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적산호(赤山湖)에 이르자, 이질(痢疾)을 앓다 죽었다. 제해가 곧 재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와서, 건업(建業)의 복주산(覆舟山)에 묻었다.
원가 4년(427)에 이르러 오흥(吳興)에 소신(邵信)이란 사람이 있었다. 불법을 매우 받드는 사람이었다. 상한병(傷寒病)에 걸리자 아무도 간병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슬피 울면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나타나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제자다. 근심하지 말거라. 스승님께서 곧 오실 것이다.”
그가 대답했다.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올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러자 배도가 나타나서 말했다.
“오는 것에 다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허리띠 머리에서 한 홉 가량의 가루를 꺼내 복용시키자 병이 바로 차도가 있었다.
원가 5년(428) 3월 8일, 배도가 다시 제해의 집에 왔다. 여도혜(呂道慧) 및 제자인 달지(怛之)·두천기(杜天期)·수구희(水丘熙) 등이 모두 함께 보았다. 이들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예배를 드렸다.
배도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올해는 아마도 큰 흉년이 들 것이야. 정성되게 복업을 닦아야 하네. 법의(法意)도인은 매우 덕이 있는 승려이지. 그를 찾아가 옛 절을 수리하여 세워서, 재앙과 화를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잠시 후 위에서 한 승려가 배도를 부르자 배도가 그곳을 떠나가면서 말했다.
“빈도는 곧 교주(交州)·광주(廣州) 사이로 향할 것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
제해 등은 정중하게 절하며 그를 전송했다. 그의 자취는 여기서 끊어졌다. 하지만 요즘에 이르러서도 때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정확한 일이 아닌 까닭에, 전할 만한 것은 못된다.
자료출처: 《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