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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혜원(慧遠)

글/ 천형(天馨)

【정견망】

석혜원(釋慧遠)의 본래 성은 가(賈)씨로 안문(雁門)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재질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열세 살 때 외삼촌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에 와서 유학했다. 그는 태학 학생이 되어 유가의 육경(六經)을 널리 연구했고 특히 노자와 장자의 학문에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넓고 식견이 뛰어나 나이든 선비거나 유명한 사람들이라도 그의 깊은 이해력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1세에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범선자(範宣子 당시 유명한 유가)를 따라 그와 함께 세상을 피해 은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침 석호(石虎)가 죽으면서 중원에 큰 난리가 일어나, 남쪽으로 가는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사문 도안(道安 석도안)이 항산(恒山)에 절을 짓고 불법을 널리 전파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혜원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만나자마자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진짜 나의 스승님”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는 툭 트이면서 문득 깨달아 이렇게 탄식했다.

“유가(儒家)나 도가(道家) 등 구류(九流)의 학문은 (불법에 비하면) 모두 쌀겨나 찌꺼기에 불과하구나.(儒道九流,皆糠秕耳)”

이에 친동생인 혜지(慧持)와 함께 유가의 상징인 비녀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불문(佛門)에 들어와서는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언제나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하려 했고 대법(大法)을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경전을 보면 정밀하게 그 뜻을 생각하고 외우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밤낮을 쉬지 않았다.

가난해서 돈이 없어 옷에 넣을 솜도 없었지만 두 형제는 성실히 공부하며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이때 사문 중에 담익(曇翼)이 매번 등불을 켤 비용을 대주었다. 도안이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담익이 참으로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라고 했다.

혜원은 전생에 닦은 지혜와 이해력을 지닌데다 아주 멀리까지 공부하려는 수승(殊勝)한 마음을 냈다. 때문에 신명(神明)이 빼어나게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주 멀고 깊이까지 알았다.

때문에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했다.

“우리 동쪽나라에 도(道)를 전하는 일은 혜원에게 달려 있다.”

그의 나이 24세 때 도안의 강론을 들으러갔는데 어떤 사람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의(實相義)에 대해 질문했다. 도안이 한참을 설명하며 대화를 주고받았으나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이 더 많아졌다. 이에 혜원이 《장자(莊子)》에서 비슷한 것을 들어 설명해주자 의심하던 이가 환히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폐기하지 않게 해달라는 혜원의 청을 특별히 허락해주었다.

원래 도안의 제자들 중에서 법우(法遇)와 담휘(曇徽)가 풍채와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도 있고 행동이 민첩했지만 둘 다 혜원에게 탄복했다.

그 후 난리 통에 도안이 제자들과 강남으로 가기로 하자 혜원도 도안을 따라 번성과 면양을 떠돌았다.

전진(前秦) 건원(建元) 9년(373) 진(秦)나라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해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구속되어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도안은 이에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조를 나눠 각기 떠나게 했다. 길을 떠날 때 다른 장로대덕(長德 큰 제자들)들은 모두 도안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혜원만은 단 한 마디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이에 혜원이 스승에게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저만 홀로 아무런 가르침도 받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시는 지 두렵습니다.”

그러자 도안이 말했다.

“공(公) 같은 사람에게 어찌 근심할 게 있겠는가?”

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기 위해 심양(潯陽)에 이르렀는데 여산(廬山) 봉우리가 청정해서 마음을 쉬기에 충분했다. 이에 용천정사(龍泉精舍)를 짓고 머물렀다. 이곳의 단점은 물이 없어서 먼 곳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혜원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마땅히 땅에서 샘이 솟아날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곧 개울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에 큰 가뭄이 들었다. 혜원이 연못 옆에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독송하자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잠시 후 큰 비가 내렸고 이 해에 풍년이 들었다. 때문에 거처하던 정사의 이름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했다.

한편 당시 혜영(慧永)이란 승려가 서림(西林)에 머물렀는데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청해서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혜영이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부탁했다.

“원공(遠公 혜원에 대한 존칭)은 바야흐로 도(道)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門徒)들이 이미 많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빈도가 머무는 곳이 비좁아 함께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환이가 혜원을 위해 여산(廬山)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하였다. 저 유명한 동림사(東林寺: 여산 동남방에 혜원이 머물던 곳으로 후에 정토종의 본산이 됨)가 바로 이곳이다.

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다 살렸다. 향로봉(香爐峯)을 배경으로,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을 배치했으며 돌로 기초를 쌓고 의지하여 소나무 숲을 조성해 맑은 개울물이 계단과 회랑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 안에 가득했다.

다시 사찰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두었는데 빽빽한 숲에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때문에 이곳에서 바라보거나 밟는 모든 것들이 다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이 엄숙해지게 했다.

혜원은 천축에 있다는 불영(佛影 부처님 그림자)에 대해 들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그림자다.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는데 고비 사막에서 서쪽 1만 5,850리 떨어져 있다. 혜원은 매번 이에 대해 들을 때마다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했고 뜻을 세워 우러러 그 모습을 늘 한번 보고 싶어 했다. 때마침 서역에서 온 도사가 있어 불영의 신광(神光) 모습을 묘사해주자 혜원이 곧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지었다. 뛰어난 화공을 불러 미묘한 솜씨를 남김없이 발휘해 담담한 색으로 그리게 했다. 그 빛이 마치 허공을 쌓은 듯해서 멀리서 보면 연기나 아지랑이 같았고 신광(神光)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또 전에 심양의 도간(陶侃 동진의 유명한 장군)이 광주(廣州)에 주둔할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조성한 불상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이에 그는 이 불상을 맞이해 무창(武昌)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옮길 때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여겨 사자를 보내 영접하게 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했다. 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도간은 오직 검에 뛰어나지만
불상은 신을 드러내네.
구름 위를 날고, 진흙속에 파묻히니
그 거리 얼마나 아득한가?
정성으로 오게 할 수는 있어도
힘으로 불러오긴 어렵다네!

陶惟劍雄 像以神標
雲翔泥宿 邈何遙遙
可以誠致 難以力招

혜원이 절을 완공한 후 지성으로 이 불상을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했다. 그러자 불상이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세속의 인연을 끊고 청정한 믿음을 행하는 사람들이 약속하지 않고도 찾아왔고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 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 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 남양(南陽)의 종병(宗炳)과 장래민(張萊民), 장계석(張季碩) 등이 모두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혜원을 찾아와 귀의했다.

이에 혜원이 정사의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 앞에서 재(齋)를 올리고 함께 서방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면서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서원문을 짓게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섭제(攝提 호랑이)의 해 칠월 무진(戊辰) 초하루부터 28일 을미(乙未)일까지 법사 석혜원은 깊고 그윽한 이치에 감응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명(命)을 잇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하려는 신심을 지닌 선비 123명이 여산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모두 함께 향과 꽃을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인연에 따라 화생하는 이치를 이미 잘 알아 삼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의 보응이 분명히 드러나며, 감응해서 옮겨 태어나는 수(數)에 이미 부합하면 선악의 보응이 반드시 일어남을 압니다. 어떤 것이든 결국은 없어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고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함을 깨달아 세 가지 업보가 서로 무너뜨림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이곳에 모인 뜻을 같이 하는 현명한 이들과 함께 저녁에 두려워하고, 아침에 부지런히 힘쓰며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무릇 신(神)이란 감응하여 통할 수는 있어도, 자취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다면 어두운 길도 지척이 되겠지만 인도하는 주체가 없다면 나루터가 어디인지 모른 채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지금 다행히 따로 도모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이들의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펼쳐 믿음을 여니 밝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부처님의 모습이 잠잘 때나 꿈에도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온 것보다 백배나 더합니다.

이에 신령한 그림이 빛을 드러내니 그림자가 신(神)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고 일은 사람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여 마음을 다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같다 해도, 저녁에 돌아가는 시간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스승님이자 벗(=혜원)이 매우 슬퍼할 만한 일입니다. 때문에 그는 강개한 마음으로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 같이 한 마음이 되어 그윽한 극(極 최상의 진리)에 마음을 집중하고 동지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세계(=극락)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게 했습니다.

혹시 무리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 가장 먼저 신계(神界 극락)에 오를 수 있다면 신성한 산봉우리에서 홀로 즐기면서 깊은 계곡에서 함께 보전하자던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과, 뒤에 올라올 이들이 다 같이 함께 나아갈 도리를 힘써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 비로소 부처님의 훌륭한 모습을 관하면 마음이 열려서 바르고 밝아지며 깨달음으로 지혜가 새로워지고, (부처님의) 교화로 인해 몸이 바뀔 것입니다. 흐르는 물속에서 연꽃을 깔개로 앉거나, 옥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입고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마칠 것입니다.

몸은 편안함을 구하지 않아도 더욱 편안해지고, 마음은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쁘게 될 것입니다. 3악도(途 지옥 축생 아귀)에 가까이 가더라도 멀리 그곳을 벗어나며, 하늘 궁전을 기껍게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이별할 것입니다. 극락세계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잇고 궁극의 휴식(太息 열반)을 기약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을 추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혜원은 기상(神韻)이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바르고 곧아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리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를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서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 묵묵히 그곳을 떠났다.

혜의(慧義)란 법사가 있었는데 평소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 두려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 혜보(慧寶)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군(諸君)들은 재주가 평범해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우러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산에 이르니 마침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매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려 끝내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나와서는 혜보에게 말했다.

“이분은 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혜원이 남들을 심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동진의 장군 은중감(殷仲堪)이 형주(荊州)로 가는 길에 여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역(易)의 본체에 대해 논하며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이렇게 찬탄했다.

“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동진의 사도(司徒) 왕밀(王謐)이나 호군(護軍) 왕묵(王黙)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해 멀리서나마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냈다.

한번은 왕밀이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그러자 혜원이 이렇게 회답했다.

“고인(古人)은 사방 한자나 되는 큰 구슬도 아끼지 않고, 촌음(寸陰 아주 짧은 시간)도 무겁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중히 생각한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시주께서 기왕에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고 부처님의 이치를 타고 마음을 부리시는데 이렇게 미루어 나간다면 어찌 또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깐이라도 이 이치를 생각해보셨다면 이미 오래전에 터득하셨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글에 대해 답장으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오두미도 반란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江州)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노순은 나라의 도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우리 불법(佛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나중에 남송의 무제(武帝, 유유劉裕 420~422)가 노순을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자 측근들이 혜원에 대해 참소했다.

“원공(遠公)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그러자 무제가 말했다.

“원공은 세상의 사표와 같은 분이니 필경 나와 남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혜원의 밝은 견해에 굴복했다.

불경이 강동 지방에 처음 전해질 때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고 율장(律藏)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그 도(道)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 법정(法淨)과 법령(法領) 등을 시켜 두루 여러 경전을 찾게 했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전에 스승인 도안(道安)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번역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해 자못 의심이 들거나 문맥이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 출신의 승려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했는데, 진(晉)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潯陽)을 찾아왔다.

혜원이 그를 초청하여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다시 번역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두 가지 학문이 곧 흥성해졌다. 또한 혜원이 두 경서에 서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 학자들에게 남겼다.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도를 실천하고 불법(佛法)을 선양하는데 힘썼다. 그러므로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그러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곧 편지를 보내 인사를 올렸다.

“혜원이 머리 숙여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 요숭)의 편지를 받고, 당신의 덕행과 안부에 대해 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셨는데 근래 국경을 넘어 오셨습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형편은 못되지만 당신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다만 강과 호수를 벗어나기 어렵고 지리적 상황이 좋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아직 서로 연락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신께서 보배를 품고 오셨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가 (소식이 왔나) 살펴보지만 단지 당신의 아름다운 분위기만 느낄 뿐 달려가서 보고픈 마음을 펼칠 길이 없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대법(大法 불법)이 널리 퍼져 세 지역이 함께 만나길 기대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가르침은 옛날과 같습니다. 진실로 아직 미묘한 문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한 가르침과 완전히 교감하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무릇 전단나무를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배고,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을 토하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입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정으로 감응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때문에 대법(大法 큰 가르침)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 법륜(法輪)이 8개의 바른 길에서 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三寶)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부루나(滿願)존자가 홀로 시대에 다시없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며,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과거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훌륭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으로 옷을 만들어 보내니, 부디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입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을 보냅니다. 이런 물건들은 법물(法物)로 단지 제 마음을 표시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자 구마라집이 이렇게 회답했다.

“구마라집이 답장 드립니다. 아직 직접 만나 말하지 못했고 또한 글도 서로 달라서 마음을 전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얻지 못했습니다. 인편에 전해온 선물을 통해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경전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護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힘쓰십시오! 당신은 그 일을 훌륭히 달성하실 것입니다. 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戒·博聞·辯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사람은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하고 막힙니다. 당신은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담아 호의를 전하고, 통역을 통해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조금이나마 보내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만들어 보내주신 옷은 조금 손을 보아 법좌(法座)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澡灌: 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만약 (마음을) 치달려 흩어지지 않게 한다면
깊이 실상(實相)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경 공(空)의 모습에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만약 선(禪)과 지혜 즐긴다면
이는 법성(法性)이라 비출 곳조차 없으리라

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고
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니로다.
그대가 터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랍니다.

旣已捨染樂 心得善攝不
若得不馳散 深入實相不

畢竟空相中 其心無所樂
若悅禪智慧 是法性無照

虛誑等無實 亦非停心處
仁者所得法 幸願示其要

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날이 점차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 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항목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했다.

근본원리는 필경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일어남과 쓰러짐은 끝이 있는가?
한 티끌이라도 경계의 움직임에 관계되니
발전해 나가면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미혹된 생각들이 거듭 서로 일어나면
이치에 어긋나니 절로 막힘이 생겨난다.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길을 여는 것은 일세로 결정되지 않노라.

지금 세상에 깨달은 종사(宗師) 없다면
누가 장차 그윽한 깨침을 잡을 수 있으리.
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남은 생을 서로 함께 하길 바라노라.

本端竟何從 起滅有無際
一微涉動境 成此頹山勢

惑想更相乘 觸理自生滯
因緣雖無主 開途非一世

時無悟宗匠 誰將握玄契
來問尙悠悠 相與期暮歲

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를 중국어로 번역해 3분의 2를 마쳤을 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후진(後秦)에 들어와, 다시 이 책을 잘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을 보내 관중(關中)에서 나머지 부분을 다시 번역하도록 요청했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晉)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과 관중의 훌륭한 이론들이 남쪽 땅에 모이게 된 것은 혜원의 노력 덕분이다.

이에 외국 여러 승려들이 중국 땅에 대승(大乘) 도사(道士)가 있다고 칭송하며서 매번 향을 피우고 예배할 때마다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에 두었다. 그의 신령한 이법(理法)의 자취는 그러므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앞서 중토(中土)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란 학설이 없었다. 다만 부처의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부처란 지극하니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치인데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지극함은 불변(不變)을 본성으로 삼고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을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이 이 글을 보고는 찬탄하였다.

“변두리나라(역주: 중국을 말함)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이 없는데도 암암리에 이치에 부합하니

이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후진(後秦)을 창업한 요흥(姚興)이 혜원의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능과 사상을 찬탄했다. 편지를 보내 마음을 표현하고 편지와 선물이 끊이지 않았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로 짠 다양한 변상(變像)을 보내 자신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했다.

또 동생 요숭(姚嵩)을 시켜 옥으로 만든 불상을 바치게 했다.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번역을 마치자 혜원에게 서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대지도론》의 새로운 번역이 끝났습니다. 이 책은 용수보살이 지은 것으로 또한 대승경전들의 지귀(旨歸)입니다. 마땅히 한편의 서문을 지어 지은이의 뜻을 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의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며 감히 지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서문을 지어 후세에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혜원이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제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해 지은이의 뜻을 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담으려 할 때 작은 주머니에는 넣을 수 없고 깊은 우물을 길으려 할 때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내신 글을 펴보던 날 감당할 수 없음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고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보내 말씀하신 어려움을 생각해 마음속에 품은 바를 거칠게나마 엮어보았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다시 눈 밝은 대덕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것이 이와 같았다.

그는 또 《대지도론》의 문구가 번잡하고 많아서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에 요점을 초록해 20권으로 편찬하니 순서가 잘 정리되고 이치와 내용이 깊고 우아해 배우는 사람들의 수고를 반이상 줄일 수 있었다.

나중에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러 가는 길에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더러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혜원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자 환현이 직접 산으로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했다.

“옛날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춘 적이 있는데 공께서는 부디 공경하지 마십시오.”

환현이 큰소리를 쳤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은중감은 본래 죽은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막상 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경하게 대했다.

환현이 물었다.

“부모님께 받은 몸은 함부로 다치게 할 수 없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자르는가?”

혜원이 대답했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立身行道)”

환현이 이 대답을 훌륭하다고 하며 속에 품고 있던 난처한 질문들을 감히 묻지 못했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으나 혜원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혜원이 말했다.

“시주께서도 편안하고 그도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인물이로다.”

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 혜원을 모시려고 애썼다. 또 편지와 사람을 보내 벼슬자리에 초빙했다. 하지만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세어 끝내 뜻을 돌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사문은 경전의 가르침을 베풀고 그 뜻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계율을 닦아 바른 행동으로 큰 교화를 널리 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위배됨이 있는 사람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오직 여산만은 도와 덕이 있는 곳이니 수색하지 않아도 좋다.”

이에 혜원이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렵혀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매번 이런 것을 만날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늘 뜻밖의 불운이 닥쳐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는 것처럼 청탁(淸濁)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렇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이치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들은 거짓으로 통하는 길을 끊고,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질 것입니다. 도인과 세속이 함께 일어나고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이어서 승단의 조례와 규제의 개정안을 제시하자, 환현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예전에 진(晉) 성제(成帝, 326~334)가 어릴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했는데 그는 ‘사문도 마땅히 왕을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반면,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褚昱), 제갈회(諸葛恢) 등은 ‘사문은 왕에게 경례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견이 분분해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실권을 잡자 승려들도 모두 공경을 표시하게 하려고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려가 왕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이미 정서에도 맞지 않고 이치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큰일이니 그 바탕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 여덟 대신들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보내니 왕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 대해 진술하십시오.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생각하는 바를 자세히 진술하여 반드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합니다.”

이에 혜원이 답장을 썼다.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열어주어, 나를 잊고 남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 천하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높은 것을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하고,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은사를 지칭)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대업(大業 성불)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때 깨달음이 진실로 이미 큰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에서 입는 옷이 아니고 발우(鉢盂)는 종묘에서 사용하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속세 밖의 사람이니 왕에게 공경을 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환현은 비록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해 원래 뜻을 고집했지만 혜원의 생각을 알고는 주저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얼마 후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한 후 곧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불법(佛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뜻을 받들어 공경하게 하고자 했노라. 그러나 지금은 일이 내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함으로써 더욱 빛나는 태도를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에게 예를 올릴 필요가 없다.”

혜원은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었는데 모두 다섯 편이다.

첫 번째 편은 재가(在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집안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은 임금의 교화를 따르는 백성이다. 그들의 심정은 아직 세속과 다르지 않고, 그들의 자취는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같다. 그런 까닭에 부모에 대한 사랑과 군주를 받드는 예절이 있어야 한다. 예법과 공경에는 근본이 있기에, 마침내 이것에 근거해 가르침을 이룬다.”

두 번째 편은 출가(出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출가라 하는 것은 세속을 등짐으로써 자기 뜻을 구하고, 속인에서 변하여 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풍속이 변하면 복장도 세상의 전례(典禮)와 같은 예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면 마땅히 그 자취를 고상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에 빠진 속인들을 번뇌의 흐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으며, 거듭되는 겁(劫)에서 어두운 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다. 멀리는 삼승의 나루와 통하고 가깝게는 인천(人天)세계의 길을 열어준다.

만일 한 사람이 덕을 온전하게 하면 그 도가 육친(六親)에 미치고 은택이 천하에 흐른다. 비록 왕후(王侯)의 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이미 천자의 도리와 일치하여 생민을 편안하고관대하게 해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륜(天倫)의 무거운 의리와 어긋나는 것 같지만, 효도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는 임금을 받드는 공손함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공경을 잃은 것이 아니다.”

세 번째 편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교화를 따르지 않음)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근본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이는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고, 속세의 경계를 초월한 이는 감정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감정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삶을 멸(滅)할 수 있다.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면 그 정신이 명합(冥合)할 수 있다.

정신과 명합하면 경계가 끊어지는 까닭에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문은 비록 만승(萬乘)의 천자와 대등한 예를 행하면서 그 일을 고상하게 하고, 왕후(王侯)의 지위을 갖진 않고 그 은혜를 입는다.”

네 번째 편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 진리를 체득한 사람은 동시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처님과 주공(周公)·공자는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처(出處)는 모두 다르지만 마지막에 지향하는 바는 반드시 같다. 그런 까닭에 비록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불겸응(不兼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겸하여 받아드릴 수 없음을 말한다.”

다섯 번째 편은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 육체는 사라지지만 정신은 없어지지 않는다)이다. 그 내용은 “인식작용과 정신작용이 치달리면, 이를 따라 우리 몸도 치달린다”고 했다.

이상은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때부터 사문들은 세상 밖에서의 자취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환현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진(晉)의 안제(安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국대부(輔國大夫) 하무기(何無忌)는 이때 혜원에게 권유하여 황제를 뵈옵고, 문후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혜원이 편지를 썼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陽月和暖], 수라가 입맛에 잘 맞기를 비옵니다. 빈도는 전에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자 쇠약해져 병이 심해졌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자비하신 조서(詔書)를 받아보았습니다. 곡진하게 영광스러운 위문을 드리우셔서, 온갖 두려움의 깊음이 실로 가슴에 백배나 더합니다. 요행히 경사스러운 모임을 만났으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과 감개를 자못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제가 조서로 회답하였다.

“봄기운을 느끼면서도[陽中感懷] 그대가 앓는 병이 아직 좋아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마음에 어리어서 잊을 수가 없노라. 지난달에 강릉을 떠났지만, 도중에 온갖 좋지 않은 일이 많아 더디기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본래는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그대가 이미 산림에서 원기를 보양하는 터이고, 게다가 앓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득히 다시는 인연이 없을 듯하여 한탄만 더할 뿐이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은 자신의 재주를 믿고 세상에서 멋대로 굴며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혜원을 한번 만나자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했다.

혜원은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뛰어나고, 밖으로는 뭇 서적에 빼어났다. 무릇 그의 문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의지하고 모방하지 않음이 없었다.

혜원이 《상복경(喪服經)》을 강의하자 뇌차종(雷次宗)·종병(宗炳) 등이 모두 책을 들고 그의 강의를 이었다. 그 후 뇌차종은 따로 《의소(義疏)》를 지어 책머리에 뇌씨(雷氏)의소라고 했다.

이에 종병이 이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다.

“예전에 그대와 함께 석화상[釋和尙: 혜원] 밑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 강의를 들었거늘 어찌하여 지금 곧 책머리에 뇌씨(雷氏)를 일컫는다 말인가?”

그의 교화가 도인과 속인에 아울러 행해진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혜원은 여산에 자리 잡은 후부터, 30여 년 동안 산 밖을 나가지 않았고 발자국도 세속에 들여 밀지 않았다. 매번 손님을 보내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호계(虎溪)를 경계로 삼았다.

그러다 동진 의희(義熙) 12년(416) 8월초 혜원의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6일째가 되자 더욱 심해졌다. 이에 대덕과 나이 많은 노승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된장을 넣은 술을 마시길 권했다. 그러나 혜원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쌀 즙이라도 마시기를 청했으나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꿀물을 타서 장(漿)을 만들어 드시게 하니, 곧 율사(律師)에게 책을 펼쳐 마셔도 되는지 확인하게 했다. 책을 절반도 넘기지 않았을 때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 83세였다.

문도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왔고, 수레바퀴가 이어져서, 어깨와 어깨가 서로를 뒤따랐다.

혜원은 범부(凡夫)들의 정을 자르기 어렵다고 여겨 7일장으로 치르게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소나무 밑에 드러내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제자들이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심양태수(潯陽太守) 완보(阮保)는 여산의 서쪽 마루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묘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사령운이 그를 위한 비문을 지어, 남긴 덕을 새겼다. 남양(南陽)의 종병(宗炳)도 절 산문에 비를 세웠다.

본래 혜원은 문장을 잘 지었는데 글의 기운이 맑고 우아했다. 법석에서의 담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잘 취했다. 게다가 용모가 단정하고 풍채가 시원하고 깨끗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그가 지은 논·서(序)·명(銘)·찬(贊)·시(詩)·편지 등을 모아 문집을 만드니 10권 오십여 편이었다.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자료출처; 《고승전》,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