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형(天馨)
【정견망】
승조(僧稠)는 원래 손씨(孫氏)로 창려(昌黎) 출신인데 말년에는 거록(钜鹿) 영도(癭陶)에서 살았다. 그는 성품과 도량이 순결하고 성실하였으며 효도와 신의로 유명했다. 부지런히 세간의 서적들을 공부하여 경서와 역사를 두루 통달했으며 태학박사(太學博士)로 등용되어 고전을 강의하고 해석하여 명성이 조정을 뒤덮었다. 그리하여 장차 나랏일을 맡아보고 조정을 받들어 나가게 되었으나 도(道)의 인연이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세간의 번거로움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는 한 번 불경을 보기만 하면 환히 이해하였는데 그때 나이 28세였다.
거록(钜鏕) 경명사(景明寺)의 승식(僧寔) 법사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는데 머리를 깎고 비로소 처음으로 경론을 보니 슬픔과 반가움이 서로 엇갈리면서 정신적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다섯 가지 서원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도방(道房) 선사로부터 정신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지관(止觀)법을 전수받았다. 도방은 바로 발타(跋陀 불타발타라)의 뛰어난 제자였다. 승조는 선정의 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북쪽으로 정주(定州) 가어산(嘉魚山)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어 오랫동안 수행하였지만 전혀 증험한 것이 없었다.
이에 산을 나가 《열반경(涅槃經)》을 외우려고 하던 참에 문득 태산에서 왔다는 한 승려를 만났다. 승조가 자기의 심정을 알려주자 그는 선정을 수행할 때 다른 뜻은 삼가라고 간절히 권고했다. 그러면서 일체 생명은 모두 초지(初地)의 선정의 맛이 있으니 반드시 인연에 따라 구해야만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승조가 그의 말을 따라서 곧 열흘 동안 마음을 가다듬자 과연 선정을 이룩하고 늘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법에 의거하자 잠을 자거나 깨어나거나 전혀 욕망에 대한 생각이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있었다.
나중에 조주(趙州) 장공산(障供山) 도명(道明) 선사를 찾아가서 배웠다. 그는 음식을 절도 있게 먹고 마음을 채찍질하면서 90일 동안 하루 한 끼 4되 가량의 쌀만으로 살았다. 돌 위에 자리를 깔고 시간이 가는 것도 잊었고 무명옷의 실오리가 살갗을 파고들어도 잡아당기기만 하고 벗지 않았다. 어떤 때는 밥을 짓다가 쌀이 채 익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거두고 선정에 들어 먹을 때가 지나 이미 지은 밥을 모두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먹어치운 적도 있었다. 또한 그는 항상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아서 도적을 만나 위협을 당해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한번은 작산(鵲山)의 고요한 곳에 귀신이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귀신은 어깨를 껴안고 허리를 찌르면서 목덜미에 입김을 불어댔지만 승조는 죽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하여 깊은 선정을 증험하면서 9일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후에 선정에서 깨어나니 마음속 생각이 환히 밝아져 세간에는 전혀 즐거움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소림사(少林寺) 조사(祖師) 삼장을 찾아가 자신이 증험한 것을 말하자 발타가 이렇게 말하였다.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방에서 선학(禪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바로 그대다.”
그러면서 곧 심오한 요점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곧 숭악사(崇嶽寺)에 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그곳에는 승려들이 1백 명이나 있었지만 샘물은 겨우 그들을 충족시킬 정도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해진 옷을 입고 빗자루를 옆에다 낀 채로 섬돌 위에 앉아서 승려들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신인(神人)임을 모르고 꾸짖어 쫓아 보냈다. 여인이 노여운 기색을 띠면서 발로 샘물을 밟으니 샘물이 즉시에 말라버리고 여인도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승조에게 알리자 그가 “우바이(優婆夷)여” 하고 세 번 부르니 여인이 곧 나타났다.
승조가 그 신에게 말했다.
“여러 승려들이 도를 수행하니 마땅히 보살피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발로 본래의 샘물 자리를 헤집자 물이 즉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는데 그의 위엄 있는 감응이 이와 같았다.
그후 승조는 회주(懷州)의 서쪽에 있는 왕옥산(王屋山)으로 가서 이전에 전해 받은 선정의 법문을 닦고 익혔다. 들리는 소문에는 두 마리의 범이 서로 싸우면서 으르렁대는 메아리가 험한 산골을 뒤흔들었는데, 그가 곧 석장으로 그 사이에서 화해시키자 범이 각기 흩어졌다.
그 후 자리를 옮겨 청라산(靑羅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문둥병 환자들에게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는 마음속으로 썩은 냄새를 전혀 꺼리지 않고 냉이처럼 달게 여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피로하여 평상 앞으로 다리를 펴면 어떤 신이 문득 다리를 붙잡아서 다시 가부좌를 틀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선정에 들었는데 그때마다 매번 7일을 한 주기로 삼았다.
그 후 회주 마두산(馬頭山)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가 일찍부터 그의 높은 덕망을 전해 듣고 세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사양했다.
북위 효무제(孝武帝) 영희(永熙) 원년에도 그를 불렀지만 나오지 않자 다시 상서곡(尙書谷)에 선실(禪室)을 짓고 문도들을 모아 그를 공양하도록 하였다.
그 후 다시 북쪽 상산(常山)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정주(定州) 자사 누예(婁叡)와 팽성왕(彭城王) 고유(高攸) 등의 요청을 받고 우묵(又默)의 대명산(大冥山)으로 가서 처음으로 삼보에 귀의하는 계율을 가르치니 받들어 믿는 자들로 흥성거렸다.
나중에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2년에 칙명을 내려 간곡하게 뵙기를 청하자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그날로 옷을 털고 일어섰다. 그가 산 어귀를 나서려고 하는데 양쪽 산봉우리가 갑자기 놀란 듯 진동하였는데 그 메아리가 비통하고 애절하여 사람들과 짐승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날짐승들이 날아가고 들짐승들이 달아났다.
승조가 도성에 이르자 황제가 직접 수레를 타고 교외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승조의 나이는 70세가 지났지만 정신과 도량이 깨끗하고 폭이 넓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면서도 기회를 보아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다. 황제가 그를 부축하여 내전으로 들어가자 바른 진리를 논하여 주었다. 그는 삼계(三界)는 본래 공(空)이고 국토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며 영화로운 세간의 모습도 영원히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나서 4념처(念處)에 대한 법을 자세히 해설하였다.
황제는 이 법문을 듣고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땀을 흘리면서 곧 선정의 도를 받아들였다. 선정의 법을 널리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심오한 선정을 증험하였고 그 후로도 더욱 청정한 가르침을 받아서 독실하게 공경하고 정성껏 존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에게서 보살계를 받아 술을 끊고 고기음식을 금하였으며 매와 새매를 놓아주고 관가에서 하던 사냥과 고기잡이를 금지시켜 어진 나라를 튼튼히 이룩하였다.
또한 그는 온 나라에 도살행위를 금지시키고 백성들에게 칙명을 내려 한 달에 6일, 1년에 석 달 동안 재계(齋戒)하도록 하였으며, 관청의 장원이나 개인의 채소밭에서도 마늘이나 매운 것들은 모조리 없애게 했다.
황제는 훗날 승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는 사람에 의하여 넓혀진다는 것은 참으로 헛된 감응이 아닙니다. 스님은 안심하고 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제자가 감히 외호(外護)의 시주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승조가 대답하였다.
“보살의 큰 서원은 법을 보호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입니다. 폐하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세속을 따라야 하며 종주(宗主)가 되어 교화를 베풀고 삼보를 기둥삼아 4부의 백성들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평화로운 계기에 다다랐으니 더 의탁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중에 40여 일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밝은 가르침을 주자 황제는 그것을 받들면서 잊지 않았다. 그 후 불도의 교화를 산 속에서 펼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서 곧 사양하고 본래 머물러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계곡이 깊어 서로 안부를 묻고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보(天保) 3년에 칙명을 내려 업성의 서남쪽 80리 되는 곳에 자리 잡은 용산(龍山)의 양지바른 곳에 정사를 지어서 운문사(雲門寺)라고 이름을 짓고 승조를 청했 그곳에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겸하여 그를 석굴대사(石窟大寺)의 주지로 삼아 두 곳을 맡아보는 강위(綱位)로 임명하였는데 수련하는 사람들이 1천 명에 이르렀고 공양하는 일이 꼬리를 무니 모든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와 함께 나라 안의 모든 고을들에 칙명을 내려 선방을 따로 설치하여 염혜(念慧)를 통달한 사람이 그곳에서 선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으며 때로는 강론과 외우기를 크게 장려하게 하니 모든 일이 풍족하고 넉넉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황제는 모든 정을 쏟아 부어 불법에 귀의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아도 그와 짝을 이룰 만한 사람이 없었다. 부처님의 교화가 동방으로 흘러온 때로부터 이 시기에 와서 가장 번성하였다.
그러나 승조는 불법의 요지는 마음을 닦는 데 뜻을 두고 노력하는 것이며 재물과 이익으로 속세를 움직이는 것은 불도의 교화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편지를 보내 이것을 되돌려 보냈다. 황제는 그의 도량이 크다고 평가하고 칙명을 내려 앞에서 말한 것들을 거두어들이게 하면서도 다른 창고를 따로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물자를 공급하되 왕부(王府)의 승인을 거치지 않도록 하였다.
그 후에도 조서(詔書)와 직접 황제가 쓴 칙명이 달마다 빈번히 내려갔으며 한 자 한 치의 그와 관련된 사소한 문제라도 반드시 직접 언급하게 하였다. 또한 시어(侍禦) 서지재(徐之才)와 최사화(崔思和) 등에게 칙명을 내려 여러 가지 약을 보내서 병들어 고통 받는 승려들을 돌보게 하였으며 황제가 항시적으로 호위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일부러 행차하여 돌아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승조가 작은 방에서 좌선하면서 황제를 전혀 맞이하거나 바래다주지 않았다.
그는 북제(北齊) 건명(乾明) 원년 4월 13일 진시(辰時)에 조금도 앓거나 부대낌도 없이 단정히 앉아 있다가 산속 사원에서 생을 마쳤다. 향년 81세였고 법랍(法臘)은 50년이었다. 그가 생을 마치려고 할 때 기이한 향기가 사원에 가득 찼는데 이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이윽고 예정된 날자가 되자 칙명에 따라서 화장하였는데 사부대중들이 산에 가득차고 보통사람들도 수만 명에 달하였으며 향을 뿌린 땔감은 1천 묶음이나 되었다. 정오가 되었을 때 불을 지피자 애통해하며 기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통곡소리가 흐르는 시냇물처럼 메아리쳤다.
바로 이때 수백 마리의 백조(白鳥)들이 날아올라 연기 위를 맴돌면서 서로 애절하게 울다가 시간이 지나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사원의 서북쪽에 벽돌로 된 탑을 세웠는데 매번 신령스러운 광경이나 기이한 향기가 있을 때마다 도인들과 속인들에게 감응이 생겼다.
자료출처 : 《신승전(神僧傳)》, 《속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