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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21: 반경의 천도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구대(九代)에 걸친 혼란 속에서 양갑의 동생에게 왕위가 전해지니 바로 상조(商朝) 제19대 왕 반경(盤庚)이다.

여러 차례 어지러운 혼란이 지나간 후 상조의 도성은 이미 원래 황하 남부에서 황하 북부 엄(奄 지금의 산동성 곡부 일대)으로 옮겨갔다. 당시의 황하는 지금과 물길이 달라서 강소성 동부를 통해 바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엄은 황하 북쪽에 속했다.

반경이 처음 즉위했을 때 상왕조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죽서기년》에는 “반경 7년 응후(應候)가 조공하러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래 제후가 조공하러 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특별히 중시해서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당시 상 왕실의 ‘쇠퇴’를 반영하는 것이다.

반경은 엄읍에서 14년을 지낸 후 다시 천도하기로 결정했다.

성탕이 왕조를 세운 후 반경까지 이미 적어도 4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이번에는 어디로 천도했을까?

바로 상족 부락이 일찍이 머물렀던 성탕의 옛 도읍인 박으로 지금의 하남성에 속한다.

천도(遷都)가 의미하는 것은 또 다시 대규모 군사를 움직이고 군중을 동원해 강을 건널 배를 만들어야 하고 도성을 건설하고 종묘와 사직을 세워야 하며 궁궐을 새로 만드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또 도읍을 옮겨야 했을까?

왜냐하면 당시 거처하던 도읍에 홍수 피해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이미 9대에 걸친 혼란을 거치며 도덕수준이 전보다 훨씬 못해졌기 때문이다. 상족이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탕의 법령을 시행한다면 원래의 흥성을 부흥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반경이 점을 쳐서 하늘에 묻자 천제(天帝)의 긍정을 얻었다.

반경은 먼저 제후 대신들과 의견을 교류했다.

“옛날 고귀하고 명철하셨던 성탕께서 그대들의 선조와 함께 천하를 안정시켰는데 그 법은 다스릴 만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좋은 법을 버리고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치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하지만 반대 목소리가 아주 컸다. 이미 세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들에게 있어 천도란 가장 큰 장애였고, 또 이미 여러 차례 천도로 인해 더 이상 옮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반대를 선동했고 또 일부는 천도에 관한 일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렇게 되자 반경의 천도작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큰 난관에 부딪쳤다.

하지만, 반경은 뛰어난 연설가이자 또한 강인하고 확고한 의지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여러 번 반복해서 귀족들을 소집해 좋은 말로 권하면서 이익과 폐단으로 깨우치고 때로는 엄한 말로 경고하는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해 천도의지는 바꿀 수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반경은 이렇게 도성을 축성하고 강을 건널 배를 준비했고 온갖 고생을 겪으며 상족인들이 소나 양을 태우고 가산을 싣고 아이들을 데리고 엄에서 박으로 천도하려 했다.

이렇게 이주 작업이 마무리되자 성대한 경출활동을 거행해 왕궁과 종묘의 방위를 선정한 후 반경은 애초 자신을 반대했던 귀족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전에 우리 선왕이신 성탕(成湯)께서는 예전 사람을 뛰어넘은 큰 공로가 있으셨고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산간 지역으로 이주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의 재앙을 감소시켰고 우리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셨다. 지금 나의 신하와 백성들은 물난리로 떠돌며 고정적으로 거처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은 왜 내게 군사를 도원하고 백성들을 움직여 이주하는지 묻는가? 이는 상제(上帝)께서 우리 성탕의 미덕(美德)을 장차 부흥시켜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나는 간절하고 공경하게 하늘의 뜻을 따라 신하와 백성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도읍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이다. 때문에 나 젊은 사람이 감히 천도라는 원대한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제의 뜻이 사자를 통해 전달되어 내려왔으니 나는 감히 점복(占卜)의 결과를 어길 수 없으며 오직 하늘의 뜻을 크게 떨쳐 일으킬 뿐이다.”

상조 역사상 일찍이 태갑이 성탕의 묘가 있는 곳에 쫓겨나 삼년간 시묘살이를 산 적이 있다. 그러므로 반경의 이번 천도는 방대한 집단을 이끌고 두 번째로 이 일을 한 것이다.

반경이 천도한 효과에 대해 《사기・은본기》에서는 “그래서 황하 남쪽으로 건너가 박(亳)을 정돈하고 탕왕의 정사를 시행하니 백성들은 편안을 되찾았고 은 왕조의 도(道)가 다시 흥성해졌으며 제후들이 모두 조회하러 왔다. 이는 탕왕의 덕을 따랐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반경은 확실히 아주 정확한 결정을 했다. 성탕은 너그럽고 어질기로 유명한데다 성스런 조상의 신령이 옆에 있으니 적어도 내심의 선량을 지키기가 상대적으로 쉬웠고 왕족 내부의 분쟁도 종식되었다.

반경은 천도 후 14년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상조는 다시 한 번 흥성해졌다. 그의 정치에 대해서는 사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백성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수백 년 후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하고 성에 들어와 노인들에게 정사에 대한 의견을 묻자 당시 노인들이 “반경의 정치를 회복했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새롭게 이전한 도성을 은(殷)이라 불렀고 상조에서 가장 중요한 성읍이 되었다. 이후 상조는 무정(武丁)의 성세를 맞아 다시 번영한 후 점차 쇠락으로 나아갔고 나중에 주나라에 의해 대체되는데 12세(世) 약 3백년의 시간에 걸쳐 쇠퇴했다. 상조는 이 때문에 흔히 은조(殷朝) 또는 은상(殷商)이라고도 불린다.

반경이 천도한 의미는 실로 아주 중요한데 후세에도 여러 차례 작은 이동이 있었지만 모두 역사가들에 의해 외면되었다. 또 상조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조카 무정(武丁)이 나중에 ‘은나라의 도를 중흥’하는 기초를 다져주었다.

세계 문명 역사상 반경이 남긴 은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성의 위치를 확정지었다. 상조가 주조에 의해 멸망한 후 은성(殷城)은 버려졌고 서서히 지하에 매몰되었다. 그러다 1900년에야 다시 햇빛을 보게 되는데 더 이상 은성으로 불리지 못하고 은허(殷墟)가 되었다.

참고문헌:
1. 《상서정의》
2. 《죽서기년》
3. 《여씨춘추》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