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당나라 현장(玄奘)의 본래 이름은 위(褘)이고, 속성(俗姓)은 진씨(陳氏)이며, 한(漢)나라 때 태구(太丘) 벼슬을 한 중궁(仲弓)의 후손이다.
형 진소(陳素)가 먼저 출가했으니 바로 장첩(長捷) 법사다. 용모가 당당하고 거동과 국량이 아름답고 뛰어났으며, 불경의 뜻을 강의하여 수많은 스님들과 짝을 지어 동도(東都)의 정토사(淨土寺)에 머물렀다. 현장이 어릴 적에 몹시 심하게 앓았는데 데리고 다니며 구제하고, 날마다 정예한 이치를 전수하는 한편 교묘한 논리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현장은 이미 11살 때 『유마경』과 『법화경』을 외우니, 동도(東都)의 관례에 따라 도첩(度牒)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뚝 서서 곧고 바르게 처신하며 벗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었다. 입으로 외우고 눈으로 본 것은 조금도 막히거나 모자람이 없었다.
당시 낙양 혜일사(慧日寺)에서 큰 법회가 열렸는데, 『열반경』과 『섭론(攝論)』 등의 강의를 돌아가며 했다. 현장은 늘 그 강의를 듣고 받아들여 밤낮으로 사색했다. 많은 승려들이 그가 기쁜 마음으로 받드는 것을 기이하게 여겨 그의 기풍과 소양을 찬미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5세였으며, 형과 함께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고 있었다.
수나라 양제 대업(大業) 연간 말엽에 전쟁과 기근이 연속 들이닥쳐 법을 배우는 것과 먹고 살 일 등의 인연을 유지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이때 사문(沙門) 도기(道基)가 화주(化主)가 되어 정락(井絡: 민산瑉山의 북쪽을 말함)에서 문을 열었다는 말을 듣고 스님들이나 속인들이 흠모하며 우러러보았다. 이에 스님도 곧 형을 따라 장안(長安)에 가서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희망하던 것이 아니어서 다시 서쪽으로 검각(劍閣)을 넘어 촉도(蜀都:지금의 成都)에 도달했다. 곧 그곳에서 『아비담론(阿毘曇論)』의 강의를 들었는데, 한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아 옛사람[昔人]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말을 따르고 이치를 본받는 데서도 동년배들보다 뛰어났다. 그리하여 비바사(毘婆沙)의 광대한 이론과 『잡심론(雜心論)』의 현묘한 뜻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끝까지 바위구멍을 뚫고 근본과 파생된 것들을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論)이 동쪽 땅에서 크게 제창되고 매우 번성하게 되면서 문장의 초록[鈔]에 같거나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 수십 가지를 넘는 것으로 헤아려지지만, 모두 가슴속에 쌓아두고 듣고 간직함이 자연스러웠으며, 중요한 요지를 얻고 잃은 것에 이르기까지도 능히 인용함에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모두가 그의 기억력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드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基)는 늘 그를 돌아보며 “나는 젊은 시절 강원을 돌아다녀 보아도 아직까지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찬탄하였다.
법석에서 들은 청중들도 모두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그리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움을 귀결시켜 이익으로 이어지게 하니, 서로가 함께 칭찬하며 말을 퍼뜨려 명성을 전해갔다.
당고조 무덕(武德) 5년(622) 스물한 살이 되었는데, 스님은 모든 학부(學府)의 뛰어난 사문이 되어 『심론(心論)』을 강의했는데, 글을 보지 않고도 외우고 주석하는 데 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신인(神人)이라 불렀다.
그해 늦은 계절에 형과 함께 익주(益州)의 남쪽에 있는 공혜사(空慧寺)에 머무르면서 스스로 생각하였다.
‘학문은 많이 배운 것을 귀히 여기고 뜻은 막힘없이 통하는 것을 중시한다. 한쪽 방면만 뚫고 우러르는 것은 아직 깊은 이치를 성취하고 탐구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전국 각지의 유명한 승려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중에, 복야(僕射) 소우(蕭瑀)가 그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존경하여 나라에 진언해 장엄사(莊嚴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그가 뜻한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마음은 세상 밖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또 스스로 생각하였다.
‘만약 한평생을 가볍게 살지 않고 천명에 따른다면 맹세코 화서(華胥 원래 고대의 이상국가 여기서는 서역을 가리킴)로 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성언(成言)을 모두 볼 수 있어서 기묘한 해석에 통하겠는가. 한번 밝은 법의 환한 내용이 담긴 참된 글을 보고나서 그 요점을 가지고 동쪽 중국으로 돌아와 성인의 교화를 드높인다면, 선현 가운데 높고 뛰어난 분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미륵불에게서 의문을 해결하겠으며, 후진 가운데 날카로운 영재들도 어찌 『유가경(瑜伽經)』에서 생각을 그만두겠는가.’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드디어 홀연히 홀로 궁궐을 찾아가 표문을 올렸으나 해당 관청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도성에서 자취를 감추고 여러 변방 나라를 찾아 서역의 말과 글을 배웠다. 이 과정에 길을 가거나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것을 전수받으면 며칠 만에 곧 그 말과 글에 통하였으며, 자리를 틀고 앉아 서방을 향하여 그곳의 기틀과 기후조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때마침 정관 3년에 서리가 일찍 내려 흉년이 들게 되자 나라에서는 도인과 속인들에게 명을 내려 풍년든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나가게 하였다. 다행히 스님은 이 기회를 만나서 곧바로 고장(姑臧) 지방으로 갔다. 그리하여 점차 돈황(燉煌)에 이르렀다.
그 길로 식량보따리를 짊어지고 몸과 그림자가 서로 이끌고 좇고 하면서 앞을 바라보니, 멀고 아득하여 오직 끝없는 사막만이 보이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끊어져 없었다. 경향 없이 오직 운명에 맡기고 업보에 맡기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니, 마침내 고창(高昌)의 경계에 이르렀다.
고창의 왕 국문태(麴文泰)는 특히 불교를 믿는 사람이었는데, 다시 현장이 장차 서역으로 유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늘 역마(驛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장이 국경의 경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서서 기다렸다. 왕의 어머니와 왕비, 권속들은 횃불을 밝히고 궁전 앞에서 기다렸다. 그리하여 현장을 만나니, 현장은 그간의 고생과 자신의 의도를 말했다.
그러자 온 궁중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 희유한 일에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맞아들여 만류하였다. 그곳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보내게 하고 늘 청해서 강의를 열어 홍법하게 하였다.
또 왕은 명을 내려 현장을 아우로 삼고, 왕의 모후는 그를 아들로 삼았으며, 특별한 예우로 후한 공양을 때를 거르지 않고 항상 보내왔다. 이에 현장은 곧 그들을 위하여 『인왕경(仁王經)』 등과 여러 기교(機敎)를 강의하니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그리워하면서 오래도록 머물 것을 원하였다.
이에 현장이 말하였다.
“본래 큰 교화를 통해 멀리 나라에 은택을 입히려고 천한 목숨을 무릅쓰고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멀리 서쪽까지 달려왔는데, 만약 여러분의 말대로 오로지 이곳에서만 지체하게 되면 비단 자신이 스스로 발족한 뜻을 어기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모두가 법의 장애물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동안 식사하지 않으니, 모두가 그의 지극한 마음을 보고 다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의 모후가 현장에게 손수 향기로운 신물(信物)을 전해주면서 모자(母子)간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국씨(麴氏)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발을 잡고 이별하면서 전중시랑(殿中侍郞)에게 명하여 비단 5백 필과 책 24봉(封)을 주고 아울러 따라갈 기병 60명으로 하여금 스님을 호위하여 돌궐(突厥)의 엽호(葉護) 아소(牙所:哨所)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는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는 60여 개 나라가 모두 그들 부족이 거느리는 나라이므로 엄중한 호위를 파견하여 현장 스님의 앞길을 열어준 것이다.
현장은 고창에서 철문까지 모두 16나라를 경유했고 철문에서 천축국경까지 또 13개 나라를 거쳤다. 이들 나라들은 대부분 불법을 신봉했고 많은 불교 성적(聖蹟)들이 있었다.
현장이 대설산 속으로 7백여 리를 가서 범연국(梵衍國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바미안)에 이르니 불경을 배우는 승려들이 수천 명이 있었다. 왕성(王城)의 북쪽 산에는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50척이며 성 동쪽에 있는 와불(臥佛)의 길이는 천여 척에 달한다. 이 모두가 정사(精舍)와 겹쳐 접해 있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사람들의 눈을 찬란히 빛나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찬탄하게 한다.
또 이곳에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있는데, 겁초(劫初) 때 연각불(緣覺佛)의 치아의 길이는 다섯 치가량이었고, 금륜왕(金輪王)이 되었을 때의 치아 길이는 세 치가량 되었다.
여기서 다시 산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가필시국(迦畢試國)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불교를 받들고 믿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 6천 명의 스님이 있는데, 대승(大乘)을 배우는 사람이 많다. 그곳의 왕은 해마다 높이가 1장 8척이나 되는 은불상[銀像]을 만들고, 멀고 가까운 곳의 스님들을 초빙하여 널리 이름난 법단을 세운다.
이 나라에는 부처님이 보살로 나투었을 때의 치아가 있는데 길이가 한 치 남짓하고, 또 그때의 머리카락이 있는데 잡아당기면 길이가 한 자 남짓하나 놓으면 도로 소라껍질 모양으로 빙빙 감긴다.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7백 리를 가면 람파국(濫波國)에 이르는데, 인도의 북쪽 경계다. 인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천축(天竺)의 바른 이름이다. 내부에 70여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나가라갈국(那伽羅曷國)에 이른다. 이곳에 부처님의 정골사리(頂骨舍利)가 있는데 둘레가 한 자 두 치이다. 그 모습은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으로서 평평하고 형태는 천개(天蓋:지붕)와 같다. 부처님의 정골은 연꽃잎처럼 둥글었던 것 같고, 부처님의 눈동자는 맑고 청정하며 빛나던 것 같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대의(大衣)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빛깔은 황적색(黃赤色)이다. 부처님의 석장(錫杖)은 무쇠로 고리를 만들었고, 자줏빛 박달나무의 줄기로 되어 있다. 이 다섯 가지의 성인의 자취가 함께 한 성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굳게 지키는 일은 마치 국보를 지키듯 하고 있다.
이 성에서 북쪽으로 대월지국(大月支國)의 왕이 있었는데, 내세의 과보를 알고자 향으로 부처님의 정골에서 모습을 취했더니 곧 말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기에 여러 가지 보시를 더하여 공덕을 쌓고 참회하였다. 그리고 향으로 정골에서 모습을 취하니 사자 형상이 나타났다. 그는 비록 수렵 종족의 임금의 자리에 있었지만 끝내는 축생의 무리가 될 것임을 알고, 마음속으로 갑절이나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리고 보시와 계율을 더하여서야 마침내 사람과 하늘세상의 모습이 나타나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갔다.
현장은 왕의 명을 받고 관찰해보면서 빠짐없이 돌아보았는데, 이웃나라의 여러 스님들은 이와 같은 영예로운 명망을 듣고 함께 찾아와서 예배하고 현장을 만나보았다.
다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가면 건태라국(健馱邏國)에 이른다. 이곳에는 천여 개의 절이 있는데, 백성들은 모두 갖가지를 믿는 신자들이었다. 성안에는 본래 부처님의 발묘(鉢廟:부처님의 발우를 모신 祠廟)가 있는데, 여러 가지로 장엄되어 있다. 예전의 부처님께서 발우를 지니시고 이 사묘를 지나가신 일이 있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모시다가 지금은 페르시아의 왕궁으로 옮겨가서 공양하게 했다.
성 동쪽에 가이왕(迦貳王)의 대탑이 있는데, 그 기단의 둘레는 1리 반이며 부처님의 골사리(骨舍利) 한 섬이 그 속에 안치되어 있다. 높이는 5백여 척이나 되며, 아래위로 서로 수레바퀴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 25겹으로 되어 있다. 벼락을 맞아 세 차례나 화재를 입었는데 이번에 다시 건립하였으니,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작리부도(雀離浮圖)가 이것이다.
북위(北魏)의 영태후(靈太後) 호씨(胡氏)가 부처님을 받들고 믿는 마음이 깊어 사문 도생(道生) 등을 파견하면서 길이 7백여 척의 큰 깃발[幡]을 가져가게 하여 그곳에 걸어두게 하니, 깃발의 다리가 겨우 땅에 닿았다고 하는 것이 곧 이 탑이다.
현장이 임빈국(臨賓國)에 이르니 앞의 길이 험해서 호랑이나 표범도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다. 현장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방문을 잠그고 앉아 가부좌를 했다. 이튿날 아침 문을 열어보니 나이가 아주 많은 한 승려가 보였다. 머리며 얼굴이 온통 농창(膿瘡 고름이 나는 피부병)이 가득했고 몸에 고름과 피가 흘러내렸다. 노승을 방안으로 맞이해 직접 침대 위에 앉게 했다. 현장은 예를 올리며 노승께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노승이 《심경(心經)》 한권을 입으로 전수해주고 현장에게 외우게 했다. 현장이 다 외우자 갑자기 산과 하천이 평평하게 변하고 길이 열리더니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졌고 마귀도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북쪽 산길을 따라가면 오장나국(烏長那國)에 도달했는데 이곳에는 1만여 명의 승려들이 대승불교를 배웠다. 왕성 주변에 많은 고적들이 있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 넓은 평야에 위치한 책가국(磔迦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문도와 동반자 20여 명이 큰 숲속을 지나다 도적을 만나 강탈당했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 그리하여 마을에 들어가서 사정을 호소하고 구걸하여 동쪽 경내에 도달하였다.
그곳 큰 수림 속에 한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나이가 7백 세이지만 얼굴 모습은 30세의 청년과 같았다. 그는 『중론(中論)』, 『백론(百論)』과 외도의 책에 밝았으며, 용맹(龍猛)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는 그곳에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이를 배웠다. 또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서 네 나라를 지나게 되는데, 현장은 긍가하 기슭을 따라가다가 문득 살인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하늘에 제물로 올릴 사람이 필요하였다. 함께 배에 탄 80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두 이들에게 잡혀 결박당하였는데, 오직 현장만을 뽑았으니 천신(天神)의 제물로 충당할 만하기 때문이었다.
강가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단가운데 현장을 들어다 놓았다. 처음에는 산 채로 제사를 지내더니 곧 가마솥에 끓이려고 하였다. 이 시각에 구원의 길을 찾아도 아무런 방도도 없게 되자, 생각을 자비하신 미륵불께 집중하면서 기도했다.
“남아 있는 운수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풀려나게 될 것이고, 반드시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한다면 운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럼 제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이때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이 일시에 슬피 울며 통곡하였는데, 문득 사나운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나면서 도적의 배는 뒤집혀 가라앉고 모래가 날아오고 나무가 부러지니 모두 공포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도적에게 말하였다.
“이 스님은 가엾은 분이다. 위험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불법을 위하고 변방의 구석진 곳을 이익 되게 하는데, 당신이 만약 그를 죽인다면 그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차라리 우리들을 죽일지언정 그에게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여러 도적들은 이 말을 듣고 칼을 집어던지고 절을 하며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는 계율을 받고 잘못을 참회하고는 놓아주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였다.
인도 중부 마갈타국(摩揭陀國)에 가야산이란 명산이 있다. 예전부터 이 산은 여러 임금이 올라가 즉위식을 거행하던 곳인 까닭에 세상에서는 이름난 곳이다. 이 산에 대보리사(大菩提寺)가 있는데 사자국(師子國) 왕이 돈을 대서 건립한 절이다. 스님은 약 천 명 정도 있다.
이곳에는 골사리(骨舍利)와 육사리(肉舍利)가 있는데, 골사리의 모습은 사람의 손가락마디와 같고, 육사리의 크기는 진주의 크기와 같다.
그곳의 12월 30일은 중국의 1월 15일에 해당되는데, 세간에서는 ‘대신변월(大神變月)’이라고 한다. 이날이 되면 저녁에 반드시 상서로움이 어린 광명이 뻗어나고 하늘에서 향기로운 꽃잎이 비 오듯 내려와 나무와 절을 가득 채운다.
현장이 처음 이곳에 도착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여 기절하였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나서 신령스러운 모습을 두루 보았다. 예전에는 경에서 설명한 말만 듣다가 그것이 지금 눈앞에 완연하니, 자신이 변방에 살고 있는 것이 한탄스럽고, 말세에 태어나서 진정한 부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다시 또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기절하였다. 옆에 있던 인도 스님은 땅에 앉아 그를 어루만지면서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였다. 비록 예의를 갖추어 부처님을 배알하였지만 상서로움이 어린 광명이 뻗어 나오지 않는 것이 한스러웠다.
현장은 이곳에 머물러 안거(安居)하였는데 해제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곳의 일반적인 법식은 이때가 되면 도인이든 속인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7일간 주야로 앞을 다투어 공양을 드리는 것인데 거기에는 보통 두 가지 희망이 있으니, 말하자면 광명이 뻗어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보리수의 잎을 구하는 것이다. 보리수 잎은 매년 하안거가 끝나는 날이 되어야 비로소 한꺼번에 날아 떨어지는데, 밤새도록 새로운 나뭇잎이 돋아나 아침이 되면 이전과 같아진다.
당시 이곳에 대승을 신봉하는 거사(居士)가 있어서 현장을 위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해설해 주었다. 그날 밤 마주하여 강론하는데 갑자기 등불이 꺼지고 또 차고 있던 진주와 영락도 광채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온 세상이 밝아오면서 안팎이 환하게 내다보이는데,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이 하도 이상하여 함께 초막집을 나서서 보리수를 바라보니, 한 스님이 사람의 손가락크기만한 사리를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나무 기단 위에서 두루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거기서 뻗어 나오는 광명이 하늘과 땅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현장은 이렇게 인도 내에서 몇십개 나라를 거친 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나란타사(那爛陀寺)에 도착한다. 중국말로는 시무염(施無厭)이다. 인도내 사찰 가운데 가장 크고 높으며 다섯 임금이 함께 조성한 절이라 공급하는 물자도 갑절로 융숭했다. 그런 까닭에 시무염이라 한 것이다.
이 사찰의 주지는 정법장(正法藏)으로 불리는 계현 논사(戒賢論師)였다. 그의 나이는 당시 106세였으며, 견문이 넓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내전(內典)과 외전(外典), 대승과 소승 등 모든 경서(經書)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현장이 예를 올리자 계현이 앉게 하고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현장이 대답했다.
“지나(支那 중국)에서 왔으며 『유가사지론[瑜伽]』 등의 논을 배워 정법을 닦고자 합니다.”
계현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제자 각현(覺賢)을 불러 자기의 옛일을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각현이 말했다.
“스님께서 3년 전 칼로 찌르는 듯한 심한 병고를 치르실 때, 식음을 전폐하고 열반에 드시려고 하였는데, 꿈에 금빛을 띤 사람이 나타나 ‘너는 너의 몸을 싫어하지 말라. 너는 지난날 임금이 되어 중생들의 목숨을 많이 해쳤다. 그러므로 마땅히 스스로 가책을 느껴 참회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가. 중국의 한 스님이 여기에 와서 배우고 물을 것인데, 그는 이미 오는 도중에 있다. 3년 후면 아마도 이곳에 이르게 될 것이니, 법을 그에게 베풀라. 그가 다시 그 법을 세상에 유통시킨다면 너의 죄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나는 만수실리(曼殊室利)이다. 그 때문에 와서 권고한다’고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지금 지치셨다.”
이때 정법장(正法藏)이 물었다.
“길을 떠난 지가 얼마나 되었소?”
현장이 말하였다.
“집을 나선 지 3년입니다.”
꿈과 사실이 일치하자 슬픔과 기쁨에 교차하였다. 그래서 절을 하며 사례하고는 물러났다.
절에서는 본래 법을 세워 삼장(三藏)에 통달한 사람 열 명을 모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명이 결원되었는데, 현장을 곧 그 자리에 거처하게 하여 매일 최상의 반찬 스무 쟁반을 공급하고, 대인미(大人米) 한 말과 계수나무 열매, 두구(豆蔲)와 용뇌(龍腦), 향유(香乳), 소밀(蘇蜜) 등을 공급하고, 정인(淨人) 네 사람과 큰 말 한 필과 일행이 탈 코끼리 가마와 서른 사람의 시종이 따르도록 하였다.
현장은 곧 계현 논사에게 『유가사지론[瑜伽論]』을 강의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듣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열다섯 달 만에야 한 번의 강의를 비로소 마칠 수 있었다. 거듭 요청하여 다시 강의를 할 때에는 아홉 달 만에야 끝마쳤다. 그밖에 『순정리론[順理]』ㆍ『현양론[顯揚]』ㆍ『아비달마구사론[對法]』 등에 대해서도 모두 물어보고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사지론』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파고들며 우러러보는 대상으로 삼아서 5년이 지나도록 아침저녁으로 멈추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창 널리 논의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차마 동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계현(戒賢)이 훈계하였다.
“나는 늙었다. 그대는 목숨을 바쳐 불법을 구한 지 10년이 경과하였고, 오늘까지도 이 노쇠한 늙은이도 마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불법을 펴서 밝히려고 하고 있다. 법이란 유통을 귀중히 여기는 것인데, 어찌 홀로 자기만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며 다시 다른 경부에 참문하려고 하는가. 자칫하면 때와 인연을 잃게 될까 두렵다. 지혜는 끝이 없는 것이어서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란 이슬과도 같아,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는 죽게 되는 것이니 즉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리고는 문득 현장을 위하여 행장을 마련해주고, 경(經)과 논(論)을 넘겨주었다. 이에 현장이 말하였다.
“감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때 현장의 생각에는 남쪽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돌아가는 길을 북쪽으로 잡으려고 하였으니, 고창(高昌)에서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중에 발벌다국(鉢伐多國)에 이름난 스님이 몇 분 계셨는데, 학문과 업적이 뛰어났다. 다시 여기서 2년 동안 머물면서 정량부(正量部)의 『근본론(根本論)』ㆍ『섭정법론(攝正法論)』ㆍ『성실론(成實論)』 등을 배우고 곧 동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나란타사(那爛陀寺)로 되돌아와 계현(戒賢) 스님을 만나보고 나서, 장림산(杖林山)의 거사 숭곤 논사(勝軍論師)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는 찰리종(刹利種:무사계급)으로서 내ㆍ외의 경전과 5명(明)과 수술(數術)에 통달했다.
현장은 그에게서 『유식결택론(唯識決擇論)』ㆍ『의의론(意義論)』ㆍ『성무외론(成無畏論)』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2년에 걸쳐 배웠다.
어느 날 밤, 꿈에 절의 안팎에 있는 숲과 고을이 불에 타서 재가 되었는데, 한 금빛을 띤 사람이 나타나 알려주었다.
“지금부터 10년 후면 계일왕(戒日王)이 무너지고 인도는 곧 어지러워져 반드시 불타서 사라진 나라처럼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승군(勝軍)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현장은 마음속으로 급히 결정하고는 준비를 잘 갖추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영휘(永徽) 말년에 과연 계일왕이 무너졌고 지금은 모두 굶주리고 황폐화되었으니, 꿈에서 들은 이야기와 꼭 같았다.
당나라 태종 정관 19년 현장이 장안에 돌아오자 수십만 명의 인파가 서울에 몰려 그를 환영했다. 이때 태종은 낙양(洛陽)으로 행차하였으므로 현장은 곧 모든 경전과 불상을 모시고 있다가 홍복사(弘福寺)로 보냈다. 이때 수도의 대중 스님들은 앞을 다투어 깃발과 장막을 줄지어 내걸고 운반을 도와 장엄하였고, 사부대중이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보다 더욱 분주하였다.
이때에 와서 다시 상서로운 기운이 감응되었으니 해의 북쪽에 일산과 같은 둥근 모습이 나타났는데, 분홍빛과 흰빛이 서로 비추면서 불상 위에 이르러 뚜렷하게 둥근 수레바퀴 모양의 광명으로 뻗어났으니, 이는 이미 해의 주위를 맴도는 구름이 아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우러러보았는데, 오시(午時)부터 해질 때까지 불상이 홍복사에 안치된 후에야 비로소 광명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5일 동안 4민(民:士ㆍ農ㆍ工ㆍ商)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7부대중은 귀의하여 법을 받게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마음을 기울여 높이 우러러본 일은 예전부터 그 예가 거의 없는 일이었다.
현장은 비록 영예로운 접대는 받았지만 홀로 객관(客觀)을 지키면서 맑고 한적한 곳에 눌러앉아 혹 세간의 물의에 빠져들까 두려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황제를 찾지 않다가 낙양 땅에 이르게 되자 각별한 은택을 입게 되어 여러 나라의 기이한 물건들을 말에 싣고 가서 헌납하였다. 이때 황제는 특별 명으로 심궁(深宮)의 내전에 불러들여 얼굴을 마주하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황제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없어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후 태종이 성지를 내려 현장을 옥화사에 머물게 하면서 경전을 번역하게 했다. 현장은 살아 생전에 모두 73부의 경전 1330권을 번역했다.
현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내생(來生)에 미륵불이 있는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는데, 서역 땅에 머무를 때 무착(無著) 스님 형제가 모두 미륵세계에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다시 기원을 드렸더니 뚜렷한 증험이 있었다. 이 사실을 가슴에 품고 오로지 더욱 열심히 기원하다가 훗날 옥화산(玉華山)에 이르러서는 틈만 있으면 발원하여 도사다천(覩史多天)에 태어나 미륵불을 만나보기를 원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반야경』의 번역을 마친 후부터는 오직 자신을 채찍질하여 도를 닦고 예참(禮懺)하는 데 힘썼다.
인덕(麟德) 원년(664)에 경을 번역한 스님과 문인들에게 말하였다.
“유위법은 반드시 마모되고 소멸되고 만다. 거품이나 허깨비 같은 물건이 어찌 오래 세상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나이는 65세이다. 반드시 이 옥화산에서 세상을 마칠 것이니, 경론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빨리 물어보는 것이 좋으리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며 말하였다.
“아직 나이가 70세나 80세도 안 되었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현장은 대답하였다.
“이 일은 내 스스로가 아는 것이다.”
그런 다음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사이에 큰 연꽃이 선명한 흰 빛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또한 위대한 부처님의 모습이 보여서 그가 부처님 앞에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스님들에게 그가 번역한 경론의 목록을 읽게 하였더니, 모두 73부 1,330권이나 되었다. 스스로 기쁜 생각이 들었고 문하의 사람들을 모두 소집하니, 인연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모였다. 이에 그들에게 말하였다.
“죽음이 곧 도달하게 된다. 곧 서로 만나리라.”
가수전(嘉壽殿)에서 향나무로 된 보리상골(菩提像骨)을 들고 절의 스님과 문하의 사람들을 향해 이별의 말을 하고, 아울러 표문을 남긴 뒤에 곧 말없이 미륵불을 생각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시켜 염불을 외우게 하였다.
“나무미륵여래(南無彌勒如來)ㆍ응(應)ㆍ정등각(正等覺)이시여, 원컨대 모든 중생과 더불어 속히 자비하신 얼굴을 받들게 하여 주소서. 나무미륵여래이시여, 원컨대 목숨을 마치거든 반드시 부처님의 그늘에 태어나게 하여 주소서.”
2월 4일이 되자 오른편 겨드랑이를 방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왼손을 허벅다리 위에 놓고 굳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무슨 모습입니까?”
대답하였다.
“묻지 말라. 나의 정념(正念)에 방해가 된다.”
5일 밤중에 제자가 여쭈었다.
“화상께서는 정녕 미륵불 앞에 태어나시게 됩니까?”
“정녕 태어날 것이다.”
말씀을 마치자 운명하였는데 그때부터 그 달이 지났으나 그 모습은 평상시와 같았다. 이밖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응이 있었으나 그것은 생략하고 적지 않는다.
황제는 명을 내려 장사지내는 날에 도성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깃발과 상여 덮개를 덮어 가는 길을 송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흰 일산과 흰 깃발이 공중에 떠 구름을 이루고, 애절한 피리소리와 범패소리의 기운이 사람의 정신을 막히게 하였으며, 사방의 세속 사람들도 이 일로 슬퍼하였고 칠부대중(七部大衆)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록원(白鹿原)에 묻혔는데, 근방 40리를 스님과 속인들로 가득 메웠다.
처음에 현장이 서역에 갈 때 영암사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현장이 손으로 그 가지를 어루만지며 “나는 부처님을 가르침을 구하러 서역에 가니 너는 서쪽으로 자라고 만약 내가 동쪽으로 돌아오면 동쪽으로 돌아와 제자들이 알게 하여라.”
현장이 서쪽으로 떠나자 그 가지가 매년 서쪽으로 조금씩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해 갑자기 동쪽으로 방향이 변했다. 때문에 현장의 제자들은 “사부님께서 돌아오신다”라고 말했다. 이에 서쪽으로 가서 현장을 맞이하러 가니 과연 그랬다. 지금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마정송(摩頂松)이라 부른다.
자료출처: 《신승전》, 《속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