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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도선(道宣)

글/ 목목(木木)

【정견망】

석도선(釋道宣)은 원래 성이 전(錢)씨로 단도(丹徒 지금의 강소 진강鎮江 부근) 사람이다.

모친이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또 천축 승려가 꿈에 나타나서는 “당신이 임신한 분은 양조(梁朝)의 승조(僧釣)법사입니다. 승조는 또 남제(南齊) 섬계(剡溪) 은악사(隱嶽寺)의 승호(僧護)가 전생한 것입니다. 당신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출가해서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겁니다.”라고 말했다.

도선은 어릴 때부터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수행에 전념했다. 나중에 보배함에 사리가 나타난 것을 느끼고 종남산(終南山 남산)에 은거해 수행했다. 그가 수행한 장소는 신인(神人)이 알려준 것이다. 그가 이곳에 온 후 한 자 넘게 땅을 파자 샘물이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백천사(白泉寺)라 칭했다. 또 주위의 맹수들도 잘 길들여졌고, 각종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어났으며 기이한 풀들이 많았다.

수조(隋朝) 말년 도선은 풍덕사(豐德寺)에 와서 수행했다. 혼자 가부좌를 할 때 호법신(護法神)이 나타나 그에게 알려주었다.

“저 청관촌(清官村)이란 곳은 원래 정업사(淨業寺)가 있던 곳으로 보배로운 장소입니다. 그곳에 가서 수행하시면 도를 연마하고 이룰 수 있습니다.”

도선이 이에 공덕향(功德香)을 사르고 반야주정(般若舟定)을 행했다. 나중에 또 제자들을 이끌고 그곳에 가서 사찰을 세웠다.

당시 주위 깊은 못 속에 뭇용(群龍)들이 있었는데 사람 몸으로 변해 찾아와서는 예를 올렸다. 무리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몇몇 어린 사미(沙彌)들이 참지 못하고 마음이 크게 어지러워져 여자들을 곁눈질했다. 그러자 용이 크게 화를 내며 사미를 죽이려 했다. 나중에 생각을 바꿔 몹시 후회하면서 마당 안에 있던 우물가에 가서 입안의 물을 토해냈다. 마치 방금의 죄업을 토해내 깨끗이 한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용은 이 사정을 도선에게 말하고 떠났다.

도선은 곧 명령을 내려 우물을 봉폐시켰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우물가에 누구도 보지 못했던 꽃이 피어났는데 모양이 마치 대추 꽃 같았고 크기는 느릅나무 열매와 비슷했지만 향이 아주 진했으며 몇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다.

또 그 누구도 이름을 모르는 기이한 열매가 하나 있었는데 색택이 아주 깨끗해서 인간 세상에는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꽃과 열매가 모두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됨을 발견했다. 원래 도선의 덕행이 이미 뭇용들을 감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당 태종 정관(貞觀) 시기 도선은 운실산(雲室山)에 은거했다. 어떤 사람이 천동(天童 하늘 동자)이 좌우에서 시중 드는 것을 목도했다. 한번은 도선이 밤에 길을 가는데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는데 어떤 사람이 부축해주었다.

좌우를 둘러보니 한 소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선이 놀라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밤에 이곳에 있는가 묻자 소년이 대답했다.

“저는 속인이 아니라 비사문천왕의 아들인 나타(那吒)라고 합니다. 법을 수호하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당신을 보호하고 있으며 이미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도선이 말했다.

“빈도(貧道)의 수행 때문에 태자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위신(威神)이 자재하시니 서역에 혹 불사(佛事)가 있으면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나타 태자가 말했다.

“제가 부처님 사리와 보장(寶掌)을 지닌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머리라도 버릴 수 있는데 어찌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도선에게 주었다. 이에 도선이 이를 보존해 공양했다.

정관 19년(645년) 경전을 얻기 위해 천축에 갔던 현장(玄奘)이 돌아오자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이 칙령을 받들어 경전 번역에 참여할 인재를 선발했다. 도선도 철문(綴文 역주: 중국어로 번역된 경문을 다듬는 작업)을 맡은 9인 중 하나로 선발되었다.

고종 영휘 3년(657년)에는 조서를 받들어 서명사(西明寺)에서 머물며 현장의 역경작업을 보좌했다. 또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 번역에서는 증의(證義 역주: 중국어로 번역된 경문이 원래 뜻과 차이가 있는지 검토하는 것)를 맡았다.

그는 고조 무덕(武德) 7년(624년) 이래 늘 종남산 백천사에 머물며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 《사분율습비니의초(四分律拾毗尼義鈔)》, 《사분율산보수기갈마(四分律刪補隨機羯磨)》 및 《소(疏)》, 《사분율비구함주계본(四分律比丘含注戒本)》 및 《소》, 《양처경중의(量處輕重儀)》, 《비구니초(比丘尼鈔)》 등을 만들어 율종(律宗) 남산종(南山宗)을 개창했다.

고종 건봉(乾封) 2년 봄 도선은 천인(天人)이 와서 자신과 율학(律學)에 대해 담론하는 것을 느꼈는데, 경전 번역 중의 잘못은 모두 번역 과정의 실수라고 알려주면서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도선은 나중에 여러 저술을 다시 수정했고 또 《석문장복의(釋門章服儀)》, 《석문귀경의(釋門歸敬儀)》, 《관중창립계단경(關中創立戒壇圖經)》,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 《석문정행참회의(釋門正行懺悔儀)》, 《교계신학비구행호율의(教誡新學比丘行護律儀)》, 《정심계관법(淨心誡觀法)》 및 《속고승전(續高僧傳)》, 《석가방지(釋迦方志)》, 《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광홍명집(廣弘明集)》 등을 저술했다.

고종 건봉 2년 10월 3일 원적했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