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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석지장(釋地藏) — 김교각

목목(木木)

【정견망】

석지장(釋地藏)은 속성이 김(金) 씨로 신라의 왕자다. 비록 외모는 추했지만 마음이 자비롭고 선량했으며(慈善) 천성적으로 총명했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후 바다를 건너 도보로 지양(池陽 역주: 지금의 섬서성 경양현과 삼양현 일대)에 와서 구화산(九華山)을 보고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이에 직접 그 봉우리에 올라가 이곳을 수련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동애봉(東崖峰)에 있는 바위굴에 머물며 청빈하고 고생스럽게 살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굴승려(洞僧)라 불렀다. 그의 두 외삼촌이 구화산을 찾아와 그에게 귀국할 것을 권유하려다 오히려 그의 고생스런 수행에 큰 감동을 받아 오히려 이곳에 머물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그가 김(金) 씨인 것만 알았다. 후인들이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마침내 김교각[金喬覺 원주: 교란 높고 크다는 의미이고 각이란 깨달음이니 대지(大知)대각자(大覺者)란 의미]이란 덕호(德號)를 주었고 법호(法號)를 석지장이라 불렀다.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수행하던 때 처음으로 이곳에 연꽃을 심었다. 연꽃은 이곳 구화산에서부터 피기 시작했고 이는 마치 불법(佛法)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발전할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당 현종 천보(天寶) 기간에 이백(李白)이 이 산에 놀러와서는 구화산이라 불렀다.

한번은 지장이 가부좌할 때 일찍이 독한 벌에 쏘인 적이 있었는데 미동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또 한 아름다운 부인이 지장 앞에 나타나 예를 올리며 음식과 해독약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무지해서 한 짓이니 원컨대 용천(湧泉)을 제공해 잘못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다. 주위에 곧 샘물이 하나 나타났다. 원래 구화산 산신(山神)이 현신(現身)한 것이다.

당나라 숙종 지덕(至德) 연간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촌민들을 이끌고 산자락 아래에서 올라오다가 높은 곳에 이르니 이미 사람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오직 지장만이 홀로 눈을 감고 석실 안에서 가부좌하는 것을 보았다. 석실 안에는 다리가 부러진 정(鼎)이 있었는데 정 안에 관음토(觀音土 백토)가 섞인 남은 밥이 있었다.

이들은 놀라서 말했다.

“이 스님이 이렇게 고행하는 것은 우리 산 아래 백성들의 잘못이 아닌가!”

이에 촌민들이 지장을 위해 공동으로 큰 절을 하나 지어주었다.

신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앞 다퉈 바다를 건너와 지장을 찾아왔는데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이들을 공양할 방법이 없자 지장은 곧 돌을 부숴 흙으로 국수를 만들었는데 그 색이 맑았다. 이것으로 여러 사람을 먹였다.

어느 날 지장이 갑자기 여러 사람들을 부르더니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9년 음력 7월 20일 밤 결가부좌를 틀고 열반에 들어가 정과(正果)를 성취했음을 증명했다. 향년 99세였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의 시신을 항아리 안에 모셔두었다. 3년 후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니 그 몸이 여전히 부드러웠고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으며 관절이 마치 금속 자물쇠를 흔드는 것 같았다.

생전과 사후의 각종 상서로운 조짐이 마치 불경에 기재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같았기 때문에 그는 인도 지장보살의 신령한 자취가 응화된 ‘중국(中國) 지장왕(地藏王)’이 되었다. 승려들이 3단의 작은 부도를 만들어 공양하고 이를 통해 김지장 보살과위를 입증했다.

구화산은 지장보살의 도량이 되었다. 민간에서는 김교각이 세상을 떠나던 날을 지장보살의 생일로 삼아 매년 성대한 기념활동을 펼친다. 지장보살이 중생을 널리 제도했기 때문에 “원근(遠近)에서 향을 올리러 오는 사람이 하루 천 명에 달했다.”

구화산은 이후 향불이 아주 흥성해졌다.

송나라 승려 찬녕(贊寧)이 988년에 펴낸 《송고승전(宋高僧傳)》 ‘감통편(感通編)’ 〈당지주구화산화성사지장전(唐池州九華山化城寺地藏傳)〉에서 지장에 관해 “성은 김씨이고, 신라 국왕의 혈족(姓金氏 新羅國王之支屬也)”이라며, 그의 속성이 김씨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아울러 그는 지장이 803년(정원 19년)에 9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명나라 때인 16세기에 편찬된 《구화산지(九華山志)》에는 김지장에 관해 “본래 이름은 교각이며, 신라 왕자 김씨의 혈족(本名喬覺新羅王子金氏丁屬)”이라며, 지장의 속명이 ‘교각’이라고 기록했다.

그 뒤 청나라 때인 19세기 초에 의윤(儀潤)은 《백장청규증의기(百丈清規證義記)》에서 《신승전(神僧傳)》을 인용해서 지장에 관해 석가모니가 입적한 지 1500년 뒤에 신라의 왕가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리고 “성은 김이고, 이름은 교각(姓金號喬覺)”이며, 653년(영휘 4) 24세의 나이로 머리를 자르고 선청(善聽)이라는 흰 개와 함께 바다를 건너왔으며, 지주부(池州府) 동쪽 청양현(青陽縣) 구화산에 이르러 75년을 수행하여 728년(개원 16)에 99세의 나이로 입적했다고 적었다.

이처럼 지장에 관한 이야기들은 당·송 시대부터 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록들을 거치면서 덧붙여지고 변화해왔다. 따라서 그가 원래 ‘신라의 왕자’였다거나 본명이 ‘교각’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설화가 구전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내용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 지장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를 공간적으로 서쪽 천축국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와 마주 선 위치에 있는 동쪽 신라국의 왕자로 태어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우뚝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교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지장보살에 관해서는 민간에 많은 흥미로운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을 믿지 않던 한 장원(壯元)이 구화산에 놀러왔다. 그는 향을 사르지도 않고 예불도 하지 않았으며 김교각의 등신불을 모신 육신보전(肉身寶殿)을 지나다 미리 준비한 철 침을 꺼내 유해의 대퇴부를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진짜 몸인지 가짜 몸인지 보려 한다.”

그러자 뜻밖에도 김지장이 찔린 허벅지에서 진홍색 핏방울이 맺혔다. 장원랑은 이를 보고도 무심하게 다시 경치를 감상하다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떠났다. 한편 호법(護法)하던 위타(韋陀)가 외출해 산을 순시하고 대전에 돌아온 후에야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몹시 화를 내며 장원랑을 죽이려 했다.

김지장이 극력 저지하며 자신과 장원량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원래 김지장이 살아 생전에 실수로 이를 다치게 한 적이 있다. 장원이 바로 이 이가 전세한 것이다. 하지만 위타가 집요하게 처벌을 요구하자 김지장도 어쩔 수 없이 오계교까지만 징벌을 허락하고 오계교를 지나갔으면 뒤쫓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장원이 이미 오계교를 건넜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타가 분노한 나머지 다리를 건너 추격해 장원을 때려죽였다. 김지장은 이에 위타를 구화산에처 쫓아냈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