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목(木木)
【정견망】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서역인으로 원래 성은 하(何)씨다. 당나라 고종 용삭(龍朔) 연간에 처음 중원에 와서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서 수행했다. 이때부터 각종 신기한 일을 드러났다.
그가 처음으로 제자 혜엄(慧儼)을 데리고 사주(泗洲) 임회현(臨淮縣 지금의 강소성 사홍현)에 왔을 때 땅을 얻어 사찰을 지었다. 땅 밑에서 뜻밖에도 《고향적사(古香積寺)》란 명문기록 금으로 된 조각상 하나를 발굴했다. 그 위에는 보조왕불(普照王佛)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신기하게 여기며 감탄했고 이에 앞을 다투어 보시했다.
승가는 일찍이 하발씨(賀跋氏)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그가 잠에 들었을 때 몸이 문득 커지더니 침대와 함께 각각 3자 이상 길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 나중에 또 11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발씨의 가족들이 모두 기뻐하며 더욱 불법을 믿었고 마침내 집 안에 사찰을 세웠다.
당초 승가가 운유(雲遊)하다가 가화(嘉禾) 영광사(靈光寺)에 이른 적이 있다. 이곳은 물의 고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승가가 간절히 타이르며 살생은 사람을 추락시킨다고 알려주면서 마땅히 다른 생계 방식을 찾으라고 권고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낚시와 그물을 부수고 어업을 포기했다.
나중에 승가가 또 진릉(晉陵)에 이르러 국상사(國祥寺)가 이미 황폐해진 것을 보고는 옷을 전각 대들보 위에 걸어놓고 떠났다. 후인들이 기이한 향이 진하게 나는 것을 느꼈다.
승가가 장안에 있을 때 당시 부마도위였던 무유기(武攸暨)가 병이 들어 그를 불러 병을 봐달라고 청했다. 승가가 가서 목욕한 물을 마시게 하니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해 명성이 크게 떨쳤다. 나중에 환자들이 승가에게 병 치료를 청하면 혹은 버드나무 가지로 두드리거나 또는 돌사자를 씻기게 하거나 또는 물병을 던지거나 또는 사죄하게 했는데 모두들 치유되었다. 그가 발을 씻은 물을 사람들이 가져다 마시면 완고한 질병도 다 치유되었다.
승가는 또 큰 눈이 올 것을 미리 알거나 또는 가뭄을 해갈할 비가 내릴 것을 미리 알았으며 신통하기 그지없었고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당나라 경룡(景龍) 2년 중종(中宗)이 사람을 파견해 궁내 도량에 그를 모시고 국사(國師)로 존중하며 천복사(薦福寺)에 거주하게 했다. 당시 승가가 머문 방 지붕에 작은 구멍이 있어 늘 솜으로 막았다. 밤이 되어 만약 솜을 내리면 향기가 구멍에서 아래로 퍼져 내려왔는데 기이하고 진한 향이 났다. 아침이 되면 향기가 다시 지붕으로 돌아갔고 또 솜으로 막았다.
어느 날 중종이 내전에서 승가에게 말했다.
“경읍(京邑)에 비가 오지 않은지 수개월이 되었으니 법사께서 자비로 제 근심을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
승가가 마침내 물 한 병을 사방에 뿌리자 잠시 후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단비가 흡족하게 내렸다. 중종이 몹시 기뻐하며 조서를 내려 전에 그가 머물던 사찰의 이름을 임회사(臨淮寺)라 부르게 했다. 하지만 승가가 보조왕사(普照王寺)란 이름을 요청하자 중종이 조(照)가 모후인 측천무후의 이름과 겹쳤기 때문에 이를 피해 보광왕사(普光王寺)로 개칭하고 직접 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중종 4년 3월 2일 승가가 천복사에서 원적했다. 중종은 곧 천복사에 탑을 만들고 유체에 옻칠을 해서 공양했다. 당시에 큰 바람이 불더니 온 세상에 냄새가 가득했다.
중종이 대신들에게 그 원인을 묻자 한 근신(近臣)이 아뢰었다.
“승가대사가 임회(臨淮)에서 탁발했는데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우려해 이런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중종이 묵묵히 승가의 유체를 임회사로 보내도록 허락하니 냄새가 곧장 사라졌고 아울러 기이한 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이해 5월 승가의 유체를 임회사로 보내 공양하게 했다.
나중에 중종이 만회(萬回) 스님에게 물었다.
“승가대사는 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그러자 만회 스님이 대답했다.
“관음(觀音)의 화신입니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5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