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무정(武丁)의 왕위는 아들인 조경(祖庚)에게 전해졌지만 조경이 불과 몇 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조갑(祖甲)이 뒤를 이었다. 조갑은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해 부친이 창업한 기틀에 손실을 입혔다. 《사기・은본기》에는 “제갑이 음란하자 은나라가 다시 쇠퇴했다”고 했다. 제갑 이후 몇 대의 왕들은 기년(紀年) 외에는 따로 언급할 내용이 없어서인지 역사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제28 상나라 왕이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벼락맞아 급사한 제왕인 무을(武乙)이다.
《사기・은본기》에는 “무을이 무도(無道)해서 우상을 만들어 이를 천신(天神)이라 불렀다.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을 보게 했는데 천신이 지면 즉시 그 사람을 모욕해 죽였다. 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가득 채우고는 높이 매달아 활로 쏘면서 이를 사천(射天 하늘에 활을 쏜다는 의미)이라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피의 신성함은 동서고금이 다 마찬가지인데 제사를 지낼 때 희생을 죽여 피를 내는데 희생의 피를 제기(祭器)에 담아 신령(神靈)에게 정중히 바친다. 고대인들은 맹세할 때도 피를 같이 마시는 삽혈(歃血)을 했다.즉 먼저 희생을 죽여 피를 낸 후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희생의 피를 마시는데 이를 통해 가장 높은 신뢰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하늘에 화살을 쏘아 피를 내어 누구를 공양한단 말인가? 게다가 또 이렇게 불경한 방식을 사용했다.
우리는 사서의 기록을 통해 무을의 정신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무을의 이름을 구(瞿)라 했는데 35년 재위했으며 이 기간에 상조(商朝)의 계승자인 주조(周朝)의 선왕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무을은 주(周) 부락의 힘을 이용해 사방을 평정했다. 근대에 출토된 갑골문에서도 그가 정벌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무을 3년 주족(周族)은 수령인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인도하에 막 빈(邠 지명)에서 중원지역으로 이주해왔다. 무을은 주공에게 기산(岐山) 지역을 주었다.
무을 34년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季歷)이 찾아와 무을을 알현하자 무을이 그에게 30리 토지를 하사하고 10쌍의 옥과 10필의 말을 하사했다. 그 후 계력은 상조를 위해 여러 차례 정벌전쟁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무을의 재위기간에 상조는 또 한 번 도성을 하북(河北)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몇 년 후 다시 원래 위치인 매(沬 지명)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하북이란 황하 이북을 말하고 매(沬)는 나중에 상조의 수도로 유명한 조가(朝歌)를 말한다.
이 몇 지방에서 움직인 것을 천도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현재 논쟁 중이다. 한가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무을의 정신상태가 아주 정상적이었다는 점이다.
피가 든 주머니에 화살을 쏘고 우상을 모욕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며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도 될 정도다. 중요한 것은 무을의 ‘광기’가 상조(商朝)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가 하늘을 모욕한 것은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한 것으로 단순히 성격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악독하게 신령을 모독했다는 점이다.
아마 어떤 사건 때문에 무을이 이렇게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을 하늘과 시합할 정도로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 후 무을의 광란과 사망은 그 스스로 허물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 어떤 이유로든 천법(天法)을 부패시키는 행동은 있을 수 없다. 임금은 천하 사람들이 주목하는 대상으로 그의 행동은 천하 사람들이 따라하는 모범이 되어 교화(敎化)의 책임을 맡아야 한다. 말로 전하고 행동으로 가르쳐 도덕과 예의가 위에서 아래까지 각 계층에 이어지게 해야만 임금의 정도(正道)라 할 수 있다.
《한비자》에는 임금의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춘추시기 제나라 환공(桓公)이 자주색 옷을 즐겨 입자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자주색 옷을 즐겨 입었다. 이 때문에 당시 보라색 옷감이 아주 비싸져서 염색하지 않은 흰 비단 5필을 주어도 자주색 비단 1필을 구할 수 없었다.
제환공은 자신의 기호 때문에 시장 균형에 영향을 끼친 게 걱정이 되어 재상인 관중에 물었다.
“내가 자주색 옷을 즐겨 입자 자주색 옷감이 매우 비싸졌소. 온 나라 백성들이 자주색 옷을 즐겨 입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군주께서 이를 근절하고자 하시면서 어찌하여 자주색 옷을 벗지 않으십니까?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자주색 옷이 싫다고 하십시오.”
제환공이 시키는 대로 하자 당일로 측근들이 더는 자주색 옷을 입지 않았고 며칠 사이에 온 나라에 자주색 옷을 입는 사람이 없어졌다.
제환공은 일개 제후국의 군주였음에도 그의 행동이 이렇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천하의 왕이라면 온 천하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왕의 덕행(德行)은 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조대(朝代)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무을의 악행은 실로 심각했다.
천하 사람들이 신(神)을 경외하는 뿌리가 되어야 할 윗물이 맑지 않으니 그 후과(後果)가 일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을지라도 사실 아주 심각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신령(神靈)을 소홀히 여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후세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되며 이는 상조(商朝)의 사직과 강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무을 시기 상조 동쪽에 있던 동이(東夷)가 강성해졌다. 그들은 회하(淮河)와 태산 일대까지 이주하며 세력을 넓혀왔고 점차 상조의 판도인 중원지대까지 들어왔다. 《후한서》 기록에 따르면 “무을이 쇠미해지자 동이가 강성해졌고 마침내 회하와 태산으로 옮겨와 중토를 점거했다”고 했다.
당시 무을이 천도해서 어떻게 백성들을 고생시켰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무을에게 동이가 골칫거리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계력에게 말을 선물로 하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시 무을이 출병해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동이를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동이는 무을 이후로도 계속해서 상조를 침략했고 마지막에는 상조와 함께 멸망했다.
다시 말해 무을이 신을 공경하지 않는데 신이 어찌 그에게 자비로울 수 있겠는가?
무을 35년 무을이 황하와 위수 사이에서 사냥을 하다 큰 비를 만났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가 하늘에 화살을 쏜다고 해서 하늘에 상처를 입히진 못했지만 하늘이 그에게 번개를 한번 치자 그는 죽었던 것이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무을은 하늘의 위험을 알리는 좋은 교재가 되었다.
가령 사마천은 《사기》에서 “무을제가 신을 모욕하자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당나라 때 역사가 사마정(司馬貞)은 “무을이 무도해서 하늘에 화살을 쏘니 재앙이 생겼다”라고 했다.
명조(明朝) 말엽의 개혁재상 장거정(張居正)이 만력제(萬曆帝)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제감도설(帝鑒圖說)》에서는 “무을이 흉악해서 우상을 만들어 죽이고 가죽 주머니에 화살을 쏘았다. 오호라! 하늘에 죄를 지었으니 어찌 피할 수 있으랴? 천둥과 벼락에 몸에 떨어졌으니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 참으로 분명하구나.”라고 했다.
무을의 죽음은 중국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제왕의 죽음이다. 이 유명한 사건은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몇 천 년간 살아남았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하늘이 벼락을 내려 죽인다는 뜻의 ‘천타뢰벽’(天打雷劈)이란 고사성어가 생겼다. 이 말은 또한 중국인들에게 가장 심한 욕설이나 저주가 되었다. 이는 자손이 끊어진다는 뜻의 단자절손(斷子絕孫)보다 더 심한 욕인데, 자손이 끊어지는 것은 후세(後世) 보응이지만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은 현세(現世)의 보응이다.
이처럼 상조의 운명은 무을의 손에서 크게 변모했고 이때부터 쇠망으로 나아갔다. 신전문화(神傳文化)에 끼친 재앙이 너무 커서 지은 업을 일생일세(一生一世)에 다 갚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왕(君王)의 몸이었기 때문에 피해를 끼친 것은 조대(朝代) 전체였다.
참고문헌:
1. 《죽서기년》
2. 《사기 은본기》
3. 《태평어람》
3. 《한비자》
4. 《상대의 전쟁과 군사(商代的戰爭與軍事)》
5. 《사기 봉선서》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4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