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중국역사정술】 상(商) 27: 망조(亡朝)의 전주곡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문정이 계력을 죽이다

무을(武乙)이 사망한 후 제위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문정(文丁)이었다. 문정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사기》에서는 태정(太丁)이라 했고 갑골문에서는 문무정(文武丁)이고 이름이 탁(托)이라 했다. 많은 고서에서는 그를 문정이라 했다.

문정은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진 못했지만 몇 가지 의미심장한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는 한 무리 유명 인사들을 낳은 것이다.

비간(比干), 기자(箕子)가 바로 그의 아들이고 미자(微子)는 손자다. 상조 마지막 왕 주왕(紂王)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송나라 2대 군주 미중(微仲) 역시 그의 손자인데 또한 공자의 15대 조상이 된다. 이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유명 인사들이다. 그의 딸 중 하나는 주문왕의 비가 되는데 머지않아 주나라 왕실로 시집간다.

이와 비교해보면 제위를 물려준 큰 아들이자 주왕의 부친인 제을(帝乙)은 말할 거리가 못된다.

둘째는 바로 주나라 지도자 계력을 살해한 것이다.

무을이 사망한 후에도 강산이 바뀌지 않았고 계력(季歷)은 계속해서 상조(商朝)에 충성을 바쳤다. 그는 도처로 출정을 다니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그러다가 문정 11년 계력이 예도융(翳徒戎)을 물리치고 수령 3명의 목을 갖고 은나라 도성에 와서 문정에게 포로를 바치고 승전보를 알렸다. 그런데 문정이 갑자기 명령을 내려 계력을 감금했는데 계력은 얼마 후 도성에서 죽었다. 계력이 울분에 차서 죽은 것인지 아니며 문정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무을의 치세 하에서 상왕조는 이미 쇠락했고 제후들이 이반했다. 다행히 계력의 충성심과 용맹으로 그나마 부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계력이 죽자 상조가 몰락하는 길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일반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배상하고 사과한 후 잘못을 고치면 된다. 하지만 군왕이 일념의 차이로 잘못을 저질러 대장을 잃으니 왕조 밖을 지킬 사람이 없어졌고 제후들도 그를 공경하지 않게 되었다.

문정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가 남긴 많은 후유증들은 아들인 제을이 수습해야 했다.

세 번째로 유명한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 최대의 청동기다.

이름을 사모무정(司母戊鼎)이라 하는데 크기 110cm×78cm×133cm에 중량 87.5kg이다. 그냥 큰게 아니라 한마디로 거대한 청동기다. 정(鼎) 벽에 사모무(司母戊)란 글자가 적혀 있어서 사모무정이라 부른다.

문정이 모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한 정인데 그동안 지하에 묻혀 있다가 1939년에 발견되었다.

근년에 끊임없이 청동기가 출토되면서 사모무정의 꽃무늬 등은 상조 중기(中期)의 풍격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모무정의 주인을 무정의 아들 조경 또는 조갑이라고 본다. 누가 그릇을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가 역사발전에 그리 큰 영향은 없으니 이런 의견 차이는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사모무정이 아주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인데 고대문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학자들이 수십 년간 이렇게 거대한 청동기를 어떻게 합리적인 합금비율을 찾아내서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연구하고 있다.

한편, 문정의 재위기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가장 짧은 게 3년이고 가장 긴 것은 13년이다. 그러나 3년은 좀 의문이다. 왜냐하면 상왕조 문정의 수중에 있을 때 무을처럼 천도해서 동이를 피하거나 주조(周朝)의 선조 계력이 큰 공을 세운 공신이 되었다가 죄수가 되어 죽자면 또한 주 왕실이 약소한 것에서 강력해져서 더는 거리낄 것이 없게 되는 과정에 이르자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덕을 잃으면 하늘이 견책하는 것은 반드시 그러한데 태정(太丁) 연간에 상조의 어머니와도 같은 하원수(河洹水)가 “하루에 3차례나 단절”되는 일이 발생했다.

원수(洹水)는 지금의 안양하(安陽河)를 말한다. 안양시를 지나 위하(衛河)로 들어간 후 북쪽 수계로 모여 천진(天津)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상조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강인데 도읍인 안양이 원수 강가에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에도 상왕이 원수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강이 하루에 세 번 끊어진 것에서 우리는 당시 심한 기후변화와 그것이 초래했을 두려움을 알 수 있다.

가장 번거로운 것은 ‘쇠퇴’로 왕조가 도덕적인 호소력을 잃자 제후들이 더는 조회하러 오지 않았고 더는 대상(大商)을 천하의 공주(共主 공동 주인)로 인정하지 않았다.

누이를 문왕에게 시집보낸 제을

문정의 아들 제을(帝乙)은 이름이 선(羨)이고 37년을 재위했다. 《사기》에는 이때 상조(商朝)가 원래보다 더 쇠락해졌다고 했다. “태정(太丁 문정)제가 붕어하고 아들인 제을(帝乙)이 섰는데 제을이 서자 은나라가 더 쇠퇴해졌다.” 수령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주족(周族)도 상을 토벌하러 왔다. 동쪽 변방의 사람들도 다시 반란했다.

제을은 부친의 왕권뿐만 아니라 ‘부채’도 물려받았다. 제을은 이에 누이동생을 주 문왕(文王)에게 시집보내 사과하고 양국 간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 혼례는 아주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이 주나라의 개국 서사시라 할 수 있는 《시경‧대아(大雅)‧대명(大明)》에 나온다.

문왕께서는 삼가시고 힘쓰시어
밝게 상제를 섬기시고 많은 복을 누리신다
그분의 덕 어긋남이 없어 사방의 나라를 받으시었다

維此文王 小心翼翼
昭事上帝 聿懷多福
厥德不回 以受方國

하늘이 세상을 굽어 살펴 천명을 내리셨노라
문왕께서 임기를 시작하시니 하늘에서 배필을 주셨다
흡수의 북쪽 위수의 곁에문왕께서 아름답게 여기신 큰 나라의 여자가 계셨다

天監在下 有命旣集
文王初載 天作之合
在洽之陽 在渭之涘
文王嘉止 大邦有子

큰 나라에 따님 계시어 마치 하늘의 소녀처럼 여기시어
좋은 날을 예로써 정하시어 위수에서 친히 영접하셨다
그때 배를 이어서 다리 놓으시니 그 빛이 찬란하였다

大邦有子 俔天之妹
文定厥祥 親迎于渭
造舟爲梁 不顯其光

제을은 30년 이상 재위했지만 역사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가 어린 아들 ‘수(受)’를 선택해 제위를 잇게 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수’가 바로 후세에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상조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이다.

그 역시 한 차례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는데 말(沫)을 조가(朝歌)로 고쳤기 때문이다. 아마 조가에서는 거주만 하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안양(安養)도성 안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사서에는 제을이 도읍을 원수(洹水) 북쪽의 조가성으로 옮기자 아들인 주왕이 조가를 도읍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서에는 반경(盤庚)이 은 땅으로 천도한 후 상조가 멸망할 때까지 273년간 더 이상 천도하지 않았고 조가와 무을이 몇 차례 거주지를 옮긴 것은 모두 이궁(離宮)이나 별관(別館)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실 이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단지 역사학자들이 마치 탐정이 사건을 파헤칠 때 피조사인의 주소를 분명히 확인해 보려는 것과 같을 뿐이다. 하지만 하남(河南) 현지 사람들은 이렇게 보지 않는다. 조가 사람들은 주왕의 도성이 조가라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태도도 열정적이다.

사서에는 제을의 정치에 대한 기록은 없고 출토된 갑골문에 일부 기록이 남아있지만 전부 반란을 정벌한 것이다. 큰 고생을 겪었지만 평정하진 못했다. 상조는 이미 몰락으로 접어들었고 한두 임금의 무력 정벌전에 의지해 그 운명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 《죽서기년》
2. 《후한서》
3. 《여씨춘추》
4. 《진서(晉書)》
5. 《상대사회생활과 예속(商代社會生活與禮俗)》
6. 《주역괘효사 속 이야기(周易卦爻辭中的故事)》
7. 《상대사구(商代史九) 상대 전쟁과 군사(商代戰爭與軍事)》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