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주왕의 응전(應戰)
한편 상주왕(商紂王)의 전투준비와 대응에 대해서는 원래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1977년 출토된 갑골문 중에서 일부 문헌의 부족을 보완하게 된다.
당시 출토된 것은 상조(商朝) 말기 제사를 지낼 때 쓴 갑골이다. 이중 H11:1에 상주왕이 부친인 제을(帝乙)의 종묘에서 제사를 올리고 성탕(成湯)의 보우를 기원하며 점을 쳤다는 내용이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목야전투가 발생하기 전에 상주왕은 이미 무왕이 토벌하러 오는 것을 알았고 제사를 지내 이를 하늘에 알리고 위대한 조상들에게 주실(周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우(保佑)해주길 원했다. 시간은 계사일이니 결전을 치른 갑자일 31일 전이다.
한편, 당시 주무왕은 한창 악천후 속에 장거리 이동 중이었다.
상주왕은 무왕의 군대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길한 천상(天象)도 보았다.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것이다. 천상에는 오직 하나의 태양이 있고 땅에는 오직 하나의 천자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금성이 태양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기강이 어지러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상주왕은 계사일에 조부 문정(文丁)과 부왕 제을(帝乙)에게 제사를 지내 점을 쳤으며 또 도관(陶罐)을 제작했다. 또 이 도관 위에 관련 내용을 기록했다. 불로 구워 완성된 도관은 붉은 색으로 아주 예뻐서 의미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도관에 적힌 명문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대낮에 금성이 나타남은 불길한 징조다. 이는 나의 군대가 출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백(西伯)의 군대가 서읍(西邑)에서 상조(商朝)로 오는 것인가? 하늘에 계시는 조부 문정과 부왕 제을(帝乙)의 신령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인가? 서백후의 출병에 의해 기강이 무너질 것인가?”
“조왕(祖王)인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왕을 정벌하기 위해 저녁에 제사를 올립니다. 우리 군대가 결국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정수(井宿 28수의 하나)에 제사를 올리니 짐이 하늘의 재앙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별의 조짐을 관찰해 길흉을 판단해 각수(角宿)가 빛을 발하니 내가 문왕을 정벌하고 배(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 것이고 서읍을 정벌한 후 분봉해 재앙이 멈출 것이라고 말했다.”
홍도관(紅陶罐)에 관한 이야기
한국의 한 수장가가 중국 고대의 도관을 하나 샀다. 이 도관은 흠 없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고 색깔도 아름답고 화려한데다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 장식도 있었다.
2005년 어느 날, 그는 문득 자신이 소장 중인 홍도관 위에 새겨진 무늬가 단순한 그림 장식이 아닌 고대 문자임을 발견했다. 이에 갑골문 학자를 찾아가 감정을 요청했다. 그 결과 학자들은 단번에 은상(殷商)시대 문자임을 확인했다.
대만 신문에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감정한 학자의 감동을 그대로 실었다.
“처음 홍도관을 봤을 때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두 그것에 굳어버렸다.”
“완벽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3천 년 전 고대 문물을 손에 들었을 때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기분이 들었고 순식간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왜냐하면 이는 상주왕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쳤다는 실물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 홍도관은 TL연대측정 결과 지금부터 1700년에서 2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받았다. 지금은 심지어 물건 주인인 수장자조차 장갑을 끼고 나서야 물건을 만진다.
즉, 상주왕은 계사일에 제사를 지내 점을 친 것을 갑골에 기록하고 또 도관에도 기록한 것이다. 갑골과 도관은 동일한 일에 관련된 두 가지 물건인데 몇 천 년 후 둘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홍도관에 기술된 별자리 역시 당시의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
《여씨춘추‧신대(慎大)》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왕이 은나라를 무찌를 때 일찍이 두 포로를 잡아 물어본 적이 있다.
‘너희 나라에 어떤 괴이한 일이 있었는가?’ 그러자 그중 한 포로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대낮에 별이 보이고 또 하늘에서 피 비가 내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낮에 나타난 별이 바로 금성(金星)이다.
목야전투가 시작되면서 또 다른 특이한 천상이 있었는데 주나라 왕실은 상세한 기거주(起居注) 기록을 남겼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쌍방의 병력
무왕이 상을 이긴 부대는 줄곧 빨리 행군해야 했다. 비록 예정된 날짜를 어기긴 않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모든 병력이 다 입장하지 못했다. 무왕은 “수레를 선택”하고 “말을 골라 전진”했고 “정예부대”가 은나라 도성 교외에 빨리 나아가게 했다.
그러므로 갑자일에 목야에 도달한 주나라 군사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묵자》 : “무왕이 수레 100대, 정예병사 4백 명을 선발해 먼저 각국의 절부(節付)를 지니고 병사를 거느린 제후들과 함께 은나라 사람들과 목야에서 싸웠다.”
《맹자》: “무왕이 은을 정벌할 때 전차 300량과 정예병사 3천명이었다.”
《여씨춘추‧간선(簡選)》: “무왕의 정예병사 3천 명과 가벼운 수레 3백승”
《여씨춘추‧고악(古樂)》: “무왕이 즉위해 육사(六師)로 은을 정벌했는데 육사가 아직 은의 도읍에 이르기 전에 정예병사로 목야에서 이겼다.”
(원주: 고대에 1사師는 약 2500명으로 6사는 총 1만 5천명이다.)
《한비자‧초견진(初見秦)》 : “무왕의 평소 갑옷 입은 군사가 삼천 명이었다.”
《박물지(博物志)》: “무왕이 은을 토벌할 때 기(幾)에 주둔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렸다. 이에 수레 3백승과 갑사 3천명을 이끌고 밤낮 3백리를 가서 목야에서 싸웠다.”
《사기‧주본기》: “무왕이 3백대의 수레와 정예병 삼천 명 갑옷을 입은 갑사(甲士) 4만 5천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주(紂)를 정벌했다.”
“제후들의 병사가 모이니 전차가 4천대였고 목야에 진을 쳤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상왕조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사기‧주본기》는 “주는 무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70만 군대를 내보내 무왕에 대항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통계는 《사기》 이전 다른 책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마천 단독 주장으로 보이는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크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설명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주왕(紂王) 시대 상왕조의 총인구는 78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절반이 여자라면 남자는 390만 명이다. 여기서 또 절반가량의 노약자를 제외하면 195만 명이 된다. 그렇다면 70만 명이란 병력은 동원 가능한 상조 남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다.
한 저명한 역사학자는 자신의 총서에서 “사마천은 대문호인데 사마천은 진정한 대문호다!”라고 탄식했다. 그런데 역사학자가 지나치게 문학화하면 비교적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데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지지만 자신의 주관이 뒤섞이게 된다.
가령 이 70만 명 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사마천의 잘못으로 간주해 대략 17만 명으로 축소했다. 현대학자들이 갑골문과 지하에서 출토된 문물에 근거해 추산한 상나라 말기 도성의 인구는 14만 6천명이었다. 그렇다면 17만 명이 전투에 참가하려면 전국적으로 가용한 병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한편 주나라 사관(史官)이 스스로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서・목서(牧誓)》: “무왕이 전차 3백량과 정예병사 3백 명으로 목야에서 싸우게 하고 《목서》를 지었다.”
또 전쟁이 끝난 후에 저술된 《일주서(逸周書)‧극은(克殷)》에는 “주나라가 전차 350승을 목야에 펼치자 제신(帝辛)이 나와서 싸웠다.”고 종합했다.
“무왕의 전차” 300대에 “주나라 수레(周車)”가 50대 이상인데 왜냐하면 또 여덟 제후가 진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상군은 병력 수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전투의 승패는 주나라 사관도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서‧무성(武成)》에는 “갑자일 여명에 주왕이 숲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목야에서 싸웠다”라고 했다.
또 《시경 대아(大雅)‧대명(大明)》에서도 “은상의 군대가 숲처럼 많이 모였다”라고 했다.
전투 전의 예법
무왕이 약속한 날짜에 맞춰 도착하자 상주왕의 병력도 엄밀한 진을 펼쳐 대비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전투 전의 큰일인 병사들 앞에서 군대예절을 진행했다. 이 예절은 아주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상주왕도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보다 수백 년 전 상주왕의 조상인 성탕(成湯) 역시 마찬가지로 군사들에게 군례(軍禮)를 행했고 이를 기록한 것이 《상서・탕서(湯誓)》다. 반면 이번에 주 무왕이 남긴 군례는 《상서・목서》로 의미는 목야에서 군사들 앞에서 한 선서란 뜻이다.
당시, 무왕은 왼손에 정벌의 권한을 상징하며 용이나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노란색 큰 청동 도끼를 들었고, 오른손에는 소꼬리로 만든 흰색 깃발을 들고는 먼저 환영인사부터 했다.
“서쪽 멀리서 온 병사들이여 고생이 많았다.”
여기서 서쪽에서 온 병사들이란 주나라를 도와 참전한 8개 작은 방국들의 병력을 말한다.
“아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 사마, 사공, 아려(亞旅 부족을 관장하는 군관), 사씨(師氏 군사를 거느린 대부), 천부장(千夫長 군사 천명을 이끄는 군관), 백부장(百夫長 군사 백명을 이끄는 군관), 용(庸), 촉(蜀), 강(姜), 무(髳), 미(微), 노(盧), 팽(彭), 복(濮)의 동맹족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그대들의 창끝을 세우라. 내가 선서하려 한다.”
“오늘 나 희발(姬發)은 오직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할 것이다. 오늘 전투는 예닐곱 걸음을 넘지 않고 바로 멈춰 정렬해야 한다. 그대들은 이 군령(軍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공격하고 바로 멈춰 정렬해야 한다. 이 명령을 지키도록 하라! 그대들은 힘세고 날래기가 호랑이 같고, 곰 같고, 승냥이 같고, 이무기 같아야 한다. 상(商)의 교외에서 투항하는 자는 거부하거나 죽이지 말라, 그들을 우리 서쪽 땅을 돕게 할 것이다. 노력하라!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징벌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엄정하게 대열을 유지하는 병사들을 앞에 두고,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좀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 이것 역시 군대예절의 일부다. 투항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는 것도 군대예절인데 이를 ‘불교물적(不校勿敵 저항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또 용감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는 것 역시 군대예절에 속한다.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각각 한쪽을 차지했다”는 것은 주(紂)를 토벌하러 온 대군을 앞에 두고 응전한 상주왕(商紂王)도 자신의 죄상을 듣고 그들이 선서하고 진을 치도록 기다려주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주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고대 군왕(君王)으로서 왕자(王者)의 품위를 느낄 수 있다.
참고문헌:
1. 《갑골학통론(甲骨學通論)》
2. 《무왕극상 전 제신이 점을 친 도문과 H111 점사(武王克商前帝辛占星陶文與H111帝辛卜辭)》
3. 《여씨춘추‧신대(慎大)》
4. 《순자‧유효편(儒效篇)》
5. 《상대사총론(商代史綱論)》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