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자세한 전투 상황
고대의 예법(禮法)을 알면 좋은 점이 있는데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몇 천 년 전 목야전투는 정면적인 조우전(遭遇戰)이었다. 상고시기 사료(史料)를 잃은 게 너무 많아서 후세 학자들은 고서중의 기록들을 모아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해볼 뿐이다.
군례(軍禮)에 따르면 전투가 시작될 때는 북을 쳐야 하는데 소위 말하는 “대열을 이루고 북을 치는(成列而鼓)” 것이다. 상군(商軍)과 주군(周軍) 사이에는 반드시 북을 치면서 전투를 시작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지만 현존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사마천조차도 이 단락의 줄거리를 서술하지 않고 직접 쌍방이 개전해서 아주 빨리 승패를 가렸다고 했다.
“무왕은 상보(尙父 강자아)에게 일백 명의 용사들과 함께 주(紂)의 군대를 맞아 싸움을 돋우며 대(大) 부대를 주의 군사에게 돌진하게 했다. 주의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았지만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서 속으로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랐다. 주의 군사들은 모두 무왕의 편으로 돌아서서 싸우면서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의 병사들은 모두 무너져 내려 주를 배반했다. 주(紂)는 도망쳐 돌아 들어가 녹대(鹿臺) 위로 올라가서 보옥(寶玉)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주조(周朝) 사관의 기록은 더욱 간단하다. 《일주서(逸周書)・세부(世俘)》에는 “무왕(武王)이 상보 강자아와 일백 명을 파견해 주왕에게 도전하게 했다. 무왕이 선서를 마치고 용사와 전차를 상왕의 군대를 향해 진격하자 상왕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상왕주(商王紂)는 성안으로 도망쳐 녹대 위에 올라가 보옥이 장식된 옷을 입은 후 불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타죽었다.”라고 했다.
《일주서・극은해(克殷解)》에는 “상왕주(商王紂)가 남교에서 전투에 패했다. 갑자일 저녁 상왕주가 천지옥(天智玉) 5개를 몸에 걸치고 스스로 불에 들어가 타죽었다.”라고 했다.
생사(生死) 대전(大戰)을 충분히 준비하기 위해 웅장하게 시작되었고 아직 큰 전투가 있기 전에 이렇게 21차례 장(場)을 수습했다.
사실 이것은 허술하게 대충 한 게 아니며 모든 것은 다 예법(禮法) 속에 있다.
《사마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도망하는 적을 추격할 때 100걸음을 넘지 않았고 퇴각하는 적을 쫓을 적에 삼사(三舎 90리)를 넘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 예(禮)를 분명히 했다. 또 능력이 없는 자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고, 부상자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겼으니 이를 통해 인(仁)을 분명히 했다. 적이 대열을 이룬 뒤에 북을 쳐 진격하니 이를 통해 신(信)을 분명히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의 ‘오십보백보’ 이야기 즉, 전투에서 패해 50 걸음 물러난 병사가 100걸음 물러난 병사를 보고 비웃는 것에는 도리가 있으면서도 또 없다. 왜냐하면 100걸음을 물러나면 더 안전하니 50걸음 물러난 이가 용감한 병사이기 때문다.
한편, 목야전투에서는 사상자가 아주 많아서 “피가 흘러 방패가 떠내려갔다(血流漂杵)”고 한다. 이 주장은 주조(周朝) 기록에서 유래한다. 《상서・무성(武成)》에서는 “(주의 군사는) 우리 군사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앞에 선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 달아나 뒤에서 공격해 패배시키니 피가 흘러 방패가 떠내려갔다. 한 차례 전투로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라고 했다.
한편 맹자는 이 설명에 불만을 가졌다.
“지극히 어진 이(역주: 무왕)가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이(역주: 주왕)를 토벌하는데 어찌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 정도로 될 수 있겠는가?”
순자 역시 “무왕이 주를 토벌함에 인의(仁義)의 병사로 천하에서 행동했으니 칼날에 피가 묻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소망이 비록 아름답긴 하지만 이는 단지 아름다운 희망사항일 뿐이다.
왜냐하면 전투에서 앞에 선 병사들이 몸을 돌리고 뒤에서 이를 추격해 싸운다면 사상자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또 병사들이 산처럼 무너지면 대열이 흩어지는 와중에 또 사상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왕은 천명(天命)을 받들어 주(紂)를 토벌했고 “불의를 토벌”한 후 “죄인들을 주살”해 성대한 의식을 갖춰 상왕과 왕비의 수급을 취했다. 또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 포로를 희생으로 바쳤다.
상고시대 사람들은 지금과 생사 관념이 크게 달라서 상 왕실을 위해 충성을 바친 이들이 분명히 있었고 직분에 충실해 투항하지 않은 이들도 분명 있었기 때문에 유혈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주왕 스스로 불에 들어가다
목야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상주왕(商紂王)이 어떻게 조가(朝歌)로 돌아왔는가에 대해서는 사료에 기록이 없다.
목야는 조가에서 70리 떨어진 곳이다. 새벽부터 전투를 치렀고 저녁 무렵 주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주왕은 이 사이에 단지 조가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또 5가지 천지옥 및 다른 보배들을 몸에 찰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백 년 후 발생한 일부 전투 사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춘추시기 언릉(鄢陵)전투에서 정(鄭)나라 군대가 진(晉)나라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정성공(鄭成公)이 수레에 올라 도피했다. 진나라의 두 장군이었던 극지(郤至)와 한궐(韓厥) 모두 정성공을 사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다.
우선 한궐은 “임금에게 또 다시 모욕을 당하게 할 순 없다”고 했다. 극지는 수레 오른쪽에 탄 조수에게 “임금을 해치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해 정성공의 탈출을 도왔다.
이상은 일국의 장군이 적국 군주에 대한 존경으로 다시 말해 ‘예’에 해당한다.
한편, 정성공의 선조 정장공(鄭莊公)도 한 차례 전투에서 주나라 왕실에서 자신의 권한을 회수하자 화가 나서 주왕을 알현하러 가지 않았다. 이에 주환왕(周桓王)이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치러 왔지만 정나라 군대에 크게 패했고 주왕도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정나라 장군 축담(祝聃)이 추격할 것을 요청하자 정장공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유는 천자에게 다시 모욕을 줄 순 없다는 것이다. 정장공은 저녁에 또 따로 사자를 파견해 문안하게 하고 환왕과 가까운 신하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상은 제후국 군주의 천자(天子)에 대한 존중으로 역시 ‘예’다.
도성에 돌아온 상 천자 주(紂)는 이미 상조의 천명(天命)이 끝났음을 알았다. 하늘의 뜻은 군대의 배반과 전차가 끊어진 것으로 충분히 드러났다.
당시 주왕은 상조의 대부대가 동이(東夷)에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동방으로 후퇴했다면 다시 싸울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사료가 부족해서 후인들이 상주왕의 최후 시간을 복원할 방법은 없지만 그가 최후에 한 일만은 오히려 모두들 다 잘 알고 있다. 바로 스스로 번제의 희생이 되어 불에 타죽은 것이다.
후세에 어떤 이는 주왕이 미리 동쪽으로 피신해 자신에게 충성스런 군대를 모아 다시 싸우는 기회를 노릴 계책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주왕은 절대 이런 계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36계 줄행랑이란 삼대(三代)시기 도덕표준으로 가늠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짓이기 때문이다.
적에게 투항하는 것은 가능했다. 사실 몇 백 년 전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왕의 조상인 성탕(成湯)이 하조의 천명을 대신해 상조를 일으킬 때 하나라 마지막 왕 걸(桀)은 500명을 이끌고 남소(南巢)로 쫓겨났다. 걸왕 살아생전에는 그래도 예우를 받았고 걸이 세상을 떠날 때 전국적으로 3일간 노래와 음악을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왕은 후인들이 따라할 수 없는 한 가지 선택을 했다.
상조의 군왕이 신령(神靈)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희생을 바쳐야 한다. 그중 한 가지 희생물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직접 불을 붙여 태우는 것을 가리켜 ‘요(燎)’라 했다.
상주 시대 희생으로 사용된 것은 소, 양 또는 사람이었는데 이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고급 희생품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생사관이 지금과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순장(殉葬) 할 때 대부분은 망자의 주변 사람들이고 자발적으로 원해서 순장했던 것이다. 단지 공간을 바꿔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원래 쓰던 일상용품도 묘에 넣고 함께 가져갔다. 그러나 피살자들의 심경도 좀 차이가 있었을 텐데 이는 알기 어렵다.
상조 건립 초기 주왕의 30세 조상인 성탕은 일찍이 천하에 큰 가뭄이 들자 자신을 하늘에 제사 지내는 희생으로 삼아 상림(桑林)에서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미담이다. 이때 사용한 제사법이 바로 ‘요’법이다.
당시 성탕은 흰색 조복(朝服)을 입고 검은 소와 함께 장작더미 위로 올라갔다. 막 불을 붙이려 할 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와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왜냐하면 천하는 아직 그가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주왕은 바로 이 의식을 가장 성대한 옷을 입어 온갖 보옥(寶玉)으로 몸을 치장한 후 아주 성대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 보옥은 제상에 사용하는 국기(國器)였다. 그러고 나서 장작더미 위로 스스로 올라가 불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위해 장작더미를 쌓아야 하고 목욕재계를 하자면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상주왕이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기‧제법(祭法)》에 “태단(泰壇)에 번시(燔柴)하는 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는 조문이 있다. 송조(宋朝)의 이학자 진호(陳澔)는 이에 대해 “단 위에 장작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옥(玉)으로 된 희생을 올리고 불로 태워 기(氣)가 하늘에 도달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법이다.”라고 주석했다.
하늘은 그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상조(商朝)라는 큰 연극의 막을 내렸다.
참고문헌:
1. 《사마법(司馬法)‧인본(仁本)》
2. 《하상사회생활사(夏商社會生活史)》
3. 《좌전‧환공5년》
4. 《예기‧제법(祭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6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