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중국 고대문명을 말하면서 청동기(靑銅器)를 빼놓을 수는 없다. 중국의 청동기 시대는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에서 진한(秦漢)시기까지 이어지는데 이중에서도 상대(商代)는 청동기시대의 최고 전성기에 해당한다.
다음 내용을 읽어보기 전에 먼저 다음 사진을 한번 보도록 하자. 사진에서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감히 10초도 쳐다보지 못했을 텐데 사람의 혼백을 두렵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사람 얼굴과 뻣뻣한 표정 및 초점 없는 시선이 아주 간단하지만 장엄하면서도 엄숙하고 예리하면서도 냉담해서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가?
이것은 살아 있는 것으로 신력(神力)의 가지(加持)와 떼어놓을 수 없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인체는 오히려 감수할 수 있다. 신(神)의 눈은 번개처럼 밝기에 신 앞에 선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많은 청동기에는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구천검(句踐劍 역주: 춘추전국 시기 월나라 왕 구천의 검)이다. 지하에 묻힌 지 2천여 년이 지난 1965년 12월 호북성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에도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삼엄하면서도 서늘한 빛이 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검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구천검은 상조(商朝) 이후 전국시기에 해당한다. 계속해서 상조의 청동기에 대해 살펴보자.
사모무정(司母戊鼎)은 후모무대방정(后母戊大方鼎) 또는 사모무정(司母戊鼎)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청동기 중 가장 크고 무겁다. 1939년 하남성 안양(安陽)에서 출토되었다. 높이 133cm, 길이 112cm, 폭 79.2cm에 중량 832.84kg으로 아마 1톤 이상의 재료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래는 전에 장개석(蔣介石) 선생이 후모무정을 참관할 때의 사진인데 주변 인물과 대조해보면 정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2006년 7월 15일 《남경일보(南京日報)》에는 〈5년 만에 마침내 남경에서 사모무정 ‘복제’에 성공(五年時間,南京“克隆”司母戊鼎終於成功了)〉이란 기사가 보도되었다. 남경 박물관의 청동기 수리 및 복제 전문가가 5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상조의 청동기술을 그대로 이용해 사모무정을 복제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전문가는 “비록 당시 대정(大鼎)을 주조할 때 사용된 일곱 가지 단계의 세부적인 내용이 이미 다 밝혀졌고 또 이 방식에 따라 사모무정을 만들었지만 모양만 비슷할 뿐 신운(神韻)은 없다. 은상(殷商) 시기는 확실히 청동기 주조 역사상 뛰어넘을 수 없는 정점이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기술(技術)이 아닌데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신력(神力)이다.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신지(神祇)가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은 연구해서 복제할 수 있어도 “모양만 비슷할 뿐 신운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상조인들은 청동기를 제작하기에 앞서 신에게 미리 고하고 의견을 구했다.
가령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왕이 황려(黃呂)를 주조하기 위해 희생을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물었다. 오늘 을미(乙未)시에 하면 이롭겠습니까?” 여기서 황려란 황동(黃銅)을 가리킨다.
한편 제기(祭器) 외에 청동기의 또 다른 용도는 기념이었다. 상조 귀족이 상왕이 하사한 상을 받으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청동기를 주조하고 그 위에 이유를 새겨넣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어정(亞魚鼎)’이다. 상왕이 임오(壬午)일에 아어(亞魚 사람이름)에게 일부 패(貝)를 상으로 하사했다. 여기서 패는 당시의 화폐에 해당한다 아어는 이 돈으로 형의 제사에 사용할 정(鼎)을 주조했는데 상왕 7년 6월 임오일이었다. 이날 마침 상왕이 익(翌)이란 제사를 거행했다.
상조의 왕이든 귀족이든 청동기 제작은 모두 엄숙하고 큰일이었다. 때문에 재료는 반드시 가장 귀중한 것을 사용하고 공예도 반드시 가장 정교해야 했다. 그 결과 그 가치가 아주 귀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청동기에는 흔히 호방하면서도 빽빽한 구도를 지닌 장식무늬가 새겨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철문(饕餮紋)이다.
여기서 도철(饕餮)이란 인간세상의 동물이 아닌 신수(神獸)의 일종으로 좌우 대칭으로 분포한다. 양 겨드랑이 아래에 아주 큰 눈이 있고 입을 크게 벌리고 뿔과 꼬리가 달린 동물이다. 상조 청동기의 주요한 무늬장식이다.
또 기룡문(夔龍紋)이 있었다. 기(夔) 역시 인간세상의 동물이 아닌 신수다. 《설문해자》에서는 “기는 신이며 용과 같은데 다리가 하나다.(夔,神也,如龍一足)” 라고 했다. 기는 흔히 뿔 하나에 다리가 하나이며 입을 벌리고 꼬리를 위로 말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상조 청동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늬장식이다.
그렇다면 상조인들은 왜 인간세상의 동물을 장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주(商周) 초기 신화 속에는 동물이 사람의 세계와 조상 및 신(神)의 세계를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 예악동기(禮樂銅器)는 당시 분명히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에 사용되었고 아울러 사후에 조상의 대열에 참가하는 망자와 함께 매장했다. 이 때문에 이들 동기 위에 사람의 세계와 조상 및 신의 세계를 소통하는 매체인 신화적인 동물 문양을 새긴 것이다.”
이 주장에는 이치가 있다.
죽음에 관한 상조인들의 관념은 망자(亡者)가 인간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이다. 상왕의 조상들은 바로 상제(上帝) 곁으로 되돌아갔다. 인간세상의 가족들이 만약 그들과 연계할 때는 신수(神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과 소통했다.
무늬장식에도 의미가 있는데 바로 두 세계를 연계하는 것이다. 사용된 예기는 이미 제사를 지내 하늘에 알렸고 예기에 담아 바친 희생은 신수의 연계를 거쳐야 저쪽 세계로 진입해 신령(神靈)이 받아들일 수 있다.
제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데 청동반(青銅盤)은 물을 담는 데 사용하고 희생을 올려놓지 않았다. 여기에 조각된 것은 거북이나 용 등 신물(神物)외에 또 일부 물고기나 새 장식을 더했다.
상조 후기에 제작된 ‘반룡문반(蟠龍紋盤)’을 보면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데 용의 머리가 반의 중심에 해당해 바닥면에 양각되어 있고 가장자리로 기(夔)무늬, 새 무늬, 물고기 무늬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깨끗하게 손을 씻은 후에야 신령에게 희생을 바칠 수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데 과연 이렇게까지 정중히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필요가 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식은 반드시 정결한 심신과 배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첫 번째 사진인 대화방정으로 돌아가 보자. 이 방정은 상조(商朝)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그다지 크진 않지만 안면에 ‘대화(大禾)’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호남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람 얼굴 옆에 신수를 대표하는 작은 뿔과 큰 귀, 발톱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제기(祭器)다. 천제와 상신(上神)에 대한 경건함을 품고 주조한 청동기이기에 신명이 와서 가지(加持)해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청동기는 아마 대우(大禹)가 주조한 구정(九鼎)일 것이다. 《사기》에는 “우가 구목(九牧)의 금속을 거둬 구정(九鼎)을 주조했다.”고 했다. 여기서 금속이란 청동을 말한다.
즉 우임금이 치수에 성공한 후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아울러 각 주의 청동을 수집해 9개의 거대한 정을 만들었으며 각 정마다 해당 주의 명승지와 산하(山河)의 모습을 새겨넣었다. 때문에 구정은 구주를 상징하고 이 구주는 나중에 중국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하조(夏朝)가 끝나면서 성탕(成湯)이 구정을 상의 도읍으로 옮겨왔고, 상조가 결속되면서 주왕(周王)이 낙읍(洛邑)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주조가 멸망할 때 구정이 더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세인들은 모두 구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다시 볼 수 없었다.
사실 대우보다 훨씬 이전에 “황제가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지인을 상징했다(黃帝作寶鼎三,象天地人)”는 기록이 있다.
또 황제 이전에도 태제복희씨(泰帝伏羲氏)가 존재했고 “옛날에 태제(泰帝)가 신정(神鼎)을 하나 만들었는데 하나는 일통(一統)이고 천지 만물이 하나로 돌아감을 상징한다.”고 했다.
아마 황제나 태제의 정(鼎)은 청동으로 주조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 야금(冶金) 주조의 기원은 상조(商朝)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고대 중국문명은 정말이지 지금 사람들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문헌:
1. 《상대종교제사(商代宗教祭祀)》
2. 《사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