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李覺)
【정견망】
초선(焦先)은 자가 효연(孝然)이고 하동(河東) 사람이다. 170세로 늘 백석(白石)을 먹었고 또 남에게 나눠주어 먹게 했는데 익혀서 먹으면 토란과 같았다.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며 살아갔다.
땔나무를 하면 마을 첫 집부터 시작해서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문 앞에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이 보고는 곧 자리를 깔고 음식을 주었다. 초선은 곧 그 자리에 앉았고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나무만 문 앞에 놓고는 사라졌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위(魏)나라 때 초선은 황하 강가에 살았는데 초막을 짓고 풀을 깔았으며 침상도 없었다. 몸이 더러워서 마치 진흙에 빠진 사람 같았다. 길을 갈 때도 길로 가지 않았고 여자와는 접촉하지 않았다. 옷이 헤지면 나무를 팔아 옷을 샀는데 여름이고 겨울이고 늘 홑옷이었다.
태수인 동경(董經)이 그를 찾아갔지만 상대해주지 않았다. 동경은 그를 현인(賢人)이라 여겼다.
한번은 들에 불이 나서 초막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이 구하려고 가보니 그는 초막 아래 단정히 앉아 있었고 불에 타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막이 불에 다 탄 후에야 천천히 일어났는데 그가 입은 옷은 하나도 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초막을 세웠다.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리자 초막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가 얼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잔해를 헤치고 찾아보니 그는 눈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색은 붉고 윤기가 있었으며 코 고는 소리가 진동했는데 마치 여름 날 취해 잠든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가 신통함(神)을 알고 그를 따라 도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는 도가 없소.”라고 말했다. 그의 외모는 200살이 되면서 갑자기 늙었다 젊어졌다 했으며 나중에 여러 사람들과 작별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사람들은 결국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평가】
1. 수구와 수련
위 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초선은 결코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수련형식이었다. 오늘날 우리 정법 수련자 역시 어느 정도 이런 길을 걷는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음”이 목적이 아니며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고기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련 초기에 말을 많이 하면 늘 속인들 속에서 번거로운 일들이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줄이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줄곧 움직이니 억지로 참아 말을 하지 않고 안색에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칠정육욕(七情六慾)을 담담히 내려놓아야 한다. 점차 마음이 그다지 움직이지 않게 되면 하고 싶은 말도 줄어든다. 더 나아가 세간의 ‘잡담’이 싫어져서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또 무슨 할 말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초선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 경지(境界)가 시킨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인들이 함께 만나면 법리를 말하면 흥미가 생긴다. 오늘날 사부님을 도와 법을 실증함에 더욱 말에 의지해야 하니 마땅히 해야 할 말인지 아닌지 보아야 한다. 중생을 위한 말이라면 기꺼이 해야 한다.
2. 고금의 수련인을 평함
초선의 의식주행(衣食住行)에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고 겨울과 여름의 구별이 없었으며 나이와 노소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도행(道行)을 볼 수 있다. 당시 관원과 백성들은 모두 “경을 알았기 때문(懂經)”에 태수의 이름을 ‘동경(董經)’이라 했고 초선을 현인이라 부른 것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높고 낮은 평가는 그의 덕행(德行)에 달린 것이지 재산이나 권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았다. 즉 인품(人品)을 존중한 것이지 그들로부터 무슨 물질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들은 말이 없어도 숙연하게 공경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더럽고 천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옷을 잘 꾸미고 외모가 당당하며 권세가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좋고 나쁨, 옳고 그름도 가리지 못한다. 또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척이나 친구 사이에도 안면을 바꾼다. 근본을 따져보면 ‘이익(利益)’이란 두 글자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련하려 하고 오늘날 세인 중에서 뛰쳐나오기란 더욱 어렵다. 다시 말해 지금은 도덕이 패괴되었기 때문에 지금 사람이 고인보다 수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대법은 가장 간단하고 편리한 형식으로 하며 오직 당신의 이 마음만을 본다. 당신이 자신을 깨끗이 씻으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다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
3. 고금 수련의 난이도를 말하다
초선의 수련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웠다. 어려움은 2백년을 살면서 홑옷을 입고 백석만 먹으며 사계절 내내 단조롭고 고생스럽게 일하면서 말을 줄이고 더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쉬운 것은 푸왠선(副元神) 수련이라 주의식(主意識)을 봉폐하면 욕망이나 원망도 없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더위와 추위도 침범하지 못하고 호랑이나 이리도 잡아먹지 못하며 세상 일이 그를 해치지 못한다. 또 오직 자신만 수련하고 타인을 제도하지 않으니 여러 가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왠선이 수련 성취해도 주왠선(主元神)은 여전히 윤회해야 하며 진정한 “당신”은 실속 없이 바쁘고 “헛수고”한 것이다.
반면 오늘날 수련의 어려움은 주의식 수련이라 명명백백하게 자신이 고생을 겪어야 하며 짧은 시간에 높은 강도로 가슴에 사무친다. 쉬운 것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마음이 제 위치에 도달하면 병이 제거된다. 사부님의 공이 높고 우주대법이라 주왠선이 공을 얻으면 푸왠선도 공을 얻는다. 때문에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법리(法理)를 똑똑히 알 수 있고 자신을 수련하며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이에 책임 역시 큰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고금 수련의 진리를 환히 꿰뚫고 일념(一念)이 건곤(乾坤)을 결정한다는 천기를 아는데 어찌 정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중생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9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