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수련에 대한 고금의 논설 4: 손등(孫登)

이각(李覺)

【정견망】

손등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산에서 땅굴 속에 살면서 금(琴)을 타며 주역을 읽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여름이나 겨울이나 홑옷만 입었다. 몹시 추운 날에도 사람들이 그를 보니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몸을 덮었는데 머리카락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그는 겸손하고 온화하며 평화로웠고 외모가 고상했다. 사람들이 대대로 그를 보았으나 얼굴이 그대로였다. 늘 시장에 가서 구걸했고 돈이나 물건을 얻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신은 한 푼도 남기지 않았는데 그가 음식 먹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

당시 양준(楊駿)이 태부(太傅)가 되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한 후 질문을 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양준이 또 도포 한 벌을 선물했는데 이를 받아서는 문을 나서자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도포를 위아래로 자른 후 양준의 문아래 두 곳에 걸어놓고는 갈가리 찢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여겼다. 나중에야 양준이 주살될 것임을 미리 알고 일부러 도포를 이용해 점화했음을 알았다. 양준은 그를 중시해 보내주지 않았고 손등은 곧 죽었다. 양준이 관을 마련해주어 진교(振橋)에 매장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동마파(董馬坡)에서 그를 보고는 편지를 써서 낙양에 있는 벗들에 알렸다.

혜숙야(嵇叔夜 혜강)는 세속을 벗어날 뜻을 품고 일찍이 손등에게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다. 손등이 상대해주지 않았다. 숙야가 질문을 했으나 손등은 태연히 금만 탔다. 한참이 지난 후 숙야가 그대로 돌아갔다.

손등이 말했다.

“(혜숙야는) 젊고 재능이 뛰어나지만 식견이 부족하고 몸보신에 서투르니 화를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얼마 후 과연 숙야가 사형에 처해졌다. 숙야는 금을 잘 탔다. 이에 손등이 금을 타면서 노래를 만들었다. 숙야는 어려움을 알고 물러났으니 체념한 것을 탄식했다.

【평가】

양준과 혜숙야(嵇叔夜 혜강)는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수련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또 현세(現世)의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진 못했다. 비록 손등과 인연은 있었지만 결국은 각자의 운명을 따랐다.

손등이 두 사람에게 점화해주었음에도 모두 깨닫지 못했다. 도포를 갈가리 찢었어도 양준을 깨닫게 하지 못했고, 금곡(琴曲) 연주로도 혜숙야의 지식욕을 해결하게 만들기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손등이 그들에게 “근기는 좋지만 식견이 부족해 자기 몸조차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를 배운단 말인가?”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늘 크고 작은 미혹의 장애에 빠져 있다. 일단 일이 생기면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기연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도리어 피동적으로 감당하거나 심지어 하늘을 원망하며 남을 탓한다. 이래서야 어찌 구(舊) 우주 고층생명의 안배인 숙명(宿命)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또 설령 제아무리 편리하고 제아무리 큰 법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으로 배울 수는 없다. 자신을 구하지도 못하는데 또 어떻게 남을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문장에서 “내려놓지 못함”과 사람마음을 “건드림”을 볼 수 있다. 만약 양준이 명리를 내려놓을 수 있고 혜숙야가 권력을 버리고 따랐더라면 어찌 훗날에 주살당하거나 사형당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끝까지 내려놓아야 한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업만이 몸을 따라다닌다.” 이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이들이 겁난을 당한 것에서 배움과 깨달음의 관계를 볼 수 있다. 만약 손등처럼 성취되려면 층층의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수련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성취한 수련인은 천양지차다. 사람의 어리석은 견해 속에서 기어 다니며 닦지 않았기 때문에 손등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양준이나 혜숙야보다 업력이 적은 것도 아니고 또 두 사람보다 복이 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법(法)이 크고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쉽게 법을 얻을 수 있었지만 또한 잃기도 쉽다.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도 ‘자연(自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必然)’이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자연’이란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해석하지 못한 나머지 무책임하게 스스로 그럴듯하게 하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자연’이란 자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 일체 마난(魔難)이 모두 필연적이고 바로 이러하다고 인정하므로, 일종 어찌할 수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들 사람의 일면은 명백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을 얻은 그 일면이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다.”(《정진요지》〈도법〉)

우리가 만약 양준이나 혜숙야의 일화에서 이 “‘자연’이란 자체”를 보고 이 “필연”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되어 인연을 선해(善解)해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이 어려움(難)은 그렇게 큰 어려움이 아닌데 대법의 이치로 지도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50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