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德惠)
【정견망】
북송 신종(神宗) 희녕(熙寧) 연간(1068-1077) 신천규(申天規)라는 대리시승(大理寺丞)이 있었다. ‘대리시’란 고대 조정에서 최고 사법기관이며 대리시승은 이중 지방 사법 사건을 재검토해서 재심하는 일을 책임진다. 어느 날 신천규가 갑자기 조정에게 장기 휴가를 신청하며 부친을 찾겠다고 했다. 그가 내놓은 이유는 이러했다.
저 신천규는 원래 농가의 자제입니다. 부친께서는 줄곧 도를 좋아해 늘 방사들을 따르며 집을 떠나 도를 닦으러 다녔습니다. 제가 십대 때 부친은 집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장원급제하는 날 동화문(東華門) 밖에서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부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새로 과거에 급제한 우리들을 축하하셨습니다. 제가 예를 마치고 다시 고개를 들어 급히 부친을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사람들 무리 중에서 부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 제가 강남 어느 지방에 현령이 되었다가 임기가 끝나 경성으로 돌아올 때 또 부친과 길에서 상봉했습니다. 당시 부친은 강을 건너편에서 제 이름을 외쳐 부르셨습니다. 제가 부친을 발견하고 급히 강을 건너 절을 했고 마치고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또 제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저는 경성에서 오랫동안 관직을 지냈지만 그동안 부친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 조정에서 제 직무를 풀어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제가 부친을 찾을 수 있도록 장기 휴가를 주시기 바랍니다.
고대에는 효도(孝道)로 천하를 다스렸고 충신과 효자를 중시했다. 신천규의 부친은 도를 닦기 위해 집을 떠났는데 고대에는 모든 백성이 신을 믿고 수도인을 존중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신천규의 요청이 조정에게 받아 들여졌고 조정의 상하 관리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 휴가를 허락해 신천규가 사방으로 찾아다녔으나 결국에는 부친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신종 원풍(元豐 1078-1085년) 말년 남송의 학자 왕명청(王明清)의 조부가 무릉현(武陵縣) 현령을 지낼 때 도원관(桃源觀)에 유람을 간 적이 있었다. 여러 도인들 중 그중 한 사람이 말쑥하고 비범하며 말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서 우연히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뜻밖에도 신천규의 부친이라 매우 놀랐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이미 떠나버렸다. 아마 사람들에게 교란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신천규의 나이가 이미 많았으니 그 부친은 일백세가 넘었을 것이다.
낭관(郎官) 마자약(馬子約)의 말에 따르면 신천규 부친의 이름은 신교(申交)이고 자기 집과 사돈 관계라고 했다.
고대 유가(儒家)에서는 충신 효자를 중시했다. 신천규는 글을 많이 읽고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된 독서인(讀書人)으로 효도를 중시했으니 절대 자기 부친에 대해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고 거짓말로 조정의 휴가를 청하는 것이다. 또 그가 장기 휴가를 요청한 것은 아마 그의 벼슬길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며 또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 사법기관 책임자의 하나인 그가 절대 이런 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했을 리 없다. 또 이익을 도모할 만한 일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신천규가 거짓말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기록만으로 보자면 신천규의 부친은 이미 신통력을 지닌 수련인이었다. 이 자료는 수련인은 신통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입증한다. 수련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초상적인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데 수련이란 진실하고 초상적인 것이고 무신론은 착오이다.
자료출처: 왕명청의 《투할록(投轄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