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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재상 죽어서는 염라왕이 된 수나라 명장 한금호

막구(莫求)

【정견망】

한금호(韓擒虎 538-592년)는 수조(隋朝)의 저명한 장군으로 자는 ‘자통(子通)’이고 하남(河南)사람이다. 대당(大唐)을 창업한 고조 이연(李淵)의 조부 이름이 이호(李虎)이기 때문에 《수서(隋書)》에서는 ‘호(虎)’를 피휘해 ‘한금 ’(호의 자리를 빈칸으로 처리)이라 했다. 때문에 후대에 피휘 사실을 모르고 그의 이름이 원래 ‘한금’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한금호는 장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문무(文武)를 두루 겸비했다. 용맹한 무예는 혼자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었고 용병술도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들어갔다. 북주(北周) 시기 도독, 자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수조가 건립된 후 남방을 차지하고 있던 진나라를 소멸시켜 천하를 통일해야 했다. 이에 수조에서는 재능 있는 장수들을 선발해 강남에서 용병을 맡게 했는데 한금호는 노주총관(盧州總管)에 봉해졌다. 그는 부임즉시 세심하게 장차 있을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589년 정월 초하루 짙은 안개가 장강을 뒤덮었다. 한금호는 이것이 평소 얻기 힘든 도강(渡江)기회임을 알았다. 광릉(廣陵)에 주둔한 대장군 하약필(賀若弼)과 약속해 동시에 장강을 건너 진나라를 멸망시키기로 했다. 한금호는 대담하면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용병술로 불과 5백 명의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조용히 강을 건넜다. 이후 파죽지세로 진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성 아래에 이르렀다. 결국 진조(陳朝)에서 항복한 장수의 도움을 받아 한금호는 순조롭게 황궁에 들어가 진후주(陳後主)를 포로로 잡고 진조를 멸망시켜 마침내 남조의 역사를 끝내게 했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수문제는 그를 상주국(上柱國)대장군(大將軍)에 봉했다.

강남을 평정한 후 한금호는 양주(涼州)에 주둔해 돌궐(突厥)에 위엄을 떨쳐 쉽게 국경을 침입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게 했다. 국경지역 백성들은 덕분에 평화롭고 안정될 수 있었다. 592년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났고 치료하지 않고 사망하니 향년 55세였다.

한금호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두 가지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옆집에 살던 모친이 한금호를 찾아왔을 때 집 앞에 의장병들이 삼엄한 것이 마치 대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 했다. 노인이 놀라 그들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묻자 그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대왕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는 곧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는데 문득 한금호의 집문 앞으로 달려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대왕님을 뵈러 왔습니다!”

사람들이 대체 어떤 왕을 만나려하는 하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염라왕입니다!”

이에 장군부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그를 잡아다 때리려 했으나 한금호가 저지했다.

한금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살아서는 상주국이요 죽어서는 염라왕이 되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한금호가 “살아서는 상주국 죽어서는 염라왕이 된” 고사는 아주 널리 전해졌다. 가령 돈황(敦煌) 문서 중에 《한금호화본(韓擒虎話本)》이 있는데 한금호가 어떻게 음사(陰司 저승)의 주인이 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떤 사람은 아마 한금호가 사망한 후 염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너무 신기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대당의 명재상 방현령이 편찬한 정사(正史)인 《수서(隋書)・한금호전》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즉 의심할 바 없이 믿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금호의 이야기는 사람의 생명이란 결코 일생일세(一生一世)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데 사람이 죽는 것은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과는 다르며 ‘무신론’은 착오적이다. 아울러 이 기록 중에서 우리는 또 음간(陰間 저승)과 염왕 모두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인과응보 역시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73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