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노자》와 도(道) 2–왜 수도서적이 문화의 형식으로 전해 내려왔을까

왕일풍(王一豐)

【정견망】

3. 노자의 ‘도(道)’

《노자》 상편은 모두 37장으로 도(道)를 논하기 때문에 《도경(道經)》이라 하고 하편은 모두 44장인데 덕(德)을 논하기 때문에 《덕경(德經)》이라 한다. 둘을 하나로 합하면 《도덕경》이 되는데 모두 81장이고 전서(全書)가 ‘도’와 ‘덕’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후세 사람들은 이 두 글자를 하나로 합쳐서 ‘도덕(道德)’이라 하며 이는 사람의 품행 또는 사회를 가늠하는 전용명사가 되었다.

바로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노자 이후의 사람들은 모두 속인이란 이 층차에 서서 문자적으로 《노자》를 추측하고 해석했기에 도(道)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졌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원뜻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노자 2장을 보자.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악한 것이다.
모두 선한 것이 선한 줄만 알면 이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역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기 때문에 추악이란 관념이 형성되었고 천하가 모두 선(善)한 것이 선한 것만을 아는 까닭에 악한 관념이 형성된다고 이해했다. 이 때문에 분쟁이 생겨났고 결과는 도리어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글자 표면에서 자신의 것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으로 이 구절을 아주 명확하게 말했지만 원래 뜻은 바로 천하가 모두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것이 추악한 것이며 천하가 모두 선하다고 여기는 이것이 바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과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 선하지 않음을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렇게 명백하게 한 말조차 상반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대각자(大覺者)의 그런 층차와 그런 경계(境界)에서 속인사회의 이치를 보면 사실 모두 반대로 된 것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좋고 나쁨이 위에서는 다 반대로 된다.

이는 속인에서 수련으로 나아가면서, 수도(修道)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마땅히 알아야 할 상식이다. 때문에 《노자》 2장 첫머리에 이 말이 나온 것이다. 수도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바로 속인의 층차를 철저히 벗어나 고층차의 경계로 승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속인사회의 모든 기준과 인식을 다 포기해야 하며 더는 집착할 수 없다. 때문에 노자는 단번에 고층차의 이치는 속인의 이치와 다르며 도가 수도(修道)의 중점이 수진(修真)공부에 있음을 지적해 첫 시작부터 이런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노자》 제9장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채우려 하면 그만두는 것만 못하니
다듬으면서 그것을 뾰족하게 하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안에 가득차도 그것을 지킬 수 없고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긴다.
공을 이루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持而盈之,不如其已;
揣而銳之,不可長保。
金玉滿堂,莫之能守;
富貴而驕,自遺其咎。
功遂身退,天之道也”

이것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와 이익을 진일보로 설명한 것으로, 모두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고 또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직 도(道)를 닦아야만 하늘의 이치에 부합할 수 있다.

특히 ‘공성신퇴(功成身退)’는 역대로 ‘격류용퇴(激流勇退)’의 의미로 해석해왔다. 이것은 원래 뜻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격류용퇴란 무엇인가? 인생에서 일단 한바탕 싸워 명리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격류에서 용퇴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노자가 제창한 것이 전혀 아니다. 노자는 수도하는 사람은 세간의 명예와 이익 즉 소위 성공(成功) 자체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공성신퇴(功成身退)’를 글자 표면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功)’이란 수련계의 고유명사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수련인의 층차와 과위이며 동시에 또 다른 공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다. 수련인이 수련해내는 것이 바로 이것이고,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불가(佛家) 수련이든 도가(道家) 수련이든 막론하고, 수련이 깊어지고 심성(心性)이 제고되면 특정한 공간에서 사람의 정수리 위에 공(功)이 자란다. 이 공은 우주의 근본특성 ‘쩐싼런(真・善・忍)’에 동화(同化)해서 나온 것으로 동시에 사부의 도움을 받아 수련인의 ‘덕(德 덕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술한다)’이란 이런 물질을 연화해 낸 것이다.

‘공’은 일종 고에너지 물질로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데, 한 사람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수련표준에 도달하면, 곧 공이 자라난다. 이를 가리켜 ‘공성원만(功成圓滿 공이 원만하게 이뤄졌다)’이라고 하며 이는 불가에서 하는 말이다. 도가에서는 노자가 ‘공성신퇴(功成身退)’라 했다.

왜냐하면 도가수련은 성명쌍수[性命雙修 단순히 층차 고저의 공이 자랄 뿐만 아니라 심성을 수련하는 동시에 명(命)도 닦는다]이기 때문에, 번티(本體)의 전화(轉化)를 중시하며, 속인의 육신을 완전히 고에너지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로 전화시키면 곧 수련 성취한 것으로 친다. 그러므로 ‘신퇴(身退)’란 바로 이 속인의 육신이 물러나고 대신 ‘도체(道體)’로 수련 성취된 것을 말한다. 즉 ‘공성신퇴’란 공이 자라고 육신이 전화되어 ‘도(道)’의 경계에 도달한 것으로 그러므로 “공을 이루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 한 것이다.

노자는 ‘도’에서 “절성기지(絕聖棄智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림), 절인기의(絕仁棄義 인을 끊고 의를 버림), 절교기리(絕巧棄利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림)” 삼절(三絶)을 제출했는데, 역대로 이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자는 더 나아가 “절학무우(絕學無憂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라고 했고 “학문을 하면 (지식이) 날로 더해지고 도를 닦으면 날로 덜어진다. 덜어지고 또 덜어져 무위(無爲)에 이르니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노자가 수도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인정하는 “성스러움, 지혜, 인(仁), 의(義), 기교, 이익, 배움”은 모두 사(私)나 욕(欲) 또는 관념이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2장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사람의 인식은 앞서 말한 이치와 정반대로 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의 모든 이치를 버려야지만 본래의 것으로 돌아갈 수 있다.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꾸밈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므로 따를 것이 있도록 하니 바탕을 드러내고 소박함을 견지하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하라.(此三者以爲文不足,故另有所屬,見素抱樸,少私寡欲。)”

수도(修道)는 단지 사람의 가치 관념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마땅히 소박하고 순진(純真)해야 하며 무사무욕(無私無欲)해야 한다.

도를 논술한 37편에서 노자가 언급한 것은 완전히 속인사회와 상반되는 이치로, 고층차 이치의 실제 상황을 언급했다. 도를 닦으려면 반드시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는 노자가 반대되는 이치로 사람의 사유를 계발해준 것임을 모르고 그의 이치는 “소극적이며 세상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공성신퇴(功成身退)’를 아주 교활한 처세술로 곡해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수련인이 수련해 올라가려면 심성(心性)을 제고하고 승화시켜야 하는데, 만약 세인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 수도인에게도 옳다면 그럼 어떻게 제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노자는 무사(無私), 무욕(無欲), 무위(無爲)를 말한 것이다. 이 무위란 바로 인간 세상에서 집착이 없는 것으로, 남이 추구하는 것을 나는 추구하지 않고, 남이 동경하는 것을 나는 포기하려는 것이다.

노자는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다들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잃어버린 듯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다!
속인들은 또렷한데 나만 홀로 어수룩하구나.
속인들은 자세히 살피는데 나만 홀로 흐리멍덩하구나.
뭇 사람은 다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우둔하고 촌스럽구나.
나만 홀로 다른 이들과 떨어져 먹여 주는 어머니를 귀하게 여긴다.”

“眾人皆有餘,而我獨若遺。我愚人之心也哉!
俗人昭昭,我獨昏昏。
俗人察察,我獨悶悶。
眾人皆有以,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而貴食母。”

노자가 왜 자신의 어리석은 사람마음을 어수룩하고 흐리멍덩하며, 우둔하고 촌스러우며, 남과 다르지만 도를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말하는지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3. ‘도’는 우주의 궁극적인 이치가 아니다

노자는 말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

“도는 비어 있으면서 작용하니 다하지 않을 듯하고 깊으면서도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없어졌다가도 마치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지만 조물주보다는 먼저 있었으리라.(道沖,而用之或不盈,淵兮,似萬物之宗,湛兮,似或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역대 해석은 모두 ‘도(道)’가 궁극의 이치가 아님을 회피하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에서 특별히 ‘도(道) 밖에 ‘자연(自然)’이 따로 있어서 도가 이를 본받는 게 아니라, 소위 자연이란 바로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을 가리킨다는 등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층차에 한계가 있어 해석을 곡해하려는 것이다.

노자는 자신도 도(道)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며 이미 천제(天帝)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이는 노자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자 세인들에게 명확히 알려준 것으로 그가 말하는 ‘도’는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계이긴 하지만 우주에서 최고의 경계는 아니며 궁극적인 본원은 더욱 아니다. 도보다 높은 것이 무엇인지는 노자도 모른다. 이 역시 만고(萬古)의 수수께끼인데 무엇이 ‘도(道)’ 보다 높은 층차인가? ‘도’는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도(道)’를 창조했는가?

오직 ‘파룬따파(法輪大法)’만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즉,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쩐싼런(真善忍)’이야말로 ‘도(道)’의 본원이고, 물질・인체・생명・우주 등 일체는 단지 물질의 존재형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모두 ‘쩐싼런(真善忍)’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펼쳐놓고 말하면 매우 복잡한데, 도가・불가 모두 자신의 각도에서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은 모두 일정한 층차에서 우주대법 ‘쩐싼런(真善忍)’에 대한 구체적인 체현을 논술한 것이다. 하지만 극히 높은 차원에 이르면 오직 ‘쩐싼런(真善忍)’ 세 글자로 개괄할 수 있으며, ‘도(道)’란 바로 우주특성 ‘쩐싼런(真善忍)’이 일정한 층차에서 표현된 형식의 일종이다.

명백히 말하면 노자의 이치는 우리 이 은하계(銀河系) 범위 내의 이치로 이 범위를 뛰어넘으면 노자의 이치가 꼭 정확한 것은 아니다.

노자는 또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란 뜻. ‘반동’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을 말했는데 도(道)는 마땅히 항상 고정되어 움직이지 말아야 하지만 사물이 만약 그 반면으로 간다면 ‘도’는 곧 움직여야 한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쩐싼런(真善忍)’이 모든 것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주 중에 존재하는 법칙으로, 사물이 반면으로 나아갈 때면 그 훼멸을 가속화할 수 있는데 도는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또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듬성듬성하지만 새어나가는 법이 없다(天網恢恢,疏而不失)”고 말한다. 이것은 하늘이 사람을 징벌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사만물(萬事萬物)이 모두 하늘의 이치에 따라 운행하고 있고 만사만물의 본원이 바로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그를 어기면 당연히 화(禍)를 자초하고 죽음을 자초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6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