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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도(道) 3–“상덕부덕(上德不德)”이란 무엇인가

왕일풍(王一豐)

【정견망】

고대에는 오직 간단한 하나의 ‘왕법(王法’)으로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늠했는데 그것이 바로 ‘덕(德)’이란 글자다.

“이 사람은 덕(德)이 없구나!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라고 하면 곧 목을 잘랐는데 그가 더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덕(德)’이란 한 글자로 풍속을 단속했고 사람이 생존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했다. 덕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덕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은 중화민족의 역사, 사회, 윤리, 문화 체계 속에 뿌리 내린 것으로 그저 간단하고 표면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계가 아니다. 중국문화는 근본적으로 수련(修煉)문화이기 때문에 ‘덕’은 당연히 수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노자》를 읽으면서 ‘수련(修煉)’이란 이 주제를 내려놓고 이해하거나 주석한다면, 이는 완전히 신발 신고 발을 긁거나 장님이 길을 안내하는 겪이다.

먼저 덕편의 첫장인 38장을 보자.

덕보다 높은 것(도)은 덕으로 가늠할 수 없으나 덕이 있어야 한다.
덕보다 낮은 것은 덕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덕을 잃으면 덕이 없어진다.
덕보다 높으면 함이 없으며 한다고 여기는 것조차 없다.
덕보다 낮으면 무위로 해도 유위로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도를 잃고 나서야 덕이 있고
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이 있으며
인을 잃고 나서야 의가 있고
의를 잃고 나서야 예가 있게 된다.
예란 충심과 믿음이 옅어진 것이며 혼란의 시작이다.

上德不德,是以有德;
下德不失德,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失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

예부터 지금까지 모두 여기서 말하는 “상덕(上德)” “하덕(下德)”을 글자 표면적인 함의에서만 주석하고 이해해왔다. 즉, 상덕을 지닌 군주(君主)는 덕이 커서 위가 없다(德大無上)는 등등이다.

하지만 노자는 각자(覺者)의 입장에서, 즉 ‘도(道)’의 층차에 서서 세인들에게 덕을 논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덕부덕(上德不德)”은 덕 위에는 보다 높은 경계인 “도(道)”가 있으며 그것은 덕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인식하면 곧 사람이 도를 얻고 수도해서 도를 성취한 후, 그 자신의 덕은 이미 고층차의 고에너지 물질인 ‘공(功)’으로 완전히 연화(演化)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수도하려는 사람 역시 반드시 대덕지사(大德之士)라야만 도가(道家) 사부에 의해 도제로 선택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층차에 도달하려면 “덕이 있어야(是以有德)” 한다. 덕 위의 층차인 도(道)는 더 이상 ‘덕’이란 표준으로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道)는 덕(德)의 승화이며 덕이란 도의 물질 기초이지만, 그래도 도보다 한 층 아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덕부실덕(下德不失德)”이란 도(道) 이하 층차에서는 가늠하는 표준이 곧 덕이 된다. “덕을 잃지 않음”이 바로 그것의 가장 높은 표준이 되는데 덕(德)이란 인류 이 한 층차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그것을 잃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없어진다(是以無德)”고 한 것이다.

덕(德)이란 소중하고 또 아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람의 생생세세(生生世世) 생명 중에 존재한다. 세간에서 사람의 모든 득실(得失 얻음과 잃음), 노(老), 병(病), 사(死), 복(福), 녹(祿), 수명, 행운과 불행은 모두 자신이 지닌 덕의 많고 적음에 의해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다.

수련자에게 있어 이 덕은 또 수련의 기초가 된다. 덕이 많으면 오성(悟性)이 곧 좋은데 그럼 사부가 당신을 대신해 이 물질을 ‘공(功)’으로 연화시켜 점차적으로 위로 수련할 수 있게 한다. 도가에서 역대로 사부가 도제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 사람의 근기가 좋은지, 즉 지닌 덕이 얼마나 되는지 본 것으로, 덕이 많아야지만 수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보다 높으면 함이 없으며 한다고 여기는 것조차 없다(上德無爲而無以爲)”는 것은 도(道)의 경계에서는 소위 말하는 하고 하지 않음이 없어서 심지어 사람들이 무위라고 여기는 것조차 없기 때문이다.

“덕보다 낮으면 무위로 해도 유위로 하는 것이다.(下德無爲而有爲之)”라는 것은 사람 이 층차에서는 덕을 지키며 덕을 잃지 않는 것을 무위라 할 수 있지만 덕을 지키는 자체가 바로 일종 자신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에 도(道)와 상대해서 말하자면 여전 일종 유위의 상태라서 대자재(大自在)와 함과 하지 않음을 말할 나위가 없는 도(道)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노자는 바로 이어서 진일보로

“그러므로 도를 잃고 나서야 덕이 있고
덕을 잃고 나서야 인이 있으며
인을 잃고 나서야 의가 있고
의를 잃고 나서야 예가 있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즉, 위에서 아래까지 층차에 따라 도(道), 덕(德), 인(仁), 의(義), 예(禮)가 되는 것이다. 노자 시대에 예(禮)는 이미 도(道)와는 거리가 아주 멀게 여겨졌지만,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법률로 사람을 단속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덕경(德經)의 첫 장이 되는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도(道)란 덕(德)의 범주를 초월한 것으로 도는 덕(德)의 승화(華化)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수련이란 예(禮)·의(義)·인(仁)·덕(德)·도(道)라는 이런 과정을 따라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의규범을 지키는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의로운 인물(義士)이 되고 어진 사람(仁人)이 되며, 대덕지사(大德之士)가 되어 마지막에 도를 얻으면 사람의 경계를 초월한 고층 생명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다. 명백히 말하자면 이 과정 자체가 바로 사람을 벗어나 위로 승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덕(德)이란 도를 얻고, 도를 닦으며, 도를 성취하는 기초가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이 된 이유 자체가 높은 경계에서 도(道)를 잃은 후 사람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래 있었던 높은 경계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말해 반본귀진(返本歸真)하려면 수련해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덕은 또 수련인의 기초가 되는데 왜냐하면 덕을 ‘공’으로 전화하는 것은 사부가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경 39장부터 81장까지 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왜 덕을 지켜야 하며,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즉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 하는 이 한 가닥의 주선(主線)을 둘러싸고 전개했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天下之至柔,馳騁天下之至堅)”

“강대한 것이 아래에 처하고 유약한 것이 위에 처한다.(強大處下,柔弱處上)”

이것은 자연의 표현인데 물방울이 돌을 뚫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드러운 것은 덕을 더 잘 지킬 수 있고, 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더욱 오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또 이어서 말한다.

“명성과 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친한가? 몸과 재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얻음과 잃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해로운가? 이런 까닭으로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손해 보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이 단락의 논술은 담긴 뜻이 아주 깊은데, 그는 인간의 치명적인 집착인 명성, 재물, 즉 명리(名利)야말로 생명의 큰 적이며, 또한 덕을 지키는 데 큰 금기라고 지적했다. 왜 그런가? 노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인간 세상에서는 명예든 이익이든, 모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인 덕(德)과 교환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추구하고 욕망이 너무 커서, 자신의 것에 속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면 곧 덕을 잃는다. 만약 욕심이 너무 많아 만족을 모르고 덕을 잃은 것이 너무 많아지면 곧 생명의 위험이 따르게 되는데 그러면 재앙과 병이 잇따라 닥친다. 그래서 노자는 사람들에게 만족함을 알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고 가르친 것이다.

인간은 이런 덕의 전화(轉化)를 볼 수 없지만 우주 중에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균형 잡는 절대적인 이치가 있으니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고 얻으면 곧 잃어야 한다.”(《전법륜》)는 것이다.

노자는 또 “화(禍)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허물은 얻으려고 욕심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禍莫大於不知足,咎莫大於欲得)”라고 했다.

“만족함을 알면 오래 즐거울 수 있다(知足長樂)”는 것은 중국인들의 인생관으로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중국인의 가치관을 유지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가정을 화목하게 해왔다.

노자는 말한다.

“대도는 아주 평탄하나 백성들은 지름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아주 깨끗하지만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창고는 텅 비어 있는데, 화려한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찼으며 음식을 물리게 먹고 재물은 남아돈다. 이것을 도과(盜誇 도적 두목)라 하니 도가 아니로다.”

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도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일시적인 허화(虛華)를 나열하면서 이런 것들을 멀리해야 하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로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 함을 경고했다.

“도가 높고 덕이 귀하지만 누구도 명령하지 않으며 늘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道之尊,德之貴,夫莫之命而常自然)”

도를 존중하고 덕을 지키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노자 사상의 정화(精華)다. 그는 생생한 비유, 간결한 문자로 심오한 철리를 설득력 있고 감칠맛 나게 표현해 중국 도가문화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해 중국 본토의 정통문화(正統文化)가 되어 역대 중국 사회가 덕을 중시하고, 덕을 닦으며, 덕으로 사람을 가늠하며, 왕(王)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촉성했다.

이것이 아마 한민족(漢民族)이 아무리 강대할 때라도 종래 무력으로 주변국을 침탈하지 않게 한 깊은 문화적 기초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전쟁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고, 강자(强者) 역시 살생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릇 병기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며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해서 그것을 사용하지만 초연함과 담담함을 최상으로 삼는다. 승리해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찬미하는 사람은 바로 사람 죽이길 즐기는 사람이다. 사람 죽이길 즐기는 사람은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죽은 사람이 많으면 비통한 마음으로 임하고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상례(喪禮 흉한 예)에 따라 처리한다.”

이 단락은 노자가 부득이해서 하게 된 전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전쟁은 천상(天象)의 변화라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할 때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살인을 즐겨선 안 된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라도 경축하지 않으며 상례(喪禮)로 처리하는데 이것은 일종 대단한 덕을 지킴이다. 왜냐하면 살인이란 정말로 큰 덕을 잃고 큰 업을 짓기 때문이다.

노자는 또 말한다.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죽음으로 그들을 벌벌 떨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이 늘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사악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어 내가 그를 잡아 죽인들 누가 감히 하겠는가? 늘 죽음을 집행하는 이가 있어 죽이는데, 죽음을 집행하는 이의 대리인이 죽인다면 이것을 일러 뛰어난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깎는다고 말한다. 뛰어난 목수 대신 나무를 깎으면서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설사 통치자라 해도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혹한 정치와 형벌로는 사람을 억압할 수 있을 뿐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지 사이에는 죽이는 일을 담당하는 이가 있는데 암암리에 정해진 운명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스스로 법을 집행해 사람을 죽인 이가 스스로 다치지 않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것은 수련의 관점에서, 진일보로 전쟁과 혹형에서부터 살생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살생이란 덕을 지키는 것을 위배한 것이다.

노자는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바이며 복이란 화가 엎드려 있는 바이니 누가 그 궁극을 알겠는가?(禍兮福之所倚,福兮禍之所伏,孰知甚極?)”라고 했다.

이것은 줄곧 일종의 인생 철리(哲理)로 이해되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탄식하게 했다. 물론 속인은 정말 결말을 모른다. 사람은 미혹속에서 무지하게 업을 지으며 흐리멍덩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할 것은 노자는 자신의 책에서 한 번도 업력(業力)의 문제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여러 곳에서 간접적으로 덕과 업력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 둘은 서로 전화할 수 있음을 말했다. 즉 덕(德)은 사람을 건강하고 행복하며 조화롭게 할 수 있지만 업력은 불행, 병과 액운, 어려움을 초래하는 근원이 된다.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바이며 복이란 화가 엎드려 있는 바”란 덕과 업력이 서로 소장하며 전환하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 덕을 지키면서 덕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수도인(修道人)은 마땅히 그 자연스러움에 따라 덕을 지키고 무위(無爲)해야 한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말한다.

“하늘 일을 없게 하고 일거리를 없애는 것을 일로 삼고 맛을 없애는 것을 참맛으로 삼는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기고 적은 것을 많게 여기며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爲無爲,事無事,味無味,大小多少,報怨以德)”

“선한 사람을 내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내가 선하게 대한다.(善者吾善之,不善者吾亦善之)”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그것들을 지녀 간직하니 첫째는 인자함이고, 둘째는 검소함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보다 앞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我有三寶,持而保之。一曰慈,二曰儉,三曰不敢爲天下先)”

노자는 또 말했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잘 대답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며 느긋하면서도 잘 도모한다. 하늘 그물은 넓고 넓어 듬성듬성하면서도 새어나가는 법이 없다.(天之道,不爭而善勝,不言而善應,不召而自來,姍然而善謀,天網恢恢,疏而不失)”

이런 것들은 모두 중화민족 전통의 정화이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찌듯이 한다. 도로 천하에 군림하면 그 귀신도 신령하지 못하니….(治大國,若烹小鮮。以道蒞天下,其鬼不神……)”

이 구절은 아주 자주 인용되지만 또 자주 오해되거나 남용되는 말이다.

과거에는 이 구절을 대부분 이렇게 이해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찌듯이 해야 하는데 작은 생선을 찔 때는 뒤집어선 안된다. 너무 자주 뒤집으면 생선이 망가진다. 마찬가지로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정령(政令)이 너무 번잡하거나 가혹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라가 혼란해진다.”

이는 완전히 글자표면의 뜻만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해서 해석한 것이다.

노자는 사실 각자(覺者)의 높은 층차에서 이 단락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도(道)로 천하에 군림하면”에서 도[道 또는 한 신(神)이니 한 부처(佛)일 수 있다]라는 고급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찌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층차가 높아 일체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층차가 높기 때문에 천하 백성들이 덕(德)을 지키며 도(道)를 존중하게 할 수 있는데 이야말로 진정한 통치자로서 천하에 덕(德)을 닦는 것이다!

(완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9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