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진(李道真)
【정견망】
7. 도가치국(道家治國)
도가치국은 주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의거한다. 《도덕경》은 또 《노자》 내지 《오천언(五千言)》으로도 불리는데 춘추시기 대도진인(大道真人) 노자의 저술이며 말하자면 도가의 성경(聖經)에 해당한다. 이 책은 내함이 대단히 박대(博大)해서 책을 보고 이해하려면 완전히 독자의 오성(悟性)과 근기에 의지해야만 하는데 부동한 층차에 따라서 내함을 보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도덕경》에서 말한 것은 ‘치국(治國)의 도(道)’로 사람들더러 어떻게 제왕이 되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지 가르친다. 하지만 보다 높은 층차에 서서 본다면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 진(真)을 닦아 신선으로 성취될 수 있는가 하는 대도진리(大道真理)이며 사람더러 반본귀진(返本歸真)해서 도를 얻고 신선이 되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치국의 기점에서 거칠게나마 《도덕경》을 한번 해독해 도가치국에 담긴 의미를 분명히 말해보고자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만 알면 이것은 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두 선한 것이 선한 줄만 알면 그것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이 서로 드러내고,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며, 곡조(음악)와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여기서는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하며 일체(一體)가 되어 함께 나오기 때문에 단독으로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 부분은 상생상극(相生相克)이란 영원한 이치를 보여주는데 그 어떤 새로운 사물이 생길 때면 반드시 동시에 정반(正反) 양 방면의 요소가 생겨나고 정반 양방면의 영향을 생성한다. 때문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요소가 서로 대비하고 참조하며 상호 보충해야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때문에 성인은 이 도리를 잘 알아 무위의 태도로 세상일을 대하며 무언의 방식으로 만물을 교화(敎化)하고 만물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하면서 뭐라 하지 않으며 만물을 길러도 사사로이 소유하지 않고 만물을 베풀어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뤄도 스스로 머물지 않는다. 때문에 만사(萬事)에 머무르지 않기에 영원불멸(永遠不滅)할 수 있다.”[25]
[역주: 필자는 여기서 《도덕경》 원문을 직역한 게 아니라 원문을 근거로 해서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자유롭게 전개하고 있다. 이하 내용도 마찬가지.]
여기서 노자는 상생상극의 이치를 말하는데 그 어떤 사물이 만들어질 때 반드시 정반(正反)이 동시에 나오며 어느 하나만 단독으로 고립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마치 추악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존재할 수 없으며 위가 없으면 아래가 존재할 수 없고 높은 것이 없으면 낮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반드시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
노자는 또 말한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듯하며
평평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최상의 덕은 골짜기 같으며
매우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으며
크게 모가 난 것은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뤄지며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26]
그리 적당하진 않지만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세상에 일부 사람들이 외눈으로 태어났다면 그럼 이들은 분명 기형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이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부터 다 눈이 하나뿐이고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면 그럼 외눈이 정상적인 현상이 된다. 그러므로 형체가 드러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어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다면 도리어 그가 기형이고 비정상으로 여겨진다.
이런 예들이 표현하려는 의미는 바로 앞에서 말한 “큰 형상은 형체가 없고(大象無形)”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道隱無名)”는 것이다.
도(道)가 만물을 낳을 때는 조화롭고 완벽한 것으로 만물에 이롭기만 할 뿐 해로움이란 하나도 없다. 마치 노자가 말한 “하늘의 도는 이로움만 있고 해침이 없다(天之道,利而不害)”는 것과 같다. 자연히 만물의 시초(始初), 생명의 선천(先天)은 모두 도(道)속에 있어서 모두 이렇게 완벽한 기제 속에서 조화롭게 운행했고 만물이 서로 이롭게 했을 뿐 그 어떤 해로운 요소도 생겨나지 않았다. 이때는 부면(負面)요소가 없기 때문에 정면(正面)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도(道)다. 다시 말해 노자가 말하는 ‘도은무명(道隱無名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음)’이다.
가령 생명이 도(道)에서 생겨날 때를 비유해보자. 천성(天性) 속에 악(惡)이 없지만 바로 악이 없기 때문에 선(善)도 없는 것으로 일체는 다 도(道)속에서 운행하기에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자연히 조화롭게 운행한다.
생명이 대도(大道)에서 벗어나면 각종 사심(私心)과 욕망(慾望)이 생겨나는데 서서히 타락해서 악(惡)이 생긴 후에야 선(善)도 동시에 생겨나고 대도(大道) 속에서 분리되어 나타난다. 이는 마치 천하가 대도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덕(德)이 생겨나고, 속임수가 생기자 곧 성신(誠信)이 생겨나고 쟁투(爭鬪)가 생겨나면서 겸양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善)이 생겼을 때는 악(惡)이 이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고 생명이 이미 대도에서 벗어났음을 설명한다. 같은 이치로 효자(孝慈 효도와 자애)가 생겨났을 때는 가족이 이미 화목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며 충신(忠臣)이 생겨났을 때는 나라에 이미 혼란한 현상이 생겨났음을 설명한다.
이에 노자는 또 말한다.
“대도(大道)가 사라진 후 인(仁)과 의(義)가 생겨났고, 백성들이 지혜로워지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와 자애(孝慈)가 생겨났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타났다.”[27]
그러므로 인의, 지혜, 효자(孝慈), 충정(忠貞) 등 인위적은 것들은 대도(大道)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다. 이것은 생명이 대도에서 벗어나 조화가 깨지면서 부면(負面)적이고 해로운 요소와 영향이 만들어진 후 후천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자는 또 말한다.
“도(道)를 잃은 후에야 덕(德)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야 인(仁)이 있으며 인을 잃은 후에야 의(義)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야 예(禮)가 있다.”[28]
도(道)를 잃은 후 덕이 나오고 덕(德)을 잃은 후 인(仁)이 나오고 인을 잃은 후 의(義)가 나오며 의를 잃은 후 예(禮)가 나오는 이것이 바로 생명이 도(道)에서 한걸음씩 벗어나고 한걸음씩 추락한 과정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내려가면 최종적으로 반드시 훼멸(毁滅)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는 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구우주의 만사만물은 성주괴멸(成住壞滅)이란 큰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훼멸로 나아가는 이 숙명에서 벗어나려면 생명이 반드시 되돌아가야 하며, 반드시 되돌아 걸어가야지 이런 추세를 따라 가선 안 된다. 다시 말해 앞서 노자가 말한 것처럼 “나아가는 도는 마치 물러서는 것 같다.(進道若退)”
때문에 노자는 인의(仁義)를 제창하지 않았고 지혜・효자(孝慈)・충정(忠貞) 등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일체 후천적이고 유위적인 것을 제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유형적인 것들은 마치 후천적으로 만든 제방과 같아서 비록 어느 정도 생명 표면의 타락을 저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한 층 한 층 간격을 형성해 생명본질의 회귀를 저애하기 때문이다.
대도(大道)로 되돌아가려면 반드시 되돌아 걸어가야 하는데 반드시 후천에 형성된 일체 인위적이고 유형적인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깨끗하고 깨끗하게 버려서 영아(嬰兒)의 순진무사(純真無邪)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이때에야 비로소 대도(大道) 속으로 회귀(回歸)할 수 있다.
대도로 회귀한 후 성신(誠信)을 모르지만 사람이 말을 하면 곧 믿고 말을 하지 않아도 믿는다. 효자(孝慈)를 말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화목해서 천하가 아름다워진다. 인의를 말하지 않아도 사람마다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간격이 없어진다. 대도로 회귀하면 천하에 악(惡)이 없어지고 또한 선이 있는 것도 모르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선(善)하다. 이때의 선은 선(善)이라 부르지 않는데 왜냐하면 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선(善)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억지로 부르는 것으로 이를 일러 ‘무위(無爲)’라 할 수 있다.
무위의 진정한 내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요소 이후의 행동을 제거한 것으로 생명이 도(道)로 회귀한 후 자연스레 본성에 따른 행위이자 순진무사(純真無邪)한 행위로 사욕이나 집착이 없다. 그러므로 노자는 또 “도는 늘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으며(道常無為而無不為)”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도와주지만 함부로 하지 않는다(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為)”고 했다.
선(善)은 일종의 미덕(美德)이지만 인위적으로 미덕을 제창할 때면 그것은 곧 흔적이 생기고 선이란 이름이 생긴다. 그러므로 동시에 반드시 악(惡)이 수반되는데 이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결정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물체가 위(上)에 있다고 말하려면 그럼 반드시 그것 아래(下)에도 물체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위라고 판단할 수 없다. 만약 그것 아래에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위란 개념도 동시에 사라지는데 비록 그 물체가 여전히 그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이 일종 인위적으로 세워진 미덕이라면 반드시 악(惡)과 공존한다. 완전히 악의 요소를 없애려 한다면 반드시 선을 무위(無爲)의 선(善)으로 변화시켜 도(道)속에 숨겨야 한다. 도속에서 자연스런 본성에 따라 하면 이때 선은 곧 자취가 사라져 무위의 선으로 변화하고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어진다. 때문에 상생상극에서 뛰쳐나와 악이 생기기 않게 할 수 있고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하나의 해로움도 없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순선(純善)・지선(至善)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
“가장 큰 덕(德)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도에 돌아옴이다.”[29]
노자는 또 말한다.
“최상의 덕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소리 없이 사물을 적셔주고 종래로 의도적으로 덕행(德行)을 드러내지 않아 사람들은 그것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덕이다. 최하의 덕은 형체도 있고 이름도 있어서 비록 늘 덕행을 드러내고 덕을 잃지 않음을 표현해내지만 이는 진정한 덕이 아니다.”[30]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최상의 덕(上德)이란 도속에 되돌아온 무위의 덕을 말하며, 그 어떤 후천적인 사아(私我)의 요소가 끼어있지 않고 그 어떤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도 지니지 않는다. 때문에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으며 덕이란 이름도 없기 때문에 악이 어디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악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진덕(真德)・지덕(至德)・상덕(上德)・순덕(純德)이 된다.
후천적으로 인위적으로 제창해 수립된 덕은 그 이름과 형체가 생겨, 인위적인 형식을 지닌 유형의 물건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에 빠지기 때문에 정부(正負)가 일체가 되어 같이 나오기 때문에 동시에 악이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선악(善惡) 양자는 곧 끊임없이 양극이 분화하는 가운데 서로 의존하면서 상생상극한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수립된 유형의 덕은 비록 어느 정도 인류의 타락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유형적인 저애를 만들어 생명이 대도로 회귀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악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유형의 덕을 제거해 덕을 도(道)로 되돌아가게 하고 무형(無形)으로 변화시켜야지만 악이 생겨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총명과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되며 인의를 버리면 백성은 효자(孝慈 효성과 자애)를 회복하게 된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진다. 이렇게 버려진 인위적인 거짓과 꾸밈은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백성들이 순박한 본질과 무사(無邪)한 천성으로 돌아가게 하면 사심과 욕망이 줄어들어 이런 가식적인 거짓말에서 멀어지므로 모든 우환 역시 근절할 수 있다.”[31]
노자는 또 말한다.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더불어 다툴 수 없다.(夫唯不爭,故天下莫能與之爭)”
상생상극의 이치에 따르면 만약 정(正)의 요소가 도로 돌아가서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어지는 무위에 도달해 움직일 수 있다면 부(負)의 요소 역시 저절로 해체되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인위적인 수단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일을 해결할 수 없고 단지 상황이 더욱 악화될 뿐인데, 정부(正負) 요소의 양극 분화가 갈수록 더 심각해져서 갈수록 더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상생상극의 이치는 이렇게 하늘처럼 거대한 함정이라 일체 집착과 유위(有爲)의 것들은 모두 벗어날 수 없고 그 속에 빠진 후 발버둥칠수록 더 조여져 최후에는 시달리다 죽는다. 오직 완전히 물러나와 도(道)로 되돌아와 무형(無形)이 되어야지만 뛰쳐나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도(大道)의 지혜다.
노자는 말한다.
“금기(禁忌)가 많아질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수단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더 혼란해지며 교묘함이 많아질수록 사도(邪道)가 더욱 성행한다. 법률제도가 번잡하고 가혹할수록 도적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무위의 다스림을 시행하는 것만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도(正道)다.”[33]
무위의 다스림을 시행하는 전제는 백성을 인도해 도(道)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지 못하면 무위의 다스림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백성이 도로 되돌아오도록 인도할 수 있는가? 만약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수단에 의지한다면 단지 표면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 상생상극의 이치 속에서 발버둥칠수록 더욱 조여들어 대도(大道)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도가치국(道家治國)은 술(術)을 사용하지 않고 기(器)도 사용하지 않는데, 그 어떤 술과 기도 모두 헛수고이고 모두 장차 천하를 상생상극의 이치 속에 빠지게 만들어 발더둥칠수록 더욱 조여들게 할 뿐이다.
이에 노자는 말한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아야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으며 욕심낼만한 것을 보이지 않아야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다스림은 그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늘 백성이 알고자 하는 것도 없게 하고 하고자 하는 것도 없게 한다.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감히 하지 못하게 한다. 만사에 구함이 없어도 저절로 얻는다면 천하에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노자는 또 말한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잡착해서 내려놓지 못하면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 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는 일이 없으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34]
“옛날에 도로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백성들이 똑똑하고 지혜롭게 하지 않았고 대신 단순하고 돈후(敦厚)하게 했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기교와 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교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림은 나라를 망치는 적이며 기교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35]
그러므로 도가치국은 줄이는 감법(減法)을 하는 것으로 인류의 타락과정을 끊임없이 뒤로 되돌리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심(私心)・욕망・집착・사념(邪念) 등의 오염요소를 끊임없이 제거해 사람이 반본귀진(返本歸真)하게 만들어 생명을 선천적이고 순진무사(純真無邪)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때 천하를 다스림은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일체가 다 도(道)속에 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모든 것이 다 완벽하고 조화롭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학문을 하면 끊임없이 누적되어 학식이 날마다 늘어나지만 도(道)를 닦으면 덜어져서 사심・욕망・집착 등이 날마다 줄어든다. 덜어지고 또 덜어져 무위(無爲)에 이르면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모든 일이 도(道)속에서 자연히 이뤄지고 완벽한 조화에 도달한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마땅히 무위로 다스려야 하며 백성을 교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하는데 백성을 교란하면 천하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36]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가장 뛰어난 임금은 천하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모른다.
그 다음 경지의 임금은 천하 백성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 임금은 천하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 임금은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만약 믿음이 부족하면 믿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 좋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면 느긋하게 저절로 얻고 말 없는 가르침을 실행하기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주 드물고 일이 이뤄진 후에도 백성들이 모두 이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37]
이것이 바로 무위의 다스림 하에서 민풍(民風)과 민덕(民德)의 진실한 전개로 천하가 행복하고 조화로워 근심과 걱정이 없고 마치 임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노자는 말한다.
“큰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治大國,若烹小鮮)”
만약 진정으로 노자가 말한 이런 도리를 안다면 그럼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진정 이런 지혜가 있어 진정으로 해낼 수 있겠는가?
노자는 《도덕경》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적인 치국 모델을 만들었다. 이 역시 백성이 무위의 다스림 하에서 생활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 소국과민의 이상적인 생활상태 속에서 나라는 모두 아주 작고 심지어 하나의 촌락만 필요한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이웃나라의 닭이나 개가 우는 소리도 서로 보거나 들을 수 있다.
백성들은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겁게 여긴다. 사는데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어서 즐겁고 풍족하며 아무런 다툼이나 속임수도 없다. 그러므로 군대나 정부 등 인위적인 기구는 모두 쓸모가 없어서 폐기할 수 있다. 사람들의 생활이 풍족하니 생계・명리・욕망 등을 위해 과로하거나 고향을 등질 필요도 없고 배와 수레가 있어도 거의 아무런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저절로 얻음이 있고 아주 간단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니 많은 인위적인 기물(器物)이 다 쓸 데가 없고 불필요한 생활 자료들이 모두 군더더기와 부담이 되니 다 버릴 수 있다. 심지어 간단하게 결승기사(結繩記事)하는 상태로 돌아가 생활할 수 있다. 이 이상적인 나라에서는 비록 이웃 나라가 서로 마주 보고 닭이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지라도 누구도 이런 조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파괴하려 하지 않고 사람마다 모두 편안히 생업에 종사한다. 이웃 나라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으니 작은 나라들이 모두 세상 밖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다. [38]
노자가 표현한 이 장면은 마치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천국이나 황제(黃帝)가 놀러갔다는 화서신국(華胥神國) 내지는 도연명의 무릉도원 등에 나타난 적이 있다. 삼황(三皇)시기에도 나타난 적이 있고 오제(五帝)시기에도 나타난 적이 있다.
많은 중국인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무릉도원에 관한 꿈을 품고 세상 밖 무릉도원의 편안하고 조용하며 간단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을 깊이 동경해왔다. 노자 치국의 도는 바로 이런 꿈을 새롭게 만든 것이자 현실세계와 분명히 연결시키고 거기에 도달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수천 년간 수많은 화하(華夏) 자녀들이 세간의 명리정구(名利情仇 명예 이익 정 원수) 및 끊임없는 전쟁과 기만에 질려 마음속의 전원(田園)으로 은퇴해 조용히 자신의 도화원(桃花源)을 만드는 것을 선택해 왔다. 이것이 바로 중화역사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은사(隱士)문화로 무수한 중화 자녀들이 속세의 근심과 고난 속에서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왔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편안함인데 인류의 심령(心靈) 깊은 곳의 행복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추구를 풀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다스림이 인류 마음속에 남긴 각인이다.
인류 도덕이 타락함에 따라 일출법칙(溢出法則)에 따라 인류 내층(內層)의 법칙으로 인류를 단속할 수 없게 될 때면 한 층 바깥층에서 인류에 대한 외재적이고 인위적인 단속을 수립할 필요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내층의 법칙은 갈수록 약해지고 외층법칙은 상응해서 강력해지는데 인류의 외재환경이 복잡하고 극단적이 될수록 사람에게 강제로 가해지는 외부압력과 속박 역시 갈수록 무거워진다.
도가치국은 이 상황에서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해 끊임없이 내층법칙을 강화하고 되돌아가서 외층법칙을 줄이거나 제거해 인류로 하여금 반본귀진(返本歸真)하게 만들고 선천의 순진한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도(道)로 되돌아가게 한다. 도가치국은 바로 뺄셈(減法)으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각종 사심과 욕망을 끊임없이 제거하고 각종 인위적인 수단과 기교를 버려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대도(大道)로 되돌아가게 한다. 인류는 이 과정 속에서 서서히 모든 외재적인 보따리와 압력을 내려놓게 되는데 갈수록 더 가벼워지고 갈수록 더 간단하고 행복해지며 갈수록 더 즐겁고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공산당의 치국방식은 이와 정반대가 되는데 그것은 도가치국과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은 끊임없이 인류의 도덕과 양지(良知)를 패괴(敗壞)시키고 인류의 바른 신앙을 훼멸시켜 내층법칙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그런 후 끊임없이 외층법칙을 강화해 강력하고 무거운 국가기구로 독재(獨裁)와 전제(專制)를 실행하며 인성(人性)을 말살하는 공포와 폭력수단으로 백성들을 노예화 하고 길들여 모든 사람의 사상과 언행을 통제하는데, 이를 통해 백성들을 인성이 없는 도구와 기구로 전락시킨다.
그것은 일률적으로 외재적인 물질추구를 강조하면서 물질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생산력(生産力)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게 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욕망과 자아단속을 방종하고, 전통도덕을 미친 듯이 훼멸시켜 외재적인 물질과 육욕(肉慾)추구를 백성들의 유일한 정신적인 지주로 삼게 했다. 공허하고 창백해진 중국인들의 영혼을 완전히 외재적인 물질향수에 기탁해 생존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한 모든 것은 생명을 선천 본성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 자아훼멸이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이끄는 것이다.
비록 공산당이 극력 외재적인 물질추구를 강조하고 생산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공산당 국가의 물질생활은 모두 극히 가난하고 백성들은 소나 말처럼 살아가는데 그것은 백성들에게 풍족한 생활조차 가져다주지 못했다.
공산당이 나라를 다스린 성과를 돌아보면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세계에서 저명한 예의의 나라를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고” “모든 것은 다 돈을 위한 것”이란 금수(禽獸)의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지금 중국인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속이고 빼앗고 죽이는데 온갖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다. 독 분유, 가짜 식용유, 발암색소, 가짜 백신, 가짜 계란에 수질오염, 토지오염, 강제철거, 부실공사, 아동외설, 강간, 강제장기적출 등등. 이것은 분명 인간지옥이다.
불쌍한 중국인들은 늘 제방을 높여 자기 주변 사람으로부터 오는 상처를 방어하는 동시에 또 고강도의 생존압력, 낮은 수입, 치열한 경쟁, 높은 방세, 치열한 경쟁, 의료비와 교육비 폭등 등 매 사람마다 모두 등에 몇 개의 무거운 산을 짊어진 것처럼 숨을 쉬기조차 곤란할 지경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자살과 정신과 질환이 전례 없이 늘어났다.
지금 중국인들에게 한 가지 보편적인 감수라면 바로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것으로 행복이 어떤 것인지 모르며 마비되어 대중을 따라 쟁투한다. 사람마다 모두 피로하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생을 겪는데 심지어 사는 것이 개만도 못하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못하는데 일단 멈추면 이 미친 사회에 깔려 죽게 된다. 설마 이것이 인류가 추구하고 동경하던 행복한 생활이란 말인가?
이처럼 공산당이 가는 길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대대적으로 공산주의가 인간천당이라고 부르짖지만 사실 그것은 바로 인간지옥이다. 그것은 단지 천당이라는 허위광고에 불과할 뿐이다. 공산당의 원조 마르크스는 충실한 사탄교 신도였으며 그가 신앙한 것은 마왕사탄이었다. 그것을 따라가면 최종적인 귀착점은 바로 지옥뿐이다. 이에 관해서는 《마르크스가 마귀가 된 길(馬克思的成魔之路)》이란 문장을 참고하라.
인류는 이미 도덕에서 멀어진지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나도 멀어졌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뉘우쳐야 하는데 계속해서 뉘우치지 못한다면 인류는 이미 끝에 도달한 것이다.
주:
25. 天下皆知美之為美,斯惡已。皆知善之為善,斯不善已。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盈,音聲相和,前後相隨。恆也。是以聖人處無為之事,行不言之教;萬物作而弗始,生而弗有,為而弗恃,功成而不居。夫唯弗居,是以不去。
26. 明道若昧,進道若退,夷道若纇;上德若谷,廣德若不足,建德若偷,質真若渝;大白若辱,大方無隅,大器晚成,大音希聲,大象無形。道隱無名。
27. 大道廢,有仁義;智慧出,有大偽;六親不和,有孝慈;國家昏亂,有忠臣。
28.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
29. 孔德之容,惟道是從。
30. 上德不德,是以有德;下德不失德,是以無德。
31. 絕聖棄智,民利百倍;絕仁棄義,民復孝慈;絕巧棄利,盜賊無有。此三者以為文不足,故令有所屬;見素抱樸,少私寡慾;絕學無憂。
32. 以正治國,以奇用兵,以無事取天下。吾何以知其然哉?以此。天下多忌諱,而民彌貧;人多利器,國家滋昏;人多伎巧,奇物滋起;法令滋彰,盜賊多有。
33. 不尚賢,使民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不見可欲,使民心不亂。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常使民無知無欲。使夫智者不敢為也。為無為,則無不治。
34. 為者敗之,執者失之。是以聖人無為故無敗,無執故無失。
35. 古之善為道者,非以明民,將以愚之。民之難治,以其智多。故以智治國,國之賊;不以智治國,國之福。知此兩者,亦稽式。常知稽式,是謂玄德。玄德深矣,遠矣,與物反矣,然後乃至大順
36. 為學日益,為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為。無為而無不為,取天下常以無事;及其有事,不足以取天下
37. 太上,不知有之;其次,親而譽之;其次,畏之;其次,侮之。信不足焉,有不信焉。悠兮,其貴言。功成事遂,百姓皆謂「我自然」。
38. 小國寡民。使有什伯之器而不用;使民重死而不遠徙;雖有舟輿,無所乘之;雖有甲兵,無所陳之。使人復結繩而用之。至治之極。甘其食,美其服,安其居,樂其俗,鄰國相望,雞犬之聲相聞,民至老死不相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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