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문화의 현묘한 문을 일깨우다–
진우(真愚)
【정견망】
1. 머리와 꼬리가 보이지 않는 신룡의 춤[神龍之舞 不見尾首]
악(樂)은 중화 문화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것의 하나다. 상고(上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중화문명이 탄생한 시초부터 예악(禮樂)의 교화(敎化)를 수반했는데 그것은 중화문명 내원의 하나로 중화문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악(樂)’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고대의 ‘악’은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협의의 음악(音樂)이 아니라 시사(詩詞), 음악, 무도(舞蹈) 세 방면의 내용을 포함했으며 함의가 박대정심(博大精深)했다.
가령 우리가 지금 알다시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은 《시경(詩經)》인데 여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모두 고체시로 모두 3백여 편에 달한다. 사실 상고시기 《시경》에 나오는 시는 전부 노래로 불리고 악기로 연주되던 것으로 이는 후대 송사(宋詞)나 원곡(元曲)과 마찬가지다. 또한 이런 것들은 단지 노래가사로 불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무도(舞蹈)와 결합되었으니 다시 말해 노래와 춤을 함께 했다.
가령 예를 들어 《시경・주송(周頌)·유청(維清)》을 연주할 때면 일반적으로 ‘상무(象舞)’라는 춤을 추었다. 다만 곡조와 춤이 역사 속에서 실전되어 지금은 그저 문자로 된 가사만 남았을 뿐이다.
이는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방문명의 요람인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시가(詩歌), 음악, 무도가 삼위일체로 분리할 수 없었다. 시가가 탄생한 동시에 그 곡조가 생겨났고 음유시인들이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이와 동시에 무도도 따라서 생겨났다.
〈모시서(毛詩序)〉는 고인(古人)이 쓴 《시경》의 서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詩)란 뜻을 표현해 낸 것으로 마음속에 있으면 뜻이요,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감정이 마음에서 움직이면 말로 드러나는데, 말로 부족하면 감탄하게 되고, 감탄으로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면 저도 모르게 손발을 움직여 춤추게 된다.”
이것은 시가, 음악, 무도의 상호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시사, 음악, 무도 이 세 가지가 일체였으며 시속에 음악이 있고 음악 속에 춤이 있었으며 춤 속에 또 시가 있어서 삼자가 합해 하나가 되었고 이를 통칭해서 ‘악(樂)’ 또는 ‘악무(樂舞)’라 했다. 이것이 바로 고악(古樂)이 포함하는 범위이자 본문에서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한 가지 사물을 요해(了解)하려면 반드시 그것의 내원을 먼저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악’은 언제 탄생했을까?
이 문제는 현재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지만 오직 아득히 먼 사전문명(史前文明) 시기부터 악이 존재한 것을 알 뿐이다.
우리 중화민족은 이번 차례 인류문명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의 하나로 오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기원은 오제(五帝)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황제(黃帝)가 그 시조다. 고대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 이전에도 아주 오랜 삼황(三皇)시기가 있었고 수많은 원고(遠古)의 제왕들이 통치하던 시대를 거쳤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사전문명 시기에 속한다.
고인(古人)은 일찍이 파악할 수 있는 사전문명을 시간 순서에 따라 ‘십기(十紀)’로 구별했다. 《춘추위(春秋緯)》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원고(遠古)시기 태황씨(泰皇氏) 시기부터 시작해 노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년)까지 모두 10기를 거쳤고 326만 7천년을 지나왔다.”
여기서 매 한 기(紀)는 아마도 한 차례 인류문명의 윤회였을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계속해서 몇 십만 년 전 몇 백만 년 심지어 천만년 이전의 문명유적과 화석들이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또 1만여 년 전에 훼멸된 고도로 발달했던 뮤 대륙이나 아틀란티스 문명 및 또 마야문명 등등이 있다.
이들 원고의 사전문명은 모두 일찍이 지구상에 존재했지만 최종적으로 각종 거대한 겁난 속에서 모두 훼멸되었고 길고 오랜 세월을 거친 후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매 차례 겁난 속에도 늘 소수의 사람이 다행히 살아남아 다음 시기 인류를 번성시켰는데 마치 대홍수 때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은 노아 일가족과 같다. 그들은 서서히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켰고 동시에 또 극히 적은 양의 사전문명(史前文明)을 이번 차례 문명 속으로 계승했다. 가령 주역(周易) 팔괘(八卦) 하도(河圖) 낙서(洛書) 음양오행 등이다. 이들은 모두 부동한 시기의 사전문명으로 역대로 겁난을 지나며 지금까지 남겨졌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현대인류는 아무리 해도 제대로 연구해낼 수 없다.
악무(樂舞)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아득히 먼 사전문명 시기부터 유전해 내려온 것으로 사전문명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1984년~2001년 하남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지에서 모두 30여 개에 달하는 학의 등뼈로 만든 골적(骨笛 뼈 피리)이 발견되었다. 고찰에 따르면 이들 골적은 지금부터 약 7800~9000년 전에 땅에 매장되었다. 화학실험을 거친 결과 이들 골적은 모두 2옥타브에 걸쳐 8도 음역(音域)을 지니고 있는데 음역 내 반음(半音)까지 완전하다. 전통음악의 5음이나 7성조의 악곡을 연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음도 풍부해서 소수민족이나 외국음악까지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음계가 아주 과학적이고 완벽하게 구성되었다.
이는 이미 8천여 년 전에 중화민족이 선진적이고 완벽한 음악이론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것은 이번 차례 우리 문명의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중화 악무가 아득히 먼 사전문명 시기에 이미 탄생했음을 증명한다.
상고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삼황(三皇)시기 복희씨(伏羲氏)는 슬(瑟)이란 악기를 발명해 《입기(立基)》, 《가변(駕辨)》 등 악무를 창작했다고 한다. 여와씨(女媧氏)는 생황(笙簧)을 발명했고 아울러 《충악(充樂)》이란 악무를 창작했다고 한다. 또 신농씨(神農氏)는 오현금(五絃琴 줄이 5개인 금)을 발명해 《부리(扶犁)》란 악무를 창작했으며 이외에도 주양씨(朱襄氏)의 오현슬(五弦瑟) 및 갈천씨(葛天氏)의 《팔결(八闋)》이란 악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기록에 나오는 원고의 악무들로 아마 몇 차례에 걸쳐 인류문명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이들은 비록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지만 그럼에도 인류기억 깊은 곳에 침적되어 원고(遠古)의 인기(印記 도장처럼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38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