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진(李道真)
【정견망】
8. 유가치국(儒家治國)
중화문화는 도가(道家)에서 기원해 도가의 기초 위에 건립된 도전문화(道傳文化 도가 전한 문화)다. 동주(東周)시기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사실 노자가 전한 대도(大道) 외에 나머지 제자백가의 사상은 모두 도가에서 취했거나 또는 도가 사상 중에서 분리되어 나온 작은 부분이 따로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다. 또는 도가 사상을 훔쳐다가 기타의 것을 섞어 일가를 이뤘거나 또는 자신의 기점에 입각해 도가 사상을 사오(邪悟)하거나 왜곡해 일가를 이룬 것이다.
춘추시대 말기 공자(孔子)는 요순(堯舜) 이래의 문명 교화 및 사전 문명인 주역(周易)을 정리하고 총결해 유가학설(儒家學說)을 수립했다. 유가학설은 도가문화에서 분리되어 나온 속세에 들어가 사람이 되는[入世做人] 부분이다. 다시 말해 초기의 도전문화(道傳文化)에서 속세를 벗어나 신선을 수련하는[出世修仙] 것과 속세에 들어가 사람이 되는 두 부분은 원래 일체였다.
공자에 이르러 도가에서 속세에 들어가 사람이 되는 부분이 단독으로 분리되어 나와 독립해서 유가가 되었고 한무제(漢武帝) 때 이르러 전면적으로 세상에 보급되어 이후 2천년 이상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유가는 도가에 종속된 것으로 도가 저층(低層)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도가사상을 핵심이자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외유내도(外儒內道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유가지만 안은 도가)’라 부른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유가(儒家)는 왕도(王道)를 주장하며 인의(仁義)를 시행해 예악(禮樂)으로 천하를 다스린다. 유가치국(儒家治國)에서 주로 채용한 것이 바로 예악(禮樂)이란 술(術)이다. 여기서 예란 예의(禮義)를 가리키며 악이란 악무(樂舞)를 가리킨다. 악에 관해서는 따로 《악무선종(樂舞仙蹤)》 시리즈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악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주로 유가의 예치(禮治)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공자는 말한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와 하상주 삼대(三代)의 영화를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대도가 행해지던 때 ‘천하는 모든 사람의 것(天下爲公)’이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서로 화목을 닦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만을 홀로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을 홀로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에겐 삶을 마칠 곳을 마련해 주고, 성인에겐 쓰일 곳(직업)을 마련해 주었으며,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과부, 고아, 홀아비, 장애인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 모두가 부양 받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남자들은 직업이 있었고, 여자들은 돌아갈 곳(시집갈 곳)이 있었으며, 재물을 땅에 버리는 것을 싫어했지만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쌓아놓지도 않았다.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싫어했지만 반드시 자신을 위해서만 힘을 쓰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로 간사한 생각이 막혀 크게 일어나지 못해서 도둑이 훔치거나 난을 일으키지 못했으므로 바깥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를 대동(大同)이라 한다.”
“지금은 대도(大道)가 이미 폐기되어 ‘천하는 한 가문의 것이 되었고(天下爲家)’, 자기 부모만 부모로 여기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며, 재물과 힘을 자신을 위해서 쓴다. 대인(大人 제후 등 귀족)은 부자나 형제가 세습하는 것이 예법이 되었고, 성을 쌓고 해자를 파 이것들을 굳게 지키게 했다. 이에 예의(禮義)를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 대법으로 삼아 이로써 군신관계를 바르게 하고, 부자지간을 돈독하게 했으며, 형제간에 화목하게 하고, 부부간에 화합하게 했다. 또한 예의로 각종 제도를 만들고, 논밭과 마을의 경계를 세우고, 용맹하고 지혜로운 자를 대우하며, 각자의 공적으로 삼게 하였다. 따라서 사욕을 도모하는 각종 지혜와 기교가 이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고 전란(戰亂) 역시 이런 이유로 발생하게 되었다.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성왕, 주공이 나와 이로 인한 시비와 혼란을 가렸다. 이들은 예의에 따라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예로 그 올바름을 드러냈으며, 예로 그 믿음을 돌아보았다. 허물을 드러내 어짊을 본받고 겸양을 가르쳐 백성들에게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예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것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비록 그가) 권세를 가진 자라도 쫓아내 백성들이 이를 재앙으로 삼게 하였다. 이를 소강(小康)이라 이른다.” [39]
공자가 동경한 ‘대동(大同)사회는 사실 도가(道家) 무위의 다스림 하의 사회상태에 해당하고, 소강(小康)사회란 유가에서 추숭한 왕도로 세상을 다스리던 사회상태다. 대동에서 소강까지 공자는 도가치세(道家治世)에서 유가치세(儒家治世)로의 변화, 다시 말해 외유내도(外儒內道)의 형성과정을 논술한 것이다.
도가치국에는 술(術)과 기(器)가 없으며 오직 도(道)만 있었으니 일체가 대도무형(大道無形)이었다. 반면 유가치국은 주로 예악의 술에 의존했다. 이는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로 다스리던 시기에 예악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삼황(三皇)시기에도 예악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근본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통치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한 유아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산수 문제를 푸는 것을 배웠다면 아이는 오직 이런 방법을 써야만 산수 문제를 풀 수 있다. 하지만 수학교수는 절대 아이처럼 손가락을 꼽는 방식으로 산수 문제를 풀지 않을 것이며 속으로 암산으로 답을 말할 수 있다. 이는 수학교수가 손가락으로 꼽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억지로 손가락을 꼽으라고 한다면 오히려 유치하고 가소롭다고 여길 것이다. 도가가 무위로 다스린 시기에 그 어떤 술이나 기도 필요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도리다.
대도가 시행되던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도(道)속에서 자연스레 본성에 따라 행동했고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다 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從心所欲而不逾矩).” 예(禮)란 바로 도의(道義)라는 이런 핵심층면을 에워싸고 그것의 외부에서 생겨난 술(術)인데 이는 도(道)가 표층의 구체적인 행위와 요구에 대응한 후 형식화된 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도(道)가 직접 사람마음을 겨냥한 심법(心法)이라면 예(禮)란 인류의 외재적인 일종의 행동준칙이다. 사람의 외재적인 표현과 내심사상은 긴밀히 연관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말하면 사람마음이 사람의 외재적인 행동표현을 결정한다. 사람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은 모두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내재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므로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기에 백성들은 모두 도(道)속에 있어 심령(心靈)이 모두 대도에 동화되어 순진무사(純真無邪)했고 일언일행이 모두 내심에서 저절로 우러나왔다. 대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나중에 인류사회가 타락한 후 심령이 후천적인 사욕(私慾)과 욕망 등에 오염되면서 대도에서 벗어났다. 인류의 내재가 대도에서 벗어나자 외재의 언행표현 역시 상응해서 원래 도(道)속에서 조화롭과 완벽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때 천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가 깨졌고 각종 전쟁과 재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마음이 대도에서 벗어난 후 나타나는 각종 외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禮)가 흥성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해 사람의 외재행동과 일처리 방식을 규범하고 단속했다.
예(禮)란 인류가 도(道)속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외재행동과 일을 처리하는 표준이 준칙이 된 것으로 이런 외재적인 행동과 일처리 표준을 형식화・규범화시켜 각종 예의(禮儀)제도를 만든 것이다. 예의 핵심은 배후에 함축된 도(道)로 이는 바로 예의 영혼이다.
주조(周朝) 때 이미 아주 완벽한 예의제도가 제정되었고 또 이를 오례(五禮)로 나누었다.
길례(吉禮)란 각종 제사의 예를 총칭하는데 가령 천지신령(天地神靈), 일월성신(日月星辰), 산천하악(山川河嶽), 사직 등에 대한 제사를 말한다.
흉례(凶禮)란 상장(喪葬)에 관한 의례를 말하며 망자를 추도하는 상례(喪禮), 역병이나 재앙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황례(荒禮), 재앙에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조례(弔禮), 도적의 난동 등 난리에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휼례(恤禮) 등이 있다.
또 손님을 접대하는 예의를 총괄해 빈례(賓禮)라 하는데 주로 나라 사이의 왕래와 사신을 접대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활동을 총칭한다. 천자를 알현하는 조례(朝禮)와 이웃 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빙례(聘禮) 등이 있다.
군사방면에 관련된 예의(禮儀)를 군례(軍禮)라 하며, 천자가 직접 원정에 나서는 친정(親征), 장수를 파견하거나 적국의 항복을 받아들이거나 승리한 후 개선(凱旋)하는 등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천자의 등극이나 책봉하는 예, 음식의 예, 혼인의 예, 잔치의 예 등 주로 경사스런 예식을 가리키는 가례(嘉禮)가 있다.
《예기•예운(禮運)》에서는 말한다.
“예(禮)란 고대 성인(聖人)과 선왕(先王)이 천도(天道)를 받들어 세운 것으로 이를 통해 인정(人情)과 세상일을 다스리는데 사용한 것이다. 예란 반드시 천도의 기초 위에 세워져 지덕(地德)을 본받고 귀신에 응험한 후에야 상례(喪禮), 제례(祭禮), 사례(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 관례(冠禮), 혼례(婚禮), 근례(覲禮), 빙례(聘禮) 등 여러 예(禮)속에 관철할 수 있다. 성인이 예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곧 바로잡혔다.”[40]
《태공육도(太公六韜)》에서는 “예란, 하늘의 이치를 겉으로 장식해 꾸민 것이다.”라고 했다.[41]
여기서는 다시 한 번 예(禮)와 도(道)의 관계를 명확히 해보자. 비유를 들자면 만약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외모를 지닌 것을 도(道)라 한다면 예(禮)란 바로 후천적인 화장에 해당한다. 만약 사람이 아름다운 바탕을 갖고 태어나 완벽하고 흠이 없다면 그럼 “푸른 물에 연꽃이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꾸미지 않는다.” 아예 화장할 필요가 없으며 화장을 할수록 도리어 더욱 추하고 비루해진다.
그러나 인생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고 외모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면 화장이 필요해지는데 완벽하게 아름다운 형상을 표준으로 삼아 외재적이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부족한 외모를 가리고 보완해 겉으로 보기에 더 완벽하게 만든다.
예(禮)의 핵심은 표면의 번잡한 예절과 형식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려는 의(義)로 유가 경전 《예기》는 바로 예 배후에 함축된 의(義)를 말하는데 이것이 예를 수립한 근본이다. 그런데 의(義)의 근본은 바로 도(道)로, 의(義)란 도(道)를 지키며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예가 펼쳐내는 핵심은 바로 도(道)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仁), 의(義), 충(忠), 서(恕), 성(誠), 신(信), 효(孝), 렴(廉), 정(貞), 절(節) 및 중용(中庸) 등 군자의 도란 모두 예(禮)의 의(義)가 되는데 이것이 예의 핵심이자 영혼이다.
그러므로 대도(大道)가 시행되던 시기에는 예(禮)를 보급할 필요가 아예 없었고 예란 군더더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대도에서 벗어난 인류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예(禮)란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이며 그것이 인류의 외재적인 행동과 상태를 규범 한다. 이는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는 표준이며 이것이 없다면 인류사회는 장차 금수(禽獸)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도가치국(道家治國)은 안에서 밖으로 이르며 그것은 근본을 붙잡고 내재하는 가장 핵심적인 도(道)의 층면을 움켜쥐고 백성들이 모두 도(道)로 회귀해 도(道)속에서 자연스레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어떤 외재적인 단속도 필요하지 않다. 천하가 모두 도(道)로 회귀할 때면 장차 안에서 밖으로 영향이 생겨날 것이며 일체 외재적인 표현과 형식이 모두 도의 표준요구에서 벗어나지 않고 천하는 장차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상태에 처할 것이며 일체가 다 이런 상태 속에서 조화롭고 완벽해질 것이다.
반면 유가의 이예치국(以禮治國 예로 나라를 다스림)은 예를 통해 백성들의 외재적인 행동과 상태를 규범하고 단속하는데 밖에서 안으로 인류의 도덕행위에 영향을 주고 규범하기 때문에 외부에서부터 도의 표준에 부합한다. 양자는 그 방향이 서로 다르다.
《좌전•장공(莊公) 18년》에서는 “각기 지위가 다르니 예의 수(數) 역시 달라야 한다(名位不同,禮亦異數)”라고 했다.
《예기•악기(樂記)》에서는 “악(樂)은 같은 것을 통솔하고 예(禮)는 다른 것을 구별한다”라고 했다.
여기서는 예의 또 다른 특징을 말했는데 바로 예(禮)란 사람에 따라 구별하고 일에 따라 다른 것으로 등급(等級)이 분명하고 존비(尊卑)에 순서가 있는 것이다.
《예기•곡례상(曲禮上)》에서는 “무릇 예(禮)란 친한 것과 소원한 것을 정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규명하며,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다.(夫禮者,所以定親疏,決嫌疑,別同異,明是非也)”라고 했다.
유가는 예제(禮制)하에 인의(人意)를 보급하고 인애를 강조했지만 유가의 사랑이란 예(禮) 아래에 있는 ‘차등(差等)적인 사랑’이다. 다시 말해 유가에서 말하는 인애(仁愛)란 등급이 있는 것으로 먼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한 후 나중에 소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자, 형제, 부부, 친구를 사랑하고 나서야 중생에 이른다.
《중용》에서는 “친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데 있어서 차별과 어진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 차등이 예(禮)가 생긴 바탕이다.”[43]라고 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모든 것의 평등을 중시하는데 이는 폐단이 있다. 예(禮)란 절대 평등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의 인륜 질서가 어지러워져 사회가 크게 혼란해져서 다스릴 수 없게 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앞에서 공자는 대동과 소강의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공자는 대동사회를 몹시 동경했고 그의 평생의 꿈이었지만 왜 직접 대동사회로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소강만 제창해야 했는가?
이는 시대와 인심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 가지 비유를 들자면 천진무구하고 사랑스런 아이가 엉덩이를 내놓고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아주 자연스럽고 순진하고 귀엽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다 큰 어른이 엉덩이를 내놓고 거리를 활보한다면 분명 방탕하고 음란한 것으로 풍속을 해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남녀관념이 아예 없으니 색심(色心)이나 음욕(淫慾)이 어떤 것인지 아예 모른다. 때문에 자연스레 본성에 따라 행동해도 사람들은 조화롭고 귀엽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욕이 가득한 어른이 엉덩이를 내놓고 거리를 활보한다면 이는 음탕한 행동으로 도덕을 패괴(敗壞)시키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대동(大同)시기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도(道)속으로 돌아와 사랑에 차등이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만 가족이라 여기지 않았고 천하 사람을 모두 가족으로 여겼으며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 사람마다 모두 공(公)을 위했고 사심(私心)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가 모두 대도(大道)에서 멀어진 후 천하는 곧 사가(私家)의 소유가 되었고 사람마다 모두 이기적으로 되어 모두 자신의 가정을 위했다. 이때 다시 대도(大道)시기의 요구로 백성들을 요구한다면 그럼 이는 표준이 너무 높은 것으로 천하에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오히려 전체 사회질서를 어지럽힐 것이다.
《여씨춘추》와 《회남자》에 모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황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노(魯)나라에는 외국에서 노예로 전락한 자국민을 어떤 사람이 돈을 주고 사올 경우 나중에 국고에서 보상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한번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외국에 갔다가 노나라 사람을 샀는데 귀국한 후 나라에서 주는 보상금을 거절했다.
공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했다.
“자공이 잘못했구나. 앞으로는 노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가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43]
자신이 치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자공의 이 사심 없는 행동에 대해 공자는 왜 그가 잘못했다고 말했을까?
이에 대해 공자는 말한다.
“진정한 성인은 일을 하는 목적이 사회 풍속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하려는 것이지 단지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금 노나라는 부자는 적고 가난한 사람은 많으니 나라에 보상금을 청구해도 네게는 아무 손실이 없겠지만 보상금을 청구하지 않으면 노나라에서는 더 이상 노예로 전락한 동포를 돈 내고 사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44]
즉 노나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다수인데 원래 외국에서 자국민을 돈 주고 사오면 나라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누구나 이런 도덕행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 공덕(公德)이었다. 하지만 자공의 행동은 이 제도를 “돈 주고 사람을 사온 후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 표준이 너무 높아져서 가난한 대다수 노나라 사람들이 할 수 없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설사 돈을 주고 살 수 있어도 감히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소수만이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를 보편적인 사회 공덕으로 바꾸는 것은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행위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땅히 차근차근 한걸음씩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
다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말에게 백 근의 짐을 지우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개에게 백 근을 지우면 아마 깔려 죽을 것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시기마다 사회 인심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각기 다른 요구로 점차적으로 진행해야지 단번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다. 단번에 도달하려고 하면 사회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예수(禮數 신분에 따라 다른 예의)가 다른 것이 바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예제(禮制) 아래에서는 먼저 자신과 가장 친한 사람부터 사랑하고 그런 후에 친인(親人)에 대한 사랑을 관계가 먼 사람에게 확대하고 마지막에 천하 중생에게 확대하는 것이다.
맹자는 말했다.
“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남의 노인에게 베풀고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아이에게 베푼다.”[45]
맹자는 또 말했다.
“자기 가족을 친애하고 나서 천하 백성을 사랑하고 천하 백성을 사랑하고 나서 만물을 아낀다.”[46]
유가의 예치(禮治)는 바로 천하 인심(人心)의 상태에 근거한 것으로 먼저 등급질서를 수립한 후 이 질서에 근거해서 천하 백성들이 소강(小康)에 도달하게 하고 나중에 대동(大同)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예가 의도적으로 천하를 삼, 육, 구 등으로 나눠 차별해서 대하는데 아니라 천하가 위사(爲私)한 사회가 되어 천하위공(天下爲公) 시기의 표준을 시행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질서를 수립하고 나서 점차 궁극적으로 도(道)로 회귀하도록 이끌고 향상시켜 천하위공에 도달할 수 있다. 유가(儒家)가 궁극적인 층면에 이르면 바로 도(道)가 되는데 이것이 외유내도(外儒內道)의 함의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禮)는 매 사람이 처한 각기 다른 명분, 지위, 환경 등에 근거해 서로 다른 예절을 시행해야 한다. 친소(親疏), 존귀(尊貴), 남녀(男女), 장유(壯遊) 등 순서에 따라 인륜을 정하고 기강을 세우며 질서를 수립한다. 예(禮)는 매 사람마다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서 명확한 위치를 정하고 각기 다른 예절을 제정해 사람마다 각자 그 지위에 거하고 각자 그 직책을 펼쳐 질서가 정연하게 만들어 천하가 잘 다스려져 어지럽지 않도록 한다.
예란 천지우주를 본받고 천도(天道)를 따라 인간 세상에 수립한 질서이자 사람의 규범을 정한 것이다. 예는 사람의 외재행위와 일하는 표준으로 도(道)와 서로 대응한다. 그것이 수립한 질서와 규범을 통해 사람이 밖에서 안으로 도덕표준에 회귀할 수 있게 한다.
인류사회가 갈수록 타락하고 갈수록 대도에서 멀어짐에 따라 치국(治國) 방식도 갈수록 더 표면적으로 발전했다. 예(禮)의 중심 역시 그 배후의 도의 내함에서 갈수록 표면형식으로 빗나가고 발전했으며 갈수록 더 표면형식을 중시하고 배후의 도의(道義)가 몰락해 서서히 번잡한 절차와 형식에 치우지게 되었다. 유가는 곧 역사발전 중에 서서히 배후의 선기(仙氣)와 빼어남을 벗어버렸고 갈수록 표면적인 발전 과정 중에서 세속화되고 경직되고 진부해졌으니 이 역시 구우주(舊宇宙) 성주괴멸(成住壞滅)의 숙명 속에서 유가가 겪어야 할 겁수(劫數)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화장으로 인류 치국수단의 발전을 비유해보자. 처음에는 옅은 화장을 했는데 주로 선천적인 외모에 근거해 진아(真我)의 기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냈고 표면에서는 단지 적장한 수식과 보완에 그쳐 사람들이 보기에도 자연스럽고 화장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외재적인 화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표면적인 꾸밈으로 흘러 선천 기질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화장은 갈수록 더 진해지고 요염해졌으며 마지막에는 아예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정도에 도달해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했다. 하지만 이때 물론 화장을 씻어내기만 하면 바닥에 감춰진 비루하고 가식적인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
주:
39. 《禮記•禮運》:孔子曰:「大道之行也,與三代之英,丘未之逮也,而有志焉。大道之行也,天下為公。選賢與能,講信修睦,故人不獨親其親,不獨子其子;使老有所終,壯有所用,幼有所長,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男有分,女有歸。貨惡其棄於地也,不必藏於己;力惡其不出於身也,不必為己。是故謀閉而不興,盜竊亂賊而不作,故外戶而不閉,是謂『大同』。今大道既隱,天下為家,各親其親,各子其子,貨力為己,大人世及以為禮。城郭溝池以為固,禮義以為紀,以正君臣,以篤父子,以睦兄弟,以和夫婦,以設制度,以立田裡,以賢勇知,以功為己。故謀用是作,而兵由此起。禹湯文武成王周公,由此其選也。此六君子者,未有不謹於禮者也。以著其義,以考其信,著有過,刑仁講讓,示民有常。如有不由此者,在勢去,眾以為殃,是謂『小康』。」
40. 《禮運》曰:「夫禮,先王以承天之道,以治人之情……是故禮必本於天,殽於地,列於鬼神,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聖人以禮示之,天下國家可得而正也」。
41. 《太公六韜》曰:「禮者,天理之粉澤」。
42. 《中庸》:「親親之殺,尊賢之等,禮所生也。」
43. 《呂氏春秋》:魯國之法,魯人為人臣妾於諸侯、有能贖之者,取其金於府。子貢贖魯人於諸侯,來而讓不取其金。孔子曰:「賜失之矣。自今以往,魯人不贖人矣。
44. 《淮南子》:夫聖人之舉事也,可以移風易俗,而受教順可施後世,非獨以適身之行也。今國之富者寡而貧者眾。贖而受金,則為不廉;不受金,則不復贖人。自今以來,魯人不復贖人於諸侯矣。
45. 《孟子•梁惠王上》: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
46. 《孟子•盡心上》:親親而仁民,仁民而愛物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42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