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真愚)
【정견망】
최초의 음악은 오락용이 전혀 아니었고 자연을 조절해 천지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사용되었다. 즉 초자연적인 신(神)의 지혜를 본받고 완벽한 천도(天道)법칙을 표준으로 삼아 만물을 보듬어 모든 것을 대도(大道)로 되돌려 조화롭고 질서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의 음악은 당시 사회에서 인심(人心)을 교화(敎化)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인심을 교화하는 음악의 역할은 음악이 처음 탄생할 때부터 갖춰진 것이자 역사 발전 중에서도 줄곧 그 역할을 지속해 왔다. 단지 뒤로 갈수록 더욱 은밀해지고 미약하게 표현되었고 반대로 음악의 오락작용 등이 주도가 되었을 뿐이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교화 역할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도리어 인심과 도덕을 서서히 패괴(敗壞)시키고 정욕을 방종하는 수단이 되었다.
초기의 음악은 인심을 교화하고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등의 역할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것은 바로 정보 전달과 정령(政令)을 널리 시행하는 수단이었다.
옛말에 “네 문에 공고를 붙여도 늘 글자를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문자를 통해 정보를 전파하고 정령을 발표하는 것이 민간에 보급된 이후의 일이다. 비록 황제(黃帝) 시기에 이미 문자가 존재하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접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더욱이 글을알기란 더욱 어려웠다.
춘추시기 민간 사학(史學)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오직 소수 귀족 자제들만 교육을 받고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사(士) 이하 일반 백성들은 책을 읽거나 글자를 알 수 없었다. 상조(商朝)에는 더욱 그랬는데, 웬만한 귀족들조차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오직 극소수 사관(史官)이나 무격(巫覡) 또는 고위 귀족들만이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아예 글을 접촉할 수 없었다. 더 이전 시기로 거슬로 올라갈수록 글을 아는 사람이 더 적었다.
때문에 문자는 당시 정보 전달과 정령을 반포하는 주요 경로가 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순(舜)이 재위할 때 일찍이 다섯 가지 형법(刑法)을 일상 물건에 그림으로 그려 법률을 전파했다. 그림을 이용하는 이것이 전파의 한 가지 방식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장 주요한 방식은 아니었다. 사실 당시 정보를 전파하고 교화를 추진하는 주요 방법은 바로 음악이었고, 이는 음악이 초기에 발전해 나오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다.
아주 오랜 역사 시기 동안, 군왕(君王)은 종종 민간에 사람을 파견해 민악(民樂)을 수집했는데, 후대에는 이것을 ‘채풍(採風)’이라 불렀다. 예를 들면 《시경》〈국풍〉 부분은 바로 민간에서 채집한 음악의 가사다. ‘채풍’이란 단어 역시 이렇게 온 것이고, 한조(漢朝)의 악부(樂府)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군왕이 민간에 사람을 파견해 ‘채풍’한 목적은 오락을 위한 게 아니라 주로 백성들의 풍속 변화를 이해하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삶과 민간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시정(施政)의 득실(得失)을 대조해보기 위해서였다.[1]
당시에 음악은 군왕이 천하에 교화를 발표해 보급할 뿐만 아니라 사회 풍속을 이해하고 민의를 경청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군왕은 천하의 교화를 위해 악무(樂舞)를 만든 후 천하에 널리 전파시켰고, 천하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에 군왕의 교화에 스며들 듯 동화되었다.
병법(兵法)에서 손자(孫子)는 “싸우지 않고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용병에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보았다. 여기서 손자가 말하는 것은 모략(謀略)을 써서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무런 모략조차 사용하지 않고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에 군사를 항복시키고 멀리 떨어진 이민족까지 신복(臣服)시킬 수 있다면 이는 또 어떤 경계이겠는가?
오제(五帝)시기에는 삼묘(三苗)부족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통치에 복종하지 않아 당시 줄곧 사회의 골칫거리였다. 삼묘란 치우(蚩尤)의 구리(九黎) 부족에서 유래했는데, 치우가 황제(黃帝)에게 참살당한 후 그 종족의 일부가 나중에 삼묘족으로 발전했다. 이 민족은 풍속이 사납고 야만적이라 싸움을 잘하며 반란을 잘 일으켜서 길들이기 어려웠다.
《상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순제(舜帝) 때 삼묘가 통치에 불복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순은 우(禹)를 파견해 정벌하게 했다. 토벌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삼묘는 여전히 불복했고 우 역시 삼묘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에 우는 백익(伯益)의 건의에 따라 무력 사용을 중지하고 군사를 돌이켰다. 군사를 물리치고 돌아오자 순은 대대적인 교화를 실시해 깃털과 방패를 손에 들고 황궁의 동서 계단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악무를 공연해 천하에 보여주었다. 그러자 교화가 악무를 통해 아주 빨리 전파되었고 삼묘에도 전해졌다. 70일 후, 삼묘가 감화되어 찾아와서 귀순하여 신복(臣服)할 것을 표시했다.”[2]
단지 노래와 춤으로 적을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인(古人)은 잔혹한 전쟁 중에서 용감하게 적진을 돌파할 때도 역시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전투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자면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주(周) 무왕(武王)이 상주(商紂)를 정벌하기 위해 조가(朝歌) 들판에서 전투할 때 이끈 병력은 겨우 병거(兵車) 300승, 사졸 4만 5천 명, 돌격대 3천 명이었고 반대로 주왕(紂王)의 군대는 70만 명으로 병력수의 차이가 현격했다.
하지만 막상 양군(兩軍)이 맞붙었을 때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고 무왕의 군사들은 북소리에 맞춰 대대적으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앞에서 노래로 이끌면 뒤에서 춤을 추면서 주왕(紂王)의 군대에 맞섰다. 무왕 군사들의 이러한 진용에 직면한 상조(商朝)의 대군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서에는 무왕이 군대를 이끌고 조가를 공격해 약소한 무왕이 고목을 넘어뜨리듯이 강대한 상조(商朝)를 무찔러 천하의 공주(共主)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3]
이 일은 《화양국지(華陽國志)》와 《백호통》에도 모두 기록이 있다.
(계속)
주:
[1] 《春秋公羊傳》:「從十月盡正月止,……男年六十,女年五十無子者,官衣食之,使民間求詩。」「故王者不出戶牖,盡知天下所苦。」
《漢書·藝文志》:「古有采詩之官,王者所以觀風俗,知得失,自考正也。」
[2] 《尚書·大禹謨》:三旬,苗民逆命……班師振旅,帝乃誕敷文德,舞干羽於兩階。七旬,有苗格。
[3] 《華陽國志》:「周武王伐紂,實得巴、蜀之師,著乎《尚書》。巴師勇銳,歌舞以凌殷人,前徒倒戈。故世稱之曰「武王伐紂,前歌后舞」也。
《白虎通·禮樂》記載:「武王起兵,前歌后舞,克殷之後,民人大喜」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38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