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악무선종(樂舞仙蹤) 6: 음악이 하늘을 감동시키니 신이 강림

진우(真愚)

【정견망】

초기 음악은 천지신령(天地神靈)의 지혜를 본받았기 때문에 신(神)과 소통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음악은 주로 천지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가령 육대(六代)의 악무는 모두 제사에 사용되었고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악무(樂舞)로 서로 다른 대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주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며 6대 악무를 연주할 때, 한 번 연주하면 조류와 천택(川澤)의 신을 감동시켜 불러왔고, 두 번 연주하면 털이 짧은 짐승 종류와 산림(山林)의 신을 불러왔으며, 세 번 연주하면 어류와 구릉(丘陵)의 신을 불러왔고, 네 번 연주하면 잔털이 난 동물과 수변(水邊)의 신을 불러왔으며, 다섯 번 연주하면 갑각류와 토지 신을 불러왔으며, 여섯 번 연주하면 봉황과 용 및 천신(天神)을 감동시켜 불러왔다”고 했다.[1]

또 “협종(夾鍾)을 궁음(宮音)으로 삼고 뇌고(雷鼓)와 뇌도(雷鞀)를 사용했으며, 고죽(孤竹)의 대나무를 사용해 관악기를 만들고, 운산(雲山)의 좋은 나무로 금슬(琴瑟)을 제작해 《운문(雲門)》이란 춤을 추었다. 동짓날 도성 남쪽 교외의 환구(圜丘)에서 일제히 연주했는데 여섯 번 연주했을 때 천신이 분분히 강림하니 이때 천신께 제례를 올릴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마찬가지로 《함지(咸池)》를 연주하며 땅에 제사를 지낼 때 8번 연주했을 때 지신(地神)을 불러올 수 있었다.[3]

이상의 기록에 따르면 주조(周朝) 초기 제사를 지낼 때만 해도 악무(樂舞)를 연주하면 확실히 신령이 감응해 세상에 강림해서 직접 제사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초기 악무에 신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악무는 신(神)과 통해 신을 강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제사에 대량으로 사용되었고 이에 무무(巫舞)가 발달했다.

상고시기의 ‘무당(巫)’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무당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무당’은 사회 낮은 층에서 신처럼 분장하고 귀신을 부리는 것으로 일종 사문왜도(邪門歪道)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상고 시기의 ‘무당’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높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대개는 또 부족의 수령이었다. 상고의 무당은 대부분 다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고, 초상(超常)적인 능력과 지혜를 지녀 신과 소통할 수 있었으며, 인간세상에서 신의 대변자가 되어 부족과 국가의 정치 생활에서 중대한 역할을 발휘했다.

《국어(國語)》에는 “먼 옛날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광명하고 성결하며, 순결하고 고상한 사람에게만 신명(神明)이 그이 몸에 내려와 사람과 신이 소통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런 사람을 남자는 격(覡), 여자는 무(巫)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4]

상고 시기 인류가 천지신령과 소통하는 의식(儀式)은 기본적으로 무당을 통해 진행했고, 무당은 종종 음악과 춤이라는 이런 매체를 통해 천지신령과 소통해 신이 강림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상조(商朝)가 남긴 갑골문에는 무무(巫舞)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제사와 비를 구할 때 무무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경인(庚寅)일에 점을 쳐서 신묘(辛卯)일에 예무(隸舞)를 추니 비가 내렸다. 경인일에 점을 쳐서 계사일에 예무를 추니 비가 내렸다. 경인일에 점을 치고 갑오일에 예무를 추니 비가 내렸다.”[5]

여기서 예무란 반례(盤隸)라고도 불리는데 상고에 비를 구할 때 추던 일종의 무무(巫舞)다. 고대에 큰 가뭄이 들면 반드시 우제(雩祭)를 지냈는데 우(雩)란 고대애 비를 구하는 일종의 제사를 말한다. 예무는 우제를 지낼 때 추던 무무로 일반적으로 무용수는 무당이 담당했다. 때로 제왕이 직접 춤을 추기도 했다.

가령 “왕이 반례를 춘다”[6]거나 “무자(戊子)일에 정(貞)인이 점을 치니 왕이 우무를 추면 길하다”[7]는 등의 기록이 있다. 즉, 상왕이 직접 예무와 우무를 췄다는 뜻이다.

상조의 왕이 비를 구한 것은 상조 개국 제왕인 상탕(商湯)에서 처음 유래했는데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탕도상림(湯禱桑林–탕이 상림에서 기도하다)”이란 일화다.

《회남자》, 《여씨춘추》, 《시자(尸子)》 등 여러 고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상탕이 하걸(夏桀)을 몰아낸 즉위 초 천하에 5년 연속 큰 가뭄이 들어 곡식 하나도 거두지 못했다. 이에 탕이 사관(史官)을 시켜 교외에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워 소, 양, 돼지를 희생으로 삼아 상제(上帝)께 제사를 지내 비를 구하게 했다. 탕이 기도를 올릴 때 자책하면서 자신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여섯 가지 잘못을 열거하며 상제께 복을 내려 비를 주십사 애원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큰 가뭄이 칠 년째 지속되니 백성들이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탕은 다시 뽕나무 숲이 있는 상림(桑林)에 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비를 구했다.

사관이 점을 친 후 말했다.

“산 사람을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야 상제께서 비를 내려주실 겁니다.”

이에 탕이 말했다.

“기우란 본래 백성을 위해 하는 것인데, 어찌 이로 인해 백성을 해친단 말인가?”

그리고는 자신을 희생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르고 목욕한 뒤 하늘에 기도했다.

“저 한 사람의 죄로 만백성을 징벌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만백성에게 죄가 있다면 모두 저 한 사람에게 내려주소서. 저 한 사람의 무능 때문에 백성의 생명을 해치지 마소서.”

기도를 끝낸 후 장작더미에 올라앉아 무당이 막 장작불에 불을 붙이려 할 때 큰비가 내리기 시작해 수천 리 땅에 비가 내리자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노래와 춤을 추면서 탕의 큰 덕을 찬양했다. 이것이 바로 《상림》이란 음악의 유래다.[8]

《상림》은 주조(周朝) 때도 아주 유행했다. 장자(莊子)는 포정(庖丁)이 소를 해체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포정의 칼질, 동작, 리듬 등이 《상림》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했다. 즉 악무를 이용해 소를 해체하는 것을 묘사했으니 정말이지 악무를 신통하게 활용한 것이다. 단지 포정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대에는 누구나 다 그랬을 것이다.

《예기·옥조(玉藻)》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에 군자는 반드시 옥패(玉佩)를 착용해야 했다. 오른쪽 옥패가 부딪쳐 내는 소리는 치음(徵音)과 각음(角音)이고, 왼쪽에서 나오는 소리는 궁음(宮音)과 우음(羽音)이다. 좌우 양쪽 옥패가 걸을 때마다 음악소리를 낸다. 빨리 걸을 때는 《채제(采薺)》란 음악에 맞췄고, 천천히 걸을 때는 《사하(肆夏)》란 음악에 맞춘다. 되돌아갈 때는 규격에 맞게 둥글어야 하고, 코너를 돌 때는 규격에 맞게 직각으로 한다. 전진할 때는 몸을 약간 굽혀 읍(揖) 하듯이 하고, 뒤로 물러설 때는 몸을 살짝 젖히는데 이렇게 하면 옥패가 인체 자세 변화에 따라 조화로운 음악 소리를 낼 수 있다. 군자가 수레를 탈 때는 수레 위의 난령(鑾鈴), 화령(和鈴) 소리를 듣고, 걸을 때는 몸에 찬 옥패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군자의 마음속에는 일체 사념(邪念)이 들어올 수 없다.”[9]

《주례·대사악(大司樂)》에는 “천자가 천천히 걸을 때는 《사하(肆夏)》의 리듬에 맞춰야 하며 빨리 걸을 때는 《채제》란 음악의 리듬에 맞춰야 하며 수레를 타고 나갈 때도 이렇게 했다. 뒤로 돌거나, 좌우로 꺾거나, 절을 올리는 등의 예를 할 때도 늘 종과 북의 박자에 맞아야 한다.”라고 했다.[10]

이런 기록들을 보면 현대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는 음악에 너무 집착하는 사회가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귀하고 우아한 선조들의 진실한 실제 생활모습이었다.

주조(周朝)의 귀족 자제들은 13세부터 《육소무(六小舞)》를 배우기 시작했고 15세에 《상무(象舞)》 20세에 《육대무(六代舞)》를 배워야 했다. 이런 춤들은 익히지 않으면 아예 사회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 시기에는 위로는 천자에서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늘 음악 속에 있었고 곳곳에서 늘 음악을 떠나지 않았으며 전반 사회와 나라가 모두 음악으로 구성된 기묘한 분위기 다시 말해 일종 음악 세계를 형성했다.

(계속)

주:
[1] 《周禮·大司樂》:凡六樂者,一變而致羽物及川澤之祇。再變而致裸物及山林之祇,三變而致鱗物及丘陵之祇,四變而致毛物及墳衍之祇,五變而致介物及土祇,六變而致象物及天神。

[2] 《周禮·大司樂》:圜鍾為宮,黃鐘為角,大蔟為徵,姑洗為羽,雷鼓雷鞀,孤竹之管,雲和之琴瑟,《雲門》之舞;冬日至,於地上之圜丘奏之,若樂六變,則天神皆降,可得而禮矣。

[3] 《周禮·大司樂》:函鍾為宮,大蔟為角,姑洗為徵,南呂為羽,靈鼓靈鞀,孫竹之管,空桑之琴瑟,《咸池》之舞;夏日至,於澤中之方丘奏之,若樂八變,則地示皆出,可得而禮矣。

[4] 《國語》:古者民神不雜。民之精爽不攜貳者,而又能齊肅衷正,其智能上下比義,其聖能光遠宣朗,其明能光照之,其聰能聽徹之,如是則明神降之,在男曰覡,在女曰巫。

[5] 見《殷墟文字甲編》3069

[6] 見《殷墟書契前編》4.16.6

[7] 見《殷墟書契前編》60.20.4

[8] 《淮南子・主術訓》:商史紀,成湯時歲久大旱。太史占之,曰:「當以人禱。」湯曰:「吾所以請雨者,人也。若必以人,吾請自當。」遂齋戒、剪髮、斷爪,素車白馬,身嬰白茅,以為犧牲,禱於桑林之野。以六事自責曰:「政不節歟?民失職歟?宮室崇歟?女謁盛歟?包苴行歟?讒夫昌歟?」言未已,大雨方數千裡。

《管子·輕重篇》:「湯七年旱,民有無糧賣子者。」

《漢書·食貨志》:「堯、禹有九年之水,湯有七年之旱。」

《呂氏春秋·順民》:昔者湯克夏而正天下,天大旱,五年不收,湯乃以身禱於桑林,曰:「餘一人有罪,無及萬夫。萬夫有罪,在餘一人。無以一人之不敏,使上帝鬼神傷民之命。」於是翦其發櫪其手以身為犧牲,用祈福於上帝,民乃甚說,雨乃大至。則湯達乎鬼神之化、人事之傳也。

《尸子》記載:「湯之救旱也,乘素車白馬,著布衣,身嬰白茅,以身為牲,禱於桑林。」

[9] 《禮記·玉藻》:「古之君子必佩玉。右徵角,左宮羽。趨以《采齊》,行以《肆夏》,周還中規,折還中矩。近則揖之,退則揚之,然後玉鏘鳴也。故君子在車,則聞鸞和之聲,行則聞鳴佩玉,是以非辟之心無自入也。」

[10] 《周禮·大司樂》:教樂儀,行以肆夏,趨以采薺,車亦如之。環拜以鐘鼓為節。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38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