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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국대도(治國大道) 12: 도덕진감

이도진(李道真)

【정견망】

12. 도덕진감(道德真鑒)

앞에서 일부 사례를 들어 상생상극(相生相剋)의 관계를 설명했지만 예로 든 것들은 단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단순하며 특별한 사례에 불과하다. 현실 속의 상생상극 관계는 극히 복잡한 것으로 단순히 양자(兩者)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만사만물(萬事萬物) 사이에 착종된 복잡하고 전식(全息)적인 연계다.

천지만물은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이고 만사만물은 모두 상생상극 속에 있으며 상호 영향을 주고 상호 제약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망(網)을 형성하기에 어느 한 곳을 건드려도 전체를 움직인다. 망 속에 들어오면 뛰쳐나올 수 없으며 이 망의 일부분이 되어 그 사이에서 윤회전멸(輪迴轉滅)한다.

역사상 평범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신선(神仙)들조차 함부로 이 망을 건드리지 못했는데 과거의 신선은 일단 세간에 들어오기만 하면 매사에 늘 기연(機緣)을 말했으며 하늘의 뜻에 따라야 했다. 세속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기연이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면 절대 함부로 할 수 없었으며 일단 건드려서 망 속에 들어가면 자신도 벗어날 수 없었다.

《주역》에서 드러내는 것은 사실 또 중용(中庸)의 이치인데 단지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은 명백히 보아내지 못할 뿐이다. 《주역》은 한 부의 천서(天書)암호로 천상과 인간의 대응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대도(大道)가 천지만물을 낳았고 천상(天象)이 지리(地理)와 인문을 낳았으니 《주역》은 대도가 천지만물을 낳는 과정을 기록하고 천지만물이 성주괴멸(成住壞滅) 중에서 윤회하는 전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주역》을 꿰뚫어보면 그럼 곧 그 속에서 만물이 불패(不敗)에 서게 하는 한 갈래 길을 찾아낼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정수(精髓)가 있는 곳이다. 중화문화는 너무나 위대해서 온 하늘의 뭇신들이 인류에게 전수한 것으로, 우주의 가장 특수한 시각을 위해 전 우주의 정화를 모두 응축한 것으로 온 하늘의 신불(神佛)조차 경탄하지만, 오직 범인(凡人)만 모를 뿐이다.

자연 만물 사이 상생상극의 관계는 실로 너무나 복잡하다. 앞에서는 단지 이해의 편리를 위해 가장 간단하고 특수한 사례를 들어 자연만물의 관계망 속에서 단독으로 드러낸 것이다. 만사만물 사이에는 모두 천만갈래 연계가 존재하고 모두 상생상극과 관련되어 하나의 전식(全息)적인 거대한 망을 형성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가 다 움직인다.

여기서는 다시 도덕(道德)을 예로 들어보자. 천하가 모두 도(道) 속에 있을 때는 근본적으로 덕(德)이 없었다. 천하가 대도에서 벗어난 후 비로소 덕이 생겨났는데 덕은 대도에 의지해 건립된 유형적인 표준이며 오직 도만 따른다.

애초에는 인류가 대도에서 아직 그다지 심각하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덕(德)이 아주 간단했다. 하지만 인류가 대도에서 갈수록 심각하게 벗어남에 따라 사욕(私慾)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덕이 갈수록 많이 생겨나고 갈수록 복잡하고 완벽하게 수립되었고 많은 종류로 나뉘어졌다.

예를 들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충(忠), 서(恕), 효(孝), 제(悌), 공(恭), 순(順), 정(貞), 절(節), 염(廉), 검(儉) 등등이다.

이 모든 덕들은 다 같은 근원에서 생긴 것으로 그들 사이에 상생상극의 관계가 존재하며 서로 교차해 하나의 거대한 망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仁)의 내함은 천지만물에 대한 애호이다. 천지만물에 대한 가장 큰 애호는 다시 말해 일체를 대도(大道)로 되돌려 가장 조화롭고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고통이 없고 재앙이 없다.

의(義)의 내함은 도(道)를 따르고 또 수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인(仁)은 의(義)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의(義) 역시 인(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인과 의는 또 예, 지, 신, 충, 효 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전식(全息)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단순한 양자 관계가 아니고 그중 하나를 움직이면 정체(整體)를 움직일 수 있다.

가령 인(仁)이 한도를 넘어 원칙에서 벗어나면 악(惡)을 생기게 해서 곧 정체에 손해를 주어 그것의 덕을 억제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십악불사(十惡不赦)한 무리에게 인을 강조하면서 대도를 파괴하고 만물에 손해를 끼치는 사악한 행동에 대해서도 인을 강조한다면 그럼 인은 곧 법도와 경계를 상실해 악(惡)이 되고 사악을 종용하고 만물에 손해를 끼치는 도구로 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모든 덕을 억제해 손실을 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신(信)을 지키는 것이 지나쳐 사악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면 이 역시 악으로 변한다. 충(忠)이 지나쳐서 무도(無道)한 자에게 충성한다면 이 역시 악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 어떤 덕(德)도 도가 지나쳐 원칙을 잃으면 모두 이와 같다.

진정한 덕은 대도를 핵심이자 준칙으로 삼는데 만약 대도에서 벗어나면 비록 그것이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이미 더 이상 덕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을 지킴에 반드시 중용을 지켜야 하며 중용의 덕이야말로 진정한 덕이다.

그럼 중용의 덕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한 가지 표준을 제출하는데 바로 대도를 종지[宗]로 삼아 덕이 서로 해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대도를 종지로 삼고 다른 정체적인 덕들과 상충하거나 서로 해치지 말아야 한다.

모든 덕은 다 상생상극 속에서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해 하나의 정체를 이룬다. 그 어떤 하나의 덕이든 반드시 다 정체적인 관계망 속에서 가늠해야만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고 정체적인 평형을 유지하면서 대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어떤 한 가지 덕(德)을 고립해서 본다면 한도를 잃고 정체적인 평형을 깨뜨릴 수 있다.

때로는 정체 속에서 또 두 가지 덕이 상충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가령 충(忠)과 효(孝) 둘을 완전히 할 수 없을 때라면 마땅히 대도(大道)를 취하고 소도(小道)를 버려야 하는데 다시 말해 충을 선택하고 효를 버려야 한다. 또 임금에 대한 충(忠)과 천도(天道)를 지키는 것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럼 반드시 천도를 따르고 임금에 대한 충을 버려야 한다. 이 역시 대도를 종지로 삼는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체와 같은데, 오장육부와 근골(筋骨), 피육(皮肉), 경맥(經脈), 혈위(穴位) 등 여러 구조가 공동으로 인체를 구성하는데 그것들이 전식(全息)적으로 일체가 되니, 하나가 손상되면 전체가 손상되며 하나가 번영하면 전체가 번영한다. 그 어떤 하나의 기관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중의(中醫) 양생에서는 인체의 정체적인 평형을 중시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건강할 수 있다. 만약 단독으로 어느 한 기관만 강조해서 그것만 따로 보양(保養)한다면 결국 그것이 너무 강해져서 다른 기관을 해칠 수 있다. 그 어떤 한 기관이든 쇠약해서 고갈되면 모두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한 기관을 아무리 강하게 보양한다 해도 모두 헛수고로 도리어 인체평형을 파괴해서 함께 훼멸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간추린 중용의 3층 내함(內涵)인데 다시 말해 자연만물의 조화로운 평형, 공생공존(共生共存), 정체승화다.

아래에서 두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옛날 미생(尾生)이 기둥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기 노(魯)나라에 미생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시간이 되었지만 여자는 오지 않았다. 이때 강물이 갑자기 불어났지만 미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기둥을 끌어안고 떠나지 않았으며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데 《장자》에 처음 나오고 《사기》 등에도 나온다. 역대로 사람들은 미생을 약속을 잘 지킨 도덕모범으로 칭송해왔으며 또한 여기서 미생포주(尾生抱柱 미생을 기둥을 끌어안다)와 미생지신(尾生之信 미생의 약속)이란 두 개의 성어가 나왔다.

여기서 중용은 “대도를 종지로 삼고 덕이 서로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표준을 가지고 이 일화를 한번 분석해보자.

미혼 남녀가 남몰래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본래 예의가 아니니 이는 예란 덕을 위배한 것이다.

2. 여자가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약속을 위배한 것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무슨 특수한 원인이나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미생이 이렇게 기둥을 끌어안고 죽은 것은 진실로 약속을 어기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는 그녀를 신의를 저버린 무정하고 불의(不義)하며 사람의 목숨을 해친 지경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그녀가 나머지 생을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는 고집스레 자신의 믿음만을 지키려다 남을 고려하지 못했으며 또 남을 위해 생각하고 너그럽게 포용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인(仁)과 서(恕) 등의 덕성을 위배한 것이다.

3. 강물이 갑자기 불어났을 때 미생은 다리 위로 올라가거나 또는 잠시 근처 높은 곳에 대피해서 다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물이 빠진 다음에 다시 약속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다른 도덕을 해치지 않는데 그는 왜 기꺼이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왜 고집스레 이렇게 한 가지에 목을 매는가? 이는 지(智)를 어긴 것이다.

4.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바쳐 의를 취함)와 몸을 바쳐 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대단히 큰 덕행에 해당하지만 반드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절대로 생명을 경시해선 안 되니 정말로 죽을 가치가 있는지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대도(大道)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거나 중생의 행복 등을 위해 죽었다면 이는 의(義)를 완성한 것으로 가치 있는 죽음이자 위대한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미생은 단지 한 여인이 약속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에 죽었으니 이는 너무나도 가벼운 죽음이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면 천지신령(天地神靈)의 배치와 은혜를 소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는 부모님께 받은 신체를 해쳤으니 이는 적어도 효(孝)라는 덕을 위배한 것이다.

이상 몇 가지에 근거해 보자면 미생은 중용의 덕을 위배했다. 그는 오직 신(信)만을 강조하고 일률적으로 극단으로 나갔는데 전체적인 덕행에 손해를 끼쳤고 대도에서 벗어났다.

이어서 또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열자》에 나오는데 독자들이 다들 잘 아는 내용이라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하고 바로 분석해보자.

우공은 자신의 집이 태항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란 두 큰 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두 산의 자신의 길을 가로막아 출입이 불편하다고 여겼다. 이에 두 큰 산을 옮기려는 미친 행동에 나섰다. 만약 단지 두 산이 그의 길을 막았기 때문이라면 집을 옮기면 되지 않는가? 왜 기어코 산을 옮기려 하는가? 이런 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산을 다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마침 길을 갈 때 발을 조심하지 못해 발에 가시가 박혔다면 가시를 뽑을 것인가 아니면 다리를 잘라낼 것인가? 우공의 사유방식에 따르면 다리에 가시가 박혔으니 단지 자신의 다리를 잘라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또 자손대대로 다리를 다 잘라야 하는데 심지어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는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우선 우공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연의 도를 위배해 생태환경을 파괴한 것이다. 불과 한 사람의 사적(私的)인 이익을 위해 함부로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운다면 이는 대자연 앞에서 과대망상으로 자연을 개조한다는 깃발을 들고 무지막지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중공이 하는 짓과 같은데 신주(神州) 대지를 온통 만신창이로 만들어 하루아침에 환경을 훼손시켰다.

그 다음 우공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손만대에 해를 입혔다. 우공은 산을 옮기기 위해 자신이 90여 년 흙을 날라도 옮기지 못하자 자손들에게 명령해 고생스레 일하게 했고 아울러 이웃 아이들에게까지 해를 끼쳤다. 태항산과 왕옥산의 흙과 바위를 옮겨 발해를 메우려 한다면 1년에 겨우 한번 왕복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선의로 이를 저지하려 할 때도 그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며 깨닫지 못하고 자신은 곧 죽으니 산을 옮기지 못하면 자손만대에 명령해 옮기게 했다. 이렇게 자자손손 무궁무진하게 한다면 오직 자손이 끊어지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우공은 자기 집안 자손들에게만 해를 끼쳤을 뿐인데 이런 사람이 만약 임금이라면 그럼 세계의 종말을 초래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열자는 우공의 고집스런 정신이 신령(神靈)을 감동시켰고 결국 신령이 우공을 도와 두 산을 다른 곳으로 옮겨 남의 집 길을 막아버렸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 신명(神明)에 대한 모독이다.

노자는 “큰 지혜는 마치 어리석은 듯하다(大智若愚)”고 했는데 열자는 아마 이런 정신을 표현하려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층차가 부족해서 도(道)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뚤게 간 것이다.

이 일화에서 드러내려고 한 것은 바로 우공의 그런 확고부동하고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우공은 이 덕성을 극치까지 발휘했고 그 어떤 덕성이든 다 그것을 극도로 발휘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관건은 반드시 그것을 정체(整體)속에 녹여 발휘해야지 절대 고립적으로 하거나 광적으로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정체 속에서 발휘했다면 그럼 극치로 갈수록 더욱 대단했을 것이다.

만약 우공이 이 덕행을 정체적인 덕행 속에 녹여내서 정체적으로 협력해서 시행했다면 그럼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다. 만약 이런 확고부동한 정신을 나쁜 일을 하는데 사용한다면 그럼 극도로 나빴을 것이며 천 년간 재앙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덕성이든 고립적으로 수립할 수 없다. 하나만 고립시키면 정체적인 평형점을 잃게 되고 극단적으로 고집을 피우면 악(惡)이 될 수 있다.

만약 우공이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우는 대신 산에 길을 냈더라면 설사 자신의 남은 여력을 다 소비하고 자손만대에 호소해서라도 산세와 지형에 따라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과 완벽하게 결합시킨 산길을 냈다면 천하 창생들을 편리하게 하고 또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자연히 사람들과 더욱 조화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왜 이런 덕행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않았는가? 오직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천지신명을 감동시켜 신적(神跡)을 나타내고 대덕(大德)을 성취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일은 바로 요만한 차이인데 위사위아(爲私爲我)로 개체만을 고립해서 강조하고 개성을 드러낸다면 극단으로 가게 되며 파괴분자가 될 수 있다. 오직 중용을 움켜잡아야지만 불패(不敗)의 지위에 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사에 늘 극치까지 해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실은 정반대인데, 중용의 도는 만사를 다 극치까지 해내고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함을 중시한다. 관건은 반드시 정체(整體)속에서 극치를 추구해야 하며 고립적으로 극치에 도달해선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파괴가 된다. 사물을 고립시키면 사실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私)’가 장난을 치게 되는데 이 역시 천하가 대도에서 벗어난 근본원인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역주: 군자는 화합하지만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굽혀서까지 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의견에 동조하고 무리를 짓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는 의미.]”[54]

이는 사실 중용의 지혜다. 천하 만물은 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다채로운 자연세계를 이룰 수 있다. 만약 천하 모든 것들이 다 하나같이 똑같다면 그럼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되겠는가! 이것이 바이러스와 암세포가 발전하는 방식이다.

중용의 도를 유지하고 정체적인 조화를 지켜야지만 자연만물의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만물이 각기 다르면서 서로 해치지 않아 세계가 다채롭고 비할 바 없이 아름답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만약 고립적으로 하나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곧 절도 없이 발전해서 자신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만물의 균형을 파괴해 만물이 모두 그것에 침해당할 수 있다. 바이러스, 암세포 및 사상을 통일하고 인식 통일을 요구하는 공산당의 인류에 대한 세뇌방법이 바로 이와 같다. 이렇게 만물의 다양성이 파괴되어 한 물건이 되면 세계도 훼멸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이불화(同而不和)다.

정체승화(整體昇華)

고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기 천하가 모두 대도(大道)를 행할 때 인류는 반신(半神)의 사회상태에 있었고 자연환경이 극히 아름다웠으며 도처에 다 기이한 꽃과 열매가 열렸으며 선계의 새와 짐승이 있었으며 만물이 서로 해치지 않았고 인류는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이를 그저 신화로 간주한다.

만물이 모두 도(道)속으로 돌아가 중용을 유지할 때면 정체적으로 향상해 천지 만물이 정체적으로 극히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류사회는 반신(半神)의 사회상태에 처하고 인류는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해 천지와 일체가 되어 만물을 화육(化育)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천하의 지극히 순수하고 무사(無私)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선천적인 본성을 드러낼 수 있고 비로소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사람의 선천적인 본성이 드러나야만 만물의 선천적인 본성이 모두 드러날 수 있다. 만물의 선천적인 본성이 모두 드러나야만 사람은 천지와 일체가 되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해 천지를 도와 만물을 화육할 수 있다.”[55]

《중용》에서는 또 말한다.

“지극히 순수하고 무사(無私)한 상태에 도달하면 장차 발생할 일을 미리 알 수 있고 자연 만물 중에서 일체를 미리 관찰할 수 있으니 마치 신령(神靈)과 마찬가지로 된다.”[56]

그러므로 천하가 정말로 중용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인류는 자연 만물과 공동으로 향상할 수 있고 극도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도달해 반신(半神)의 사회상태를 이룰 수 있다. 애석한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누가 진정으로 중용의 내함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제왕(帝王)이 되는 것은 인류의 다양한 직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며 오직 경계(境界)가 가장 높고 만물에 비해 높은 사람만이 만물의 왕(王)이 되어 만물을 이끌어 그들을 가장 아름다운 귀속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동시에 오직 자신을 가장 낮게 놓고 천하 만물보다 다 낮게 놓는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만물을 싣는 만물의 주재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성군(聖君)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다.

치국(治國)이란 극히 거대한 학문으로 인류의 지혜를 훨씬 초월한 것이다. 대도가 만물을 생성하니 진정한 지혜는 대도에서 내원한다. 대도는 치국의 근본이며 이런 지혜가 없다면 치국을 알 수 없다.

왜 노자의 《도덕경》을 낮은 층차에서 보면 전부 치국(治國)의 도리이고 보다 높은 층차에서 보면 진(真)을 닦아 신선이 되는 대도라 하는가? 왜냐하면 왕(王)이 되는 과정이 바로 자신의 경계와 지혜를 끊임없이 제고하는 과정이며, 합격한 왕의 표준에 도달했을 때 다시 말해 신(神)이 되거나 또는 대도진인(大道真人)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인이 말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예부터 오늘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왕(王)을 칭하고 패(覇)를 자칭했지만 이는 사실 무지한 표현이다. 마치 우물 속 개구리가 배를 부풀려 큰 소리를 내면 자신이 천하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진정한 왕(王)은 일반적인 범인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
54. 《論語》

55. 《中庸》:唯天下至誠為能盡其性。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56. 《中庸》:至誠之道可以前知。國家將興,必有禎祥;國家將亡,必有妖孽。見乎蓍龜,動乎四體。禍福將至,善必先知之;不善,必先知之。故至誠如神。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42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