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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무선종(樂舞仙蹤) 8: 음악으로 정치를 알고 화복(禍福)을 미리 알다

진우(真愚)

【정견망】

《악기》에서는 말한다.

“한 나라의 음악을 관찰하면 그 나라의 정치상황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속에서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 수 있다.”[1]

“태평한 세상[治世]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운데 이는 정치가 조화로움을 의미하고, 어지러운 세상[亂世]의 음악은 원망과 분노로 가득한데 이는 정치가 어그러진 것을 의미하며, 멸망하려는 나라의 음악은 슬픔과 근심이 가득한데 이는 백성들이 곤궁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음(聲音)의 도리는 정치와 통한다.

오음(五音) 중 궁음(宮音)은 임금, 상음(上音)은 신하, 각음(角音)은 백성, 치음(徵音)은 일이며, 우음(羽音)은 사물을 대표한다. 임금, 신하, 백성, 일(事), 사물(物)의 다섯 가지가 혼란스럽지 않으면 조화롭지 않은 소리가 없을 것이다. 궁음이 어지러우면 황폐해지니 이는 군주가 교만하고 방종함을 나타내며, 상음이 어지러우면 사악해지는데 이는 신하가 그릇됨을 나타내고, 각음이 어지러우면 근심스러워지니 이는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 찬 것이며, 치음이 어지러우면 슬퍼하니 나라에 일이 많기 때문이고, 우음이 어지러우면 위태로워지는데 나라의 재물이 부족한 것을 나타낸다. 오음이 모두 어지러워지면 서로 충돌하고 짓밟는데 이를 만(慢 방종)이라 하며 이 지경에 이르면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2]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음악으로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 및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미리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음악(樂)으로 치국(治國)하는 기능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신선습유(神仙拾遺)》와 《수서(隋書)·만보상전(萬寶常傳)》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만보상(萬寶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종률(鍾律 음률)에 통달했으며 팔음(八音 8가지 재료로 만든 악기)에 두루 뛰어났다.

어느 날 들에서 1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수레와 의복이 화려하고 아름다웠고 의장기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것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만보상이 이에 얼른 길을 피했다. 이때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만보상을 불러 말했다.

“상제(上帝)께서는 그대가 ‘음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을 보시고 장차 말세에 무너지는(壞) 음악에 팔음(八音)을 전해 구하려 하신다. 하지만 그대는 정시(正始)의 음악을 다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균천(鈞天 천계)’의 악관을 시켜 그대에게 심오한 팔음의 요결을 보여주라 하셨소.”

그런 후에 만보상을 자리에 앉히더니 역대의 음악을 빠짐없이 가르쳐주었고 어지러운 음악을 ‘바로잡아(正)’주었다. 잠시 후 신선들이 구름을 따고 떠나갔다. 만보상이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는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음악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북주(北周)가 망하고 수(隋)나라가 들어섰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수 문제 개황(開皇)초기 패국공(沛國公) 정역(鄭譯)이 ‘정악(定樂)’을 완성해 바치자 문제가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만보상이 말했다.

“이것은 망국(亡國)의 음악입니다. 슬프고 원망하며 경박하고 흩어지니(哀怨浮散) 바르고 우아한 음악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절대 연주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에 문제가 조서를 내려 만보상에게 악기를 만들게 하고 그 소리를 악기에 맞춰 연주하게 하니 이전의 것과 달랐다.

만보상이 또 말했다.

“주례에 선궁(旋宮)이란 뜻이 있었는데 한위(漢魏) 이래 음악을 아는 사람들도 모두 통하지 못했습니다.” 만보상이 음악을 창작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시험 삼아 연주해보게 하니 손만 대면 악곡이 만들어지니 모두들 기이하다며 감탄했다. 그가 악기를 손 본 사례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맑고 우아해 세속에 부합하지 않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자 결국 연주되지 않았다. 만보상은 태상시(太常寺)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무 자극적이고 슬프니 머지않아 천하에 서로 죽이는 일이 발생하겠구나.”

당시 천하가 태평하고 수나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들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수 양제(煬帝) 대업(大業) 말년에 그의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통전(通典)》에는 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수 양제(隋煬帝)가 강도(江都)를 순유하던 중 악공(樂工) 왕영언(王令言)의 아들이 궁중에서 집에 돌아와 문 밖에서 비파로 《안공자(安公子)》를 연주했다. 왕영언이 이를 들은 후 안색이 급변하여 내심 놀라며 아들에게 경고했다.

“너는 황상을 따라 강도(江都)로 가지 말거라. 이 곡(曲)에는 궁성(宮聲)이 없구나. 궁이란 임금을 대표하니 황상께서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수 양제는 정말로 강도에서 피살되었다.

《당어림(唐語林)》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조(唐朝) 개원(開元) 말년 서량부(西涼府) 도독이 신곡(新曲)을 바치자 당 현종이 여러 왕들을 초대해 음악을 감상했다. 곡이 끝나자 모두들 앞 다퉈 축사를 쏟아냈지만 유독 당 현종의 맏형인 영왕[寧王 역주: 원래 현종은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이고 적장자는 이헌(李憲)이다. 하지만 형제들이 모두 현종에게 제위를 양보했고 형제간의 우애가 유난히 좋았다. 영왕은 바로 현종의 큰형 이헌을 말한다.]만 아무 말이 없었다.

현종이 형님에게 연유를 묻자 영왕이 대답했다.

“이 곡조가 아름답긴 하지만 신(臣)이 듣기에, 한 악곡이 궁음(宮音)에서 시작하면 상음(商音)으로 끝나고 중간에 각, 치, 우 여러 음으로 이루어져서 처음과 끝이 모두 궁음과 상음에 호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악곡은 시작하자마자 궁조(宮調)에서 벗어났고, 중간에도 거의 쓰이지 않으며 상조(商調)는 난잡하면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신은 또 오음(五音)에서 중앙의 궁(宮)은 군왕을 대표하고 상은 신하를 대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궁조가 강성하지 못하니 군왕의 세력이 미약하고 상조가 지나치게 강하니 신하가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있습니다. 일이란 음률(音律)에 모습이 드러나고 노래로 퍼지며 인사(人事)에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은 언젠가 난신(亂臣)이 반란을 일으켜 황상을 핍박하는 재앙이 닥쳐 황상께서 혹여 유랑하는 어려움이 있으실까 두려운데 이 곡에서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음률에 정통했던 현종황제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황급히 장안을 탈출했고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는데 그제야 비로소 영왕의 지음(知音)과 예측 능력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계속)

주:
[1] 《樂記》:審樂以知政,而治道備矣。

[2] 《樂記》:治世之音安以樂,其政和。亂世之音怨以怒,其政乖。亡國之音哀以思,其民困。聲音之道,與政通矣。宮為君,商為臣,角為民,征為事,羽為物,五者不亂,則無怗懘之音矣。宮亂則荒,其君驕。商亂則陂,其官壞。角亂則憂,其民怨。征亂則哀,其事勤。羽亂則危,其財匱。五者皆亂,迭相陵,謂之慢。如此,則國之滅亡無日矣。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38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