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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목유서’는 어떻게 전해져왔는가

앙악(仰岳)

【정견망】

2023년 설을 맞아 악비(岳飛)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중국 영화 《만강홍(滿江紅)》이 개봉된 후 비평가들의 혹평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35억 위안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상영이 끝날 때 어떤 관객은 악비의 시사(詩詞)를 큰 소리로 외웠고 보다 많은 관객들이 악비 묘를 찾아 참배하면서 간신 진회의 무릎 꿇린 상을 쳤다. 이는 8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민족 영웅 악비의 정충보국(精忠報國) 정신이 이미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비의 신화에 가까운 생애는 단지 역대 문인들의 단골 소재였을 뿐만 아니라, 전설에 따르면 그의 용병(用兵)의 핵심을 담은 《무목유서(武穆遺書)》는 후대 작가들에게 가장 궁극적인 ‘보물’로 알려졌고 심지어 《무목유서》를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까지 전해졌다. 이 《무목유서》가 비록 허구이긴 하지만, 정사(正史) 외에 ‘무목유서(武穆遺書 무목이 남긴 서찰)가 유전(流傳)된 한 단락 실화가 있다. 이 책은 악가군(岳家軍) 최후 전투에서 비장한 역사를….

[역주: 앞에 나오는 《무목유서(武穆遺書)》는 악비의 용병심득(用兵心得)을 남겼다는 전설에 나오는 허구의 책이고 여기서 말하는 ’무목유서‘는 악비가 남긴 서찰이란 뜻이다. 한자가 같아서 헷갈릴 수 있으나 전혀 다른 뜻으로 쓰였다.]

평화협상에 대한 사면을 거절하는 표(謝講和赦表)[악비 진적(真跡) 탁본]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남송의 문인 주밀(周密)이다. 그는 송말(宋末) 4대 사가(詞家) 중 하나로 《무림구사(武林舊事)》, 《제동야어(齊東野語)》 등을 저술했으며, 경정(景定) 4년(1263년) 초 관직에서 물러나 한거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악가군 장령 양흥(梁興)의 손자 양겸(梁謙)이 악비가 올린 주장(奏章)을 가져와서는 제목을 써달라고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다 양겸의 조부 양흥의 알려지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소흥(紹興) 10년(1140년) 악비는 10만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제4차 북벌에 나섰고, 언성(郾城)과 영창(潁昌)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이 기간에 북방에서 응전한 양흥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는 충의병이란 의병을 이끌고 하동 원곡현(垣曲縣)에서 금나라 병사들을 크게 물리쳤고 10여 명의 금나라 장수를 포로로 잡았다. 나중에 제원현에서 금나라 장수 고태위(高太尉)의 5천여 철기를 대파해 시신이 10리에 이르렀다. 양흥은 파죽지세로 또 익성현(翼城縣)과 조주(趙州)를 수복하고 만여 명의 금나라 병사들을 물리쳤다. 또 악가군 본대의 악운(岳雲)은 배외군(背嵬軍)을 이끌고 주선진(朱仙鎮)에서 금나라 병사 50만 명(일설에는 10만 명)을 대파하고 곧바로 적의 수도인 황룡(黃龍)을 쳐들어가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대군이 막 주선진에 도착할 무렵 악비는 열두 차례나 고종이 금자패(金字牌)로 반포한 회군명령을 받았다. 조령(詔令)이 아주 엄하고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악비는 몇 차례 심사숙고 끝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 울음소리가 들판을 뒤흔들었고 몹시 애통해 했다.

악비는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일부 부대를 남겨 백성들의 안전을 보호 하며 닷새를 머물게 했다. 그는 또 양흥에게 본대가 곧 철수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양흥은 분통을 터뜨리며 홀로 군사를 이끌고 북방으로 가겠다고 직언했다. 악비는 양흥이 이미 결심을 굳힌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조심하라고 당부한 후 떠나기 직전 마지막 이별을 직감한 듯 친필 원고 세 통을 꺼내 양흥에게 주며 악가군의 충의(忠義) 정신을 이어가라고 격려했다.

악비는 군사를 돌려 조정으로 돌아가던 중 악진(岳震), 악정(岳霆) 두 아들을 강주(江洲)의 옛집으로 옮기게 했고, 가족에게 변고가 생기면 강을 건너 성을 바꾸고 은거하라고 당부했다. 또 진강(鎭江) 금산(金山) 천강사(天江寺)에 가서 도열(道悅)선사를 참배하자 도열은 악비더러 머리를 깎고 출가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악비는 원치 않고 임안(臨安)으로 돌아가 목숨을 바칠 것을 견지했다. 도열선사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배웅했다.

악가군 최후 전투

악비가 이 모든 것을 배치하는 동안 북방의 양흥은 충의군을 이끌며 악가군의 깃발을 내걸고 적진 후방에서 필사적인 작전을 펼쳤다.

충의군 이보(李寶)는 산동 일대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금병(金兵) 보급부대를 습격했다. 회양군에서 수십 기의 금병을 만나자 앞장선 금나라 장수가 “오는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치자 이보가 말했다. “나는 조주(曹州)에서 온 이삼(李三)으로 조정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는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 화살을 쏘아 금나라 장수를 죽였다. 그는 또 나중에 광제군(廣濟軍)과 서주(徐州)에서 적을 무수히 죽였고 70여 명의 금군을 포로로 잡아 초주(楚州)에 있는 한세충(韓世忠)의 군영(軍營)에 도착했다.

양흥은 조운(趙雲), 이진(李進), 우현(牛顯), 장욕(張峪) 등을 이끌고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금군 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대명부(大名府)와 개덕부(開德府)에서 연속으로 금군 후방부대를 습격해 금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양흥은 끊임없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충의군과 연락하며 출격했으나, 조정의 후원이 부족해 유격전을 치르다보니 싸우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저에 경동(京東)의 장귀(張貴)는 불행히도 금나라 장수 왕백룡(王伯龍)의 부대에 의해 궤멸되었고, 서경(西京)의 이흥(李興)은 어쩔 수 없이 낙양을 포기한 후 다시 반격에 나서 수안현(壽安縣)에서 금나라 장수 이성(李成)을 격파해 현지의 수만 민중이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보호했다. 수개월간의 고된 작전을 거쳐 악가군이 주둔한 악주(鄂州)로 돌아왔다.

이때 금나라는 다시 남송과 회서(淮西)전투를 벌이려고 끊임없이 병력을 늘려 양흥의 충의군을 격파하려 했다. 이때 양흥은 아무런 후방 지원 없이 고군분투하며 회주(懷州)와 위주(衛州)에서 적을 물리쳤다.

후대 문인들은 일찍이 《악장군채(岳將軍寨》)》를 지어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충의를 크게 실천해 구름처럼 떨치니, 사람의 피로 전투복을 물들였네.
남양에서 한 차례 전투로 적을 소탕하니 양흥은 본래 악가군이었노라.

太行忠義奮如雲,人血淋漓染戰裙。
一戰南陽餘孽掃,梁興本是岳家軍。

양흥의 부대도 싸우다가 물러나며 각종 시련을 겪었다. 결국 소흥 12년(1142년) 2월이 지나 악가군의 주둔지인 악주에 도착했는데, 이때 악비는 이미 진회에게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 이 비보를 들은 양흥은 화가 치밀어 올라 진회를 죽이고 악비를 위해 복수하려 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그를 만류했다. 원래 악비는 생전에 이미 악가군 장병들에게 “갑옷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려 남송을 계속 지키되 자신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했다. 양흥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고, 결국 조정에서 그의 전공을 인정받아 친위(親衛)대부・충주자사란 직위를 받았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을 청했다.

이렇게 벼슬에서 물러난 후 양흥은 절강 영가현(永嘉縣)에 은거하며 날마다 무예를 연마하는 외에 종종 홀로 술병을 들고 강가에 나가 앉곤 했다. 그는 악비가 전에 자신에게 준 세 장의 편지를 몸에 지녔고 지극한 보배로 여겼다. 그는 때때로 편지를 펼쳐보면서 통곡하곤 했다. 그러면서 “악후(岳侯 악비)의 충심은 해와 달을 관통하지만, 애석하게도 나 양흥은 그의 억울함을 풀어줄 능력이 없구나. 슬프구나! 원망스럽구나!”라고 탄식했다. 6년 후, 양흥은 울분으로 죽었다.

한편 이 사연을 듣고 크게 감동한 주밀은 자신이 감히 악비의 진적 위에 글을 쓸 수 없어 그저 해서로 공경하게 사관 장영(章穎)의 《악충무왕열전(岳忠武王列傳)》 4천 여 자만을 베껴 썼다. 마지막에 악가군이 군사를 돌려 회군하는 단락까지 썼는데, 결말까지 아직 91행이나 남았으나, 감정이 북받쳐 더는 쓰지 못하고 붓을 멈췄다. 그는 이날 있었던 사적을 간단히 서술한 후 이를 악비 진적의 머리글로 삼았다.

악비의 진적이 유전된 역사

악비의 진적은 양겸 이후 남송이 멸망한 후 원조(元朝) 고승 도은(道隱)·보원(普圓)·부광(溥光)법사 세 사람에게 전해졌다. 보광은 진적 위에 “충효와 절개가 본전(本傳)에 상세하니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원조가 멸망한 후 악비의 진적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군사를 일으켜 장사성(張士誠)과 교전하던 중 적진에서 이를 발견했다. 주원장은 곧 서달, 상우춘, 유백온 등 여러 신하들을 불러 함께 보고는 이런 글을 적었다.

악가군이 도처에서 적을 놀라게 한 것은 와룡에 비길 만하고,
회군하여 주상과 조화를 잃었으니, 죄는 고종에게 있노라.

岳家軍到處,驚敵比臥龍
班失羞主和,罪乃在高宗

명조(明朝)가 건국된 후 이 진적은 궁궐 내부에 소장되었다. 명조 말기 태감 풍희(馮喜)가 용천사(龍泉寺)에 가서 병을 고치자 사사로이 궁 밖으로 유출해 악비의 진적이 다시 민간으로 흘러들어갔다.

청조 초기 문인 전겸익(錢謙益)이 류만소사(柳灣蕭寺)에서 혜수(慧修) 스님을 찾아갔다. 혜수와 송원 시기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며 세상의 무상함에 탄식하는데 대화 도중 혜수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악비 진적을 꺼내 보여주자 전겸익이 이를 보고는 찬탄했다. 그는 혜수 스님이 관음불상을 건립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황금 3백 냥을 기부하고 이 진적을 구입했다. 그는 그 위에 한 수의 칠언장시를 써서 악비의 정충보국 일생을 서술하고, 또 이 진적이 남송에서 자신의 손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의 역사를 썼다.

전겸익이 세상을 떠난 후 청조 초기만 해도 악비가 대적했던 금나라의 주체 여진족이 청조와 깊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악비와 관련된 전설이나 문집은 일체 금지되었다. 그러다 건륭제(乾隆帝)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전기가 마련됐다. 건륭제는 악비 정충보국의 정신을 특히 앙모해 항주에 있던 악비 묘를 여러 차례 방문해 직접 제문을 쓰고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또 《악무목론(岳武穆論)》이란 글을 써서 기념했다.

건륭54년(1789) 항주 문인 황자원(黃子遠)이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악비의 진적을 지니고 당시 호광총독으로 있던 저명한 학자 필원(畢沅)을 찾아갔다. 필원이 진적을 보고는 감탄하며 “선현(先賢)의 유묵(遺墨)을 경모하며 오직 절을 올립니다.”라고 기록했다.

필원의 제기(提起)는 최후의 문자기록으로 건륭제가 악비를 존숭함에 따라 악비 생전의 문집 및 대를 이어 전해온 작품들도 후인에 의해 편찬되었고 한때 일본에까지 널리 전해졌다. 악비가 남긴 ‘충(忠)’의 문화는 이렇게 세인들의 보편적인 학습대상이 되었다.

역대 문인들이 전한 서예 작품은 그 수가 적지 않지만, 이렇게 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숭고한 제자를 써준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악비는 또 역대 제왕들이 추앙을 받아 제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이민족인 원과 청 두 왕조에서도 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후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악비는 ‘지주계급의 대표’, ‘농민봉기를 탄압한 살인마’ 등으로 무함 당했다. 때문에 항주에 있던 악비 묘는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고 악비 부자의 시신마저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중공이 파괴한 것은 단지 표면적인 유물일 뿐이며, 오랫동안 축적된 문화의 근원은 이미 중국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때문에 매번 악비와 관련된 문예 작품이 나올 때마다 흔히 큰 붐을 일으키곤 하는데, 이것은 바로 침전된 신전문화(神傳文化)가 세인들의 마음속에 정념을 불러일으켜 오랜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다. 이는 중공으로서도 영원히 훼멸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鄂國金佗稡編續編校注》(南宋)岳珂 原著 王曾瑜註解, 中華書局, 2018年出版
◎《岳忠武王文集》(南宋)岳飛原著,(清)黃邦寧纂修、李林校閱,乾隆三十五年刊本
◎《岳飛奏章草書墨跡研究初探》朱旭初著,古吳軒出版社,2019年出版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8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