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德惠)
【정견망】
명대(明代) 관원 축계지(祝繼志)는 절강 산음(山陰)현 천락(天樂)향 출신이다. ‘산음현’ ‘천락향’은 모두 고대 지명이다. ‘산음현’은 대략 지금의 소흥(紹興)시 월성(越城)구 일대이며 ‘천락향’은 항주(杭州)시 소산(蘇山)구 일대다. 축계지는 용모가 단정하고 정결하며 얼굴이 하얗고 광채가 비쳤다. 그는 명 세종 가정(嘉靖) 계축년(1553년, 가정 32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먼저 중앙(中央)에서 관직에 있다가 나중에 강서(江西)에 가서 ‘첨강서안찰사(僉江西按察事)’를 지냈으며 주재지는 남창(南昌)이었다.
어느 해 만수절(萬壽節), 즉 황제 생신날 그는 지방 관원 대표로 북경에 들어가 ‘만수표(萬壽表)’를 바치고 황제 생신을 축하했다. 돌아오는 길에 병에 걸려 각혈(咯血)하기 시작했고,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무엇인가에 감응했는지 그는 가부좌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부인에게 문득 말했다.
“내 병은 낫지 않겠지만 내가 죽은 후에 생명이 가는 곳은 인간세상 보다 훨씬 낫소.”
부인은 왜 그런 말을 하느냐며 놀라 물었다. 축계지는 고개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부인이 거듭 묻자 그는 “곧 알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당시 이들의 짐은 모두 싸서 관원들이 묵는 여관에 보관해놓았다. 어느 날, 그들 집안의 늙은 하인이 갑자기 서남쪽에서 하늘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더니 점점 가까지는 것을 들었다. 그는 황홀한 사이에 백마를 탄 신관이 공중에서 내려와 백마를 타고 대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백마 키가 창문보다 더 컸다. 대청에 이르자 신관이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었는데 안장도 매우 길었다.
신관(神官)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더니 노인을 무릎 꿇게 하고는 말을 전하게 했다. 신관이 말했다.
“지금 남창에 성황신이 부족해, 하늘에서 조서를 내려 네 주인더러 가서 이 결원을 보충하라고 하셨다. 너는 빨리 그에게 서쪽으로 부임하라고 전하라.”
노복이 일어나서 축계지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알리고 관복과 관모를 꺼내주며 계지에게 입도록 했다. 가족들은 모두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 실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노인이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축계지는 노복의 말을 믿고 관복을 입기도 전에 부인에게도 빨리 의관을 갖추게 하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새 술그릇을 꺼내 술을 가득 부어 향 탁자를 설치하여 신관을 맞이하라고 했다.
하지만 부인이 믿지 않자, 신관이 곧 분노했고 노복을 청사로 불러 수행한 부하들에게 노복을 묶게 하고, 20대를 때려 모두가 믿도록 설득하지 않은 죄를 벌주는 것이라고 했다. 노복이 형벌을 당하니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비명이 온 집안에 퍼지자 아무래도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의관과 예복을 갖추어 입고 축계지가 관복을 입고 관모를 쓰는 것을 도왔다. 축계지가 거실에 나오더니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관과 대화하고, 손님과 주인의 예를 행했다. 이를 보니 평소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것처럼 모든 예절이 갖추어져 있었다.
얼마 후 이 기이한 일이 알려지면서 구경하러 나온 동료, 나그네 등 많게는 수백 명까지 마당은 물론 바깥 도로까지 인파가 몰려 사람이 붐비고 물샐 틈이 없었다. 어떤 노비가 활을 들고 밖으로 화살 세 개를 쏘자, 비로소 군중들은 양쪽으로 조금 비켜서 길을 내주었다. 축계지는 신관과 이미 술을 마셨고, 축계지는 조정에서 쓰는 홀(笏)을 들고 공손히 서 있어서 마치 임명을 받는 듯했다.
잠시 후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짙게 깔리며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며 집들이 모두 벼락에 떨리는 것 같았다. 이때 축계지를 보니 그는 이미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모두 빨리 관을 사서 그의 유해를 수습했다. 관을 놓아둔 동안 사람들은 매일 끊임없이 연기가 관에서 때때로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연기는 마치 귀한 향신료를 태운 연기처럼 집 안이 온통 귀한 향기로 가득 찼고 심지어 가구까지 그을리고 밖으로도 향기를 풍겼다. 영구의 안치가 끝나고 관을 배에 실은 지 열흘이 넘도록 이런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한편 늙은 하인은 신관의 부하에게 20대를 맞은 후 열흘 정도 쉰 후에야 회복되었지만, 정신적으로 반응이 느려지는 문제가 있었고, 양손과 팔에 시퍼런 상처와 몸에 결박된 자국이 있었다.
훗날 당시 유명한 문인이자 화가였던 서위(徐渭)는 축계지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사(史)수재를 만나 이 기이한 일을 알게 되었다. 전희언(錢希言)은 또 서위의 말을 전해 듣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을 《회원(獪園)》이란 책에 기록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위는 절강 산음현 사람으로 축계지와 동향인데 자는 ‘문청(文淸)’, 후에 ‘문장(門長)’으로 고쳤다. 호는 ‘청등(靑藤)노인’, ‘청등(靑藤)도사’, ‘천지생(天池生)’, ‘천지산인(天池山人)’, ‘천지어은(天池漁隱)’, ‘산음 포의(布衣)’ 등으로 명대 중기의 문장가이자 서화가, 희곡 작가, 군사가였다.
필자가 서위의 문집을 찾아보니 《서문장문집》 제30권 중에 〈축첨사가 남창에서 신이 되다(祝僉事爲神於南昌)〉라는 글에도 축계지가 사후에 신이 된 사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전희언이 《회원》에서 기록한 것과 같았다. 아울러 서위는 특히 사(史) 수재에 대해 “믿을 만한 사람”으로 그의 말이 성실하고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이상의 기록에 따르면 축계지는 임종 직전 신관(神官)이 그를 맞이하러 와서 사후에 성황신이 됨을 알렸고, 또 일련의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오직 축계지와 노복만이 신관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당신이 못 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아님을 알 수 있다.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단계의 시작이다. 원신은 불멸하며 윤회전세(輪回轉世)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진상이고 무신론은 착오적인 가설이다.
자료출처: 전희언 《회원(獪園)》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