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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승상 섭리는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

유효(劉曉)

【정견망】

문창(文昌)은 원래 성관(星官)의 이름인데 바로 두괴(斗魁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위에 있는 여섯별의 총칭이다. 고대 점성가들은 이를 아주 귀한 길성(吉星)으로 여겼고, 도교에서는 그를 공명과 봉록의 신으로 추앙해 ‘문성(文星)’이라 불렀다. 수당(隋唐) 시기 과거제도가 생겨난 후 문창성은 특히 문인과 학자들의 숭배를 받았으며 이후로 문창이 ‘문무(文武)의 작록(爵祿 관작과 봉록)과 과거를 담당하는 근본’이라는 설이 생겨났다.

《성경(星經)》에 따르면 “문창의 여섯별은 반달형으로 북두칠성 첫 번째 별 앞에 있으며 여섯별 각각 이름이 있다”고 했다.

《사기》〈천관서〉에는 “북두 괴(魁) 위에 광주리 형상과 비슷한 여섯별이 있는데, 이를 문창궁(文昌宮)이라 부른다. 문창궁의 각 별 명칭은 첫째는 상장(上將), 둘째는 차장(次將), 셋째는 귀상(貴相), 넷째는 사명(司命), 다섯째는 사중(司中), 여섯째는 사록(司祿)이라 한다.”라고 했다.

송대(宋代)의 어떤 고서에 따르면 문창이 천기를 누설해서 인간세상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바로 원초(元初)의 대신 섭리(葉李)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섭리(葉李)는 자가 태백(太白), 호가 역우(亦愚)로 항주(杭州) 출신이다. 송말(宋末) 원초(元初)시기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비범하고 사람됨이 꼿꼿했으며, 20세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기수(氣數)가 다한 남송(南宋) 조정은 외척 가사도(賈似道)의 전횡 아래 이미 위아래로 부패가 심했고 인심(人心)이 좋지 못했다.

원(元)의 군대가 남송을 정벌할 때 가사도는 악주(鄂州)를 포위하고 있던 쿠빌라이와 개인적으로 몰래 화의 조약을 맺고는 몽골에 신하를 칭하며 공물을 바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는 조정에 악주의 전공을 거짓으로 부풀려 보고해 황제를 기만하고 조정의 권력을 독차지했다. 그는 또 공전(公田)을 창설하고 지폐를 남발해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게 했지만 조정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바로 이때 섭리와 국자감 학생 강체(康棣) 등 83명이 연명으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가사도를 비난하며 “기강을 어지럽히고 생령(生靈)을 독해해 신(神)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여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가사도는 이 상소를 작성한 주동자가 섭리임을 알고 측근을 시켜 그를 무고해 장주(漳州)로 귀양보냈다. 그는 가사도가 실각한 후에야 다시 자유를 찾았다.

이후 송조가 멸망한 후 섭리는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는데 주군(州郡)교수로 초청하는 관아의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그러다 지원 14년(1277년), 원 세조 쿠빌라이가 어사대부(禦史大夫) 상위(相威)에게 강남행(江南行) 어사대(禦史臺) 업무를 맡게 하면서, 송조의 어질고 덕망 있는 은사(隱士)들을 찾아가도록 했다. 이때 상위가 섭리를 천거했다.

예전에 섭리가 가사도를 공격한 상소문의 말미에 “재작년에 한 번 싸웠는데 마침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에 비로소 송조(宋朝) 강산의 절반을 지켜낸 공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었다.

세조는 매번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늘 크게 칭찬하곤 했는데 이번에 섭리가 천거된 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그에게 봉훈(奉訓)대부・절서도(浙西道) 유학제거(儒學提舉)란 관직을 주었다.

섭리가 이 소식을 듣고는 다른 곳으로 피해 은둔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가 이미 도착했다. 조서 외에 또 승상 안동(安童)이 그에게 따로 보낸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송조(宋朝)에서 충언(忠言)과 직간으로 세인들의 칭찬을 들은 것을 황상께서 마음에 새기시어 특별히 5품 관작을 수여하셨습니다. 지조가 있고 덕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시기(時機)에 따라 은거할 것인지 벼슬길에 나설지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출사한다면 전력을 다해 특별한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섭리는 이 편지를 읽고는 애초 은거하려던 계획을 바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며 말했다.

“관리가 되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은 평소 소원인데 어찌 황제의 조령(詔令)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관직에 취임했다.

지원 23년(1286년), 원 세조는 섭리를 도성으로 불러 만난 후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킬 방법에 대해 물었다. 섭리는 역대 제왕의 득실과 성패한 원인을 이야기했다. 세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닷새에 한 번꼴로 그를 입궁시켜 논의했다.

섭리는 또 이미 폐지된 유학을 관할하는 지역 관부(官府)를 부활시켜 달라고 상소하면서 이렇게 하면 “여러 학생들을 교육해 치국(治國)의 도를 똑똑히 알리며 태학에 인재를 양성하게 해서 조정에서 채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세조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당시 내안(乃顏)이 북부에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이정(李庭)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했다. 그런데 당시 부대 내 장교들이 대부분 몽골인이고 내안과 일족이었기 때문에 출전하려 하지 않았다.

세조가 이 일로 근심하고 있을 때 섭리가 세조에게 한 가지 방법을 비밀리에 상주했다. 즉, 한족(漢族) 군대를 전군(前軍)으로 삼아 도보로 전투를 벌이고, 큰 수레로 퇴로를 끊는 방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을 보이면 반군은 한족 보병을 우습게보기 때문에 분명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세조가 이 계획을 이정에게 알려주자 과연 반란군을 크게 이겼고, 세조는 섭리를 기재(奇才)로 여겨 매번 조회가 끝난 후 반드시 따로 불러 일을 의논하곤 했다.

또 1년이 지난 후 세조는 섭리를 어사중승 겸 상의중서성사(商議中書省事)로 임명했다. 섭리는 극력 사양하면서 어사대 관리들이 황제에게 밀봉 서신의 방식으로 상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언했다. 세조가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원조(元朝)에서 상서성(尙書省)을 설치하고 섭리를 자선(資善)대부 겸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임명했다. 섭리가 또 사양하려 했지만, 세조가 더는 사양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아울러 그의 다리가 아픈 것을 고려해 큰 수레와 작은 수레를 한 대씩 하사하고 작은 수레를 타고 입궁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또 전문적으로 그가 대전(大殿)에 올라가도록 부축하는 사람을 두었다.

섭리는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그는 재임기간에 지원초법(至元鈔法 일종의 화폐제도)을 처음 만들었고 또 태학(太學)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황제에게 역대 조대에서 교육을 중시하고 인재를 배출해 성상(聖上)의 은덕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주지(周砥) 등 10명을 좨주(祭酒)에 천거하고 학교에 관한 규장과 제도를 제정했는데 세조는 일일이 다 허락해주었다.

당시 세조가 강남에 있던 송조 종실(宗室) 및 대가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려 하자 섭리가 간언했다.

“송조는 이미 멸망했고 그곳 백성들은 고향에 편안히 살고 있는데 지금 아무런 이유 없이 이주시키신다면 반드시 의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만일 이 기회를 틈타 간사한 자들이 난을 일으키면 나라에 이롭지 못합니다.”

세조가 듣고는 정신이 들어 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 후 섭리는 상서우승(尙書右丞)・자덕(資德)대부가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기근이 발생한 회하(淮河)와 절강 일대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고 호광(湖廣) 등지에서 식량을 가져와 이재민을 구제하고 교지(交址) 등에 대한 정벌을 하지 말 것을 권했다. 세조는 그의 간언을 모두 받아들였다.

지원 25년(1288년), 세조는 섭리를 평장정사(平章政事 원조에서 승상 바로 아래 직위로 부승상에 해당)에 임명했지만 섭리는 또 단호히 거절했다. 이번에는 세조가 그의 의견을 존중해 옥대(玉帶 옥으로 만든 허리띠)와 평강(平江)의 밭 4천무를 하사하고 관작을 1등급 승진시켰다.

이때 상가(桑哥)가 상서성 승상으로 있었는데, 단기간에 공적을 세우는 데만 급급해 세금과 부역을 증가시켜 백성들을 해치다 탄핵당한 후 처형되었다. 당시 많은 신하들이 연루되었다. 섭리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동료로서 승상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섭리는 병을 구실로 남방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지원 29년, 섭리는 고향으로 내려가던 도중 다시 세조의 부름을 받아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어 승상인 완택(完澤)을 도와 중서성(中書省)을 관리했다. 하지만 얼마 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계신잡식(癸辛雜識)》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을 떠나기 전 섭리(葉李)는 꿈을 하나 꾸었다. 꿈에 한 선옹(仙翁)이 말했다.

“너는 원래 문창성의 승상이었는데 천기를 누설해 인간세상에 좌천된 것이다. 이제 네가 이미 잘못을 뉘우쳤으니 곧 천정(天庭 하늘 조정)으로 돌아가 복직할 것이다.”

선옹은 또 그를 문창성의 통명(通明), 대명(大明) 두 대전으로 데려갔다. 섭리는 네 수의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섭리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중 한수만 기억났다.

통명전이 자미원을 압박하자
한 갈래 붉은 구름 지존을 감쌌네.
아랫땅의 작은 신하가 삼가 고개 절을 올리나니
부디 혜택을 널리 퍼지게 하소서.

通明殿逼紫微垣
一朵紅雲擁至尊
下土小臣勤稽首
願將惠澤溥元元

여기서 자미원은 천제(天帝)가 사는 곳이다.

섭리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자신이 겪은 이 신기한 경험에 대해 기록했다. 이 시에서는 자신이 인간 세상에 떨어져 내려와 겪은 우환과 족병(足病)을 앓은 것은 모두 천기를 누설했기 때문인데 지금 다시 천제의 부름을 받으니 마음이 대단히 기쁘다고 표현했다.

섭리는 생전에 황제로부터 많은 것들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당연히 좋아야 했지만, 그의 생활은 오히려 아주 검소했다. 그는 일찍이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가난하고 간단한 생활을 즐기며 오직 충의(忠義)로 군주를 섬길 뿐이다. 너희들도 청렴하고 신중해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해선 안 된다.”

그는 또 하사받은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은 장차 모두 관청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이것을 모두 관청에 바쳤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하늘 조정으로 돌아간 섭리는 아직도 인간 세상의 학자들을 굽어보고 있을까?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3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