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화인(鍾華人)
【정견망】
4. 중화심법(中華心法)
(1) 도(道)
중화인맥을 구성하는 중화심법은 석도유(釋道儒) 삼가(三家) 사상으로 구성된다. 중화문화는 도(道)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진정한 중화인은 뼛속 깊은 곳에 모두 한 가닥 도기(道氣)가 관통되고 있다.
중화문화를 개창한 것은 선천대도(先天大道)와 대도(大道)이다. 도(道)는 널리 제도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단독전수와 청수(淸修)를 말한다. 때문에 줄곧 단독으로 전수했고 혼자 수련했기 때문에 사람의 오성과 도덕에 대한 요구가 대단히 높았다. 도덕 경계가 좀 낮은 사람은 도를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를 얻을 수 없었다.
상고시기 인류의 도덕경계가 비교적 높아서 오성이 좋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도(道)를 실천할 수 있었다. 도는 무위(無爲)를 중시하기 때문에 삼황오제 시기에는 무위로 다스렸다. 나중에 후세인들이 줄곧 무위의 다스림[無爲而治]을 말했고, 역사적으로 일부 황제들 역시 무위의 다스림을 말했지만, 그들은 진정한 무위의 다스림을 몰랐고 중화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모두 유위(有爲)의 다스림이었다. 아울러 그때 사람들은 또 무위의 다스림을 할 수 없었으니 도(道)에 통하지 못했다.
순임금 때 한 늙은 농부가 들판에서 땅을 두드리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해 뜨면 일하러 나가고 해 지면 쉬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고사는데 임금이 내게 무슨 덕이 있단 말인가?(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帝何德於我有哉)”
이것이 바로 무위의 다스림 하에 있는 백성들의 풍속과 도덕이다. 만약 도(道)가 통한다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추세에 따르되 약간 소통하고 이끌어주기만 하면 된다. 굳이 백성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에 따르기 때문에 마치 저절로 이뤄진 것 같고 백성들이 느끼기에 황제와 정부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다스림이란 뜻이다.
인류도덕이 추락하고 도가 통하지 않게 되었을 때 즉 무위의 다스림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때문에 노자는 “도(道)를 잃은 후에 덕(德)이 나타났고 덕을 잃은 후에 인(仁)이 나타났다. 인을 잃은 후에 의(義)가 나타났고 의를 잃은 후에 예(禮)가 나타났다.”고 했다.
이 짧은 한 구절이 인류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드러내는데 이는 또한 인류사회를 다스리는 방식이 추락한 과정이기도 하다.
즉 도치(道治 무위의 다스림), 덕치(德治), 인치(仁治), 의치(義治), 예치(禮治)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 도덕이 계속해서 추락함에 따라 예치(禮治)로도 사람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면 그럼 법치(法治)가 나타나는데 무수한 법률조문을 만들어내고 또 갈수록 조문이 많아져서 최후에 인류는 법률이란 새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결박해 출로(出路)가 사라져버린다. 뒤이어 인류는 훼멸로 나아간다.
인류 도덕이 철저히 붕괴된 후 이 자연 공생체도 해체되고 붕괴되어 천재(天災)가 끊이지 않고 세계 말일(末日)이 도래한다. 그래서 고대에 자연 재해가 발생할 때면 황제들은 늘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조서)를 발표해 자신의 도덕적인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다만 현대인들이 이를 믿지 않을 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삼황오제 시기는 도치(道治)였고, 그 후 서주까지는 줄곧 덕치(德治)라고 본다. 서주 이후에는 인치(仁治), 삼국 시대까지는 의치(義治), 송대(宋代)까지는 예치(禮治), 청조(淸朝) 말년에 이르러 예치 역시 끝나 법치(法治)가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은 심지어 법치(法治)조차도 사치가 되었고, 마귀가 주인이 되고,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아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이미 훼멸의 끝이 코앞에 닥쳐왔으며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여기서 말한 것은 단지 중화역사 발전의 한 가지 보편적인 추세일 뿐이며 중간에 또 특수한 사례들이 있다. 가령 한 조대(朝代)의 기수가 다할 때면 곧 마(魔)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천상(天象)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의 걸(夏桀)이나 상의 주(商紂) 등이다. 또한 인류사회의 도덕수준이 일부 특수한 상황에서는 또 되돌아 올라갈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중화역사의 최전성기인 대당(大唐)시기다.
중화 발전 과정을 전반적으로 둘러보면서 필자는 한 가지 법칙을 도출해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통치 방식과 인류 사회의 도덕은 반드시 같은 층차이고 서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만약 통치 방식이 사회의 도덕 수준보다 높으면 그럼 사회가 혼란해진다. 가령 도(道)가 통하지 않을 때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펼치면 전혀 통하지 않고 사회혼란이 극심해질 것이다. 반대로 통치 방식이 사회의 도덕 수준보다 낮으면 후과(後果)가 더욱 심각한데 사회도덕을 급격히 아래로 미끄러지게 만들어 사회를 타락시키며 결국에는 멸망으로 이끈다.
예를 들어 진조(秦朝)는 당시 사회도덕에 부합하는 인치(仁治)를 사용하는 대신 사회도덕보다 낮은 법치(法治)를 실행했기 때문에 신속히 멸망에 이르렀고 또한 당시 사회도덕을 타락시켰다.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사탄이 뱀으로 변신해 하와를 유혹하고 아담을 미혹시켜 함께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했다. 이후 둘은 오염되어 정욕이 생겨났는데 이때 그들의 도덕은 이미 타락해서 더는 전처럼 순결할 수 없었다. 그 금단의 열매는 또 “지혜의 열매”라고 하는데 그들에게 ‘지혜’가 생겨 심령(心靈)이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수치심이 생겨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살았으며 심령도 아주 단순해서 그다지 많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때 갑자기 복잡하게 변해 지혜가 생겨나고 수치심이 생겨 옷을 입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전에는 색욕심이 없었고 남녀의 구별이 없었으며 심령이 아주 순정해서 사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자재하고 대단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 심령이 오염되어 좋지 않은 것—색욕심(色慾心)이 생겼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상응하는 한 층의 ‘지혜’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으로 색욕심을 억제해 더 이상의 타락을 방지한 것이다. 그들이 만약 이 ‘지혜’를 발전시켜 수치심으로 색욕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그럼 그들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게 변해 수치를 모르며 급속도로 타락해 마귀로 변해 지옥에서 훼멸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래 순정(純淨)했을 때는 수치심이란 이런 저층(低層)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과 방해였을 뿐이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반드시 이런 저층의 ‘지혜’를 만들어 타락한 후의 도덕을 통제하고 계속적인 타락을 방지해야 했다.
따라서 사회도덕이 타락한 후에는 반드시 당시 사회도덕을 다스리는 방식과 저층 도덕에 부합하는 지혜(智慧) 심법을 만들어 타락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는 장차 인심(人心)이 통제를 잃어 급속히 훼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중화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무엇이 부족하면 곧 그것을 제창하곤 했다. 즉 덕(德)이 부족하면 덕으로 다스렸고, 인의(仁義)가 부족하면 인의를 제창했다. 지금은 신뢰(誠信)가 부족하니 날마다 신뢰를 주장한다.
마치 공자가 노자에게 도를 물었을 때 노자가 공자에게 말한 것과 같다.
“당신이 제창하는 인의(仁義)는 파리나 모기와 마찬가지로 윙윙 시끄럽게 울면서 사람마음을 흔드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계가 서로 다르고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의 경계였지만 노자는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신도(神道)의 경계였다.
따라서 인의(仁義)는 사람에 대해서 공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천경지의(天經地義)로 사람의 지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노자에 대해 말하자면 오히려 층차가 아주 낮은 번거로움에 불과하며 이는 타락한 이후의 표현이다. 때문에 태도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또 말한다.
“상덕(上德)은 덕이라고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있다. 하덕(下德)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없다.”
(2) 유(儒)
도(道)는 널리 제도함을 말하지 않고 단독 수련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람의 도덕 경계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높다. 때문에 인류가 타락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오성 역시 갈수록 더 낮아져 영성(靈性)을 잃었고 도는 서서히 일반 백성들과 더욱 멀어졌다. 일반인들은 더는 선인(先人)들처럼 그렇게 도를 깨닫고 도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동주(東周) 시기에 이르러 인류 도덕은 이미 아주 심각하게 떨어져 내려왔다. 이때는 사회적으로 오직 일부분 오성이 좋은 사람들만이 여전히 도(道)속에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도에서 점차 멀어져 서서히 심법(心法)의 단속을 잃어버렸다. 만약 이때 일반인들에게 적합한 심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럼 곧 아주 위험해지는데 인류사회는 곧 급속히 타락해 훼멸로 나아갈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 백가쟁명(百家爭明)이 나타났고, 유가(儒家)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가는 사실 도(道)의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도가 세간소도(世間小道)의 부분인데 다시 말해 입세(入世)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도덕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낮고 이 때문에 사람의 오성에 대해서도 무슨 요구가 없어서 평범한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워 점차 사회 대세와 주류가 되었고 이를 통해 중화심법(中華心法)에 녹아들어가 중화인맥(中華人脈)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인상(人象)의 변화를 추동했다.
유가는 도(道)의 입세(入世) 부분이기 때문에 유가의 연원은 아주 깊다. 유가에서 도통(道統)이란 말을 하는데 즉 유학이 전승된 맥락을 가리킨다. 요순(堯舜)에서 시작해 상탕(商湯)에게 전해졌고 다시 주문왕(周文王) 등 선대(先代)의 성왕(聖王)들에게 전해졌으며 나중에 공자에게 전승되었다. 공자가 이를 정련하고 또 규범을 정리해 이로부터 유가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다만 공자 이전에는 유가가 무형이었고 도속으로 돌아갔다면 공자에 이르러 비로소 규범을 정리하고 설명을 덧붙여 유가사상이 명확하게 독립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 후 공문(孔門)제자들 및 선진제자(先秦諸子)의 계승과 발전을 거쳐 서서히 성숙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불행한 것은 공문에 순황(荀況 순자)이란 사람이 나타나면서 공문의 심법을 어지럽히고 따로 한 세트의 왜곡된 이론을 만들어 성(性)은 본래 악(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두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들이 상앙(商鞅) 등과 함께 무슨 법가(法家)란 것을 만들어 세인을 미혹시키고 진조(秦朝)에 화란(禍亂)을 초래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통치 방식이 사회도덕보다 낮으면 사회도덕을 급격히 아래로 떨어뜨려 사회의 타락을 추동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마약이나 각성제를 사용해서 일시적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것처럼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것 같은 가상(假象)을 낳을 수 있다. 즉 상앙이 실행한 소위 변법(變法)은 일시적으로 진(秦)의 발전을 촉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도덕을 타락시킨 것이다. 다행히 진(秦)은 곧 변법을 폐지했다. 상앙이 본래 상정했던 것은 엄혹한 형벌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 했지만 최후에는 자신이 만든 법률에 갇혀 거열형(車裂刑)을 받고 죽으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법가는 권세(權勢)와 권술(權術)을 중시하고 엄혹한 형법을 좋아했으며 일반 백성들을 금수(禽獸)처럼 취급했다. 백성을 노예로 만드는 술(術)을 중시하고 전제(專制)와 폭정(暴政)을 떠받들었으며 무슨 도덕을 말할 나위가 없어 인류를 해쳤다. 그러므로 법가를 대표하는 세 인물[역주: 상앙, 한비, 이사] 중 누구도 선종(善終)하지 못했는데 두 명은 고문을 받다 죽었는데 상앙은 오마분시(五馬分屍) 되어 죽었고 이사는 허리가 잘려 죽었다. 또 한비는 자신의 동문인 이사의 질투심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
진조(秦朝)는 법가를 대단히 중시했는데 특히 진시황 때는 유가를 배척하고 폭정과 우민(愚民)정책을 실시해 사학(私學)을 폐지했으며 천고에 웃음거리가 된 분서갱유가 있었다. 갱유(坑儒)란 무슨 손실이랄 게 없었지만 분서(焚書)는 당시 유가 경전을 거의 실전될 정도로 만들었다. 다행히 진조의 역사는 아주 짧았고 한대(漢代)에 이른 후 살아남은 원로 유생들이 기억에 근거해 유가경전을 복원했다.
이것은 유가 역사상 최초의 큰 겁난이었다. 이 겁난을 겪은 후 유가는 한조(漢朝)에서 신속하게 발전했는데, 특히 한 무제(武帝) 때 유술(儒術)만을 존숭해 이후 유가가 사회대세가 되어 중화심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가게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설명할 것은 동주 시기 백가쟁명이 한대(漢代)에 이르면 백가(百家)를 구류(九流)로 귀납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사실 바로 양가(兩家)인데 하나는 노자의 도가이고 다른 하나는 유가다. 그리고 도가는 백가를 훨씬 뛰어넘은 것으로 후세인들이 도가를 구류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도(道)에 대한 불경이자 모독이다. 도가는 마땅히 구류 위에 있어야 하며, 구류 중 도(道)를 제외하면 오직 유가(儒家)만이 인류의 올바른 문화이며, 근원이 있고 도통의 전승이 있는 것으로 도의 입세(入世) 부분에 속한다.
다른 유파는 모두 근원이 없는 것으로 왜곡된 사설(邪說)로 무리를 결성해 세력을 형성한 것들인데 가령 법가(法家), 묵가(墨家)의 유이다. 또 도가의 세간소도 부분에 속하는 것들이 있는데 병가(兵家)와 음양가(陰陽家) 등이고 근본적으로 구류에 넣을 수 없으며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는 잡가(雜家)와 명가(名家) 등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도(道)와 유(儒)만 살아남아 중화심법에 녹아들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수명이 짧아 형세를 이룰 수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통치방식은 반드시 사회도덕과 일치해야 하는데 사회도덕보다 높으면 작동하지 못해 다스릴 수 없으며, 사회도덕보다 낮으면 비록 잠시 우연히 회광반조 할 수는 있어도 지속될 수 없으며 결국에는 인류도덕을 타락시켜 멸망을 촉진한다. 그러므로 유일한 방식은 가급적 사회도덕을 향상시키거나 적어도 사회도덕이 현상을 유지하게 해서 지속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한다.
도가의 사회도덕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서주(西周) 이후 인류도덕이 서서히 타락함에 따라 도(道)는 서서히 일반인들과 멀어졌고 도덕이 고상한 소수 사람들의 심법이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에서 갈수록 더 멀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은 심법의 단속을 잃어버렸고 사회도덕의 미끄러짐이 가속화되어 동주(東周)의 예악(禮樂)을 붕괴시켰다.
이때 시급히 새로운 도덕심법으로 사회를 단속해야 했다. 그런데 이 심법은 반드시 도(道)의 기점보다는 낮아야 했으며 모든 일반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고 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공자가 나타나 유가사상을 정련하고 정리해 내어 새로운 도덕심법을 만들어 사회도덕을 안정시키고 어느 정도 도덕의 미끄러짐을 억제한 것이다.
당시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道)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의 심법(心法)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도덕이 고상한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도(道)속에 있었다. 한조(漢朝)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 사람들은 늘 존재했으며 아울러 사회에 영향을 끼쳐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가령 당시 일부 수양이 있는 사대부나 은사(隱士)들이다.
그러나 이후 위진(魏晉)시기에 이르러 도덕이 계속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이 소수 사람들 역시 서서히 사라졌다. 이때 도를 얻고 도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아주 희귀해졌다. 하지만 이런 대도고사(大道高士)들은 이후 중화 역사에서 비록 많진 않아도 줄곧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이때 도(道)가 몰락해 더는 사회 대세와 주체사상이 될 수 없게 된 후 곧 유(儒)와 불(佛)에 자리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이때 타락한 세인들은 이미 더는 도(道)의 참뜻을 깨달을 수 없었고 저급한 층차 속에서 멋대로 도의 뜻을 해석해 대도(大道)를 난잡하게 오염시켰다. 마치 위진 시기 하안(何晏)의 무리들처럼 소위 명사(名士)가 오석산(五石散)을 먹으며 각종 난해하고 괴상한 주장을 펴면서 방탕하기 그지없는 것과 같은데 사실상 마성(魔性)을 크게 발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도는 이에 이르러 타락했다.
이후 대도(大道)는 또 도교(道敎)로 발전했고 흥성해졌는데 특히 명조(明朝)나 일부 시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도를 닦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대도가 아니라 불교와 섞여 개량을 거친 후의 도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검토할 것이다.
계속해서 유(儒)의 발전에 대해 말해보자. 유는 한조(漢朝)에 확립되어 대세가 되었고, 청말(淸末)까지 서서히 발전하면서 줄곧 사회심법을 주도했다. 왜냐하면 유가(儒家)는 삼가 사상 중에서 가장 낮고 입세 부분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줄곧 사회의 주요한 심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도덕이 타락함에 따라 유가 역시 서서히 타락해 괴멸(壞滅)로 나아갔다. 그중 가장 큰 한 차례 변화는 송조(宋朝)에 있었다. 현대인들은 고대 유생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곧 진부하고 고지식하다는 등의 단어를 떠올리곤 하는데, 사실 송대(宋代) 이전의 유생들은 이렇지 않았다. 그때의 유생들은 모두 아주 비범하고 소탈했으며 고상하고 우아했다. 그러다 송대 이후 이학(理學 성리학)이 흥성해지면서 서서히 진부하고 고지식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유가의 한 차례 큰 개량이었다. 그렇다면 왜 개량되었는가? 필자가 보기에 송대 이후 사회도덕이 계속 타락함에 따라 이전의 유가사상으로는 더 이상 사회도덕을 단속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학(理學)이 흥성해졌고 당시 사회도덕에 적응함에 따라 사회도덕의 지속적인 미끄러짐을 저지했던 것이다.
이후 유가는 인류 사회의 도덕과 함께 점차 타락했고 청조(淸朝) 이후에 이르러 멸망으로 나아갔는데 이 역시 역사발전의 추세이다.
청말(淸末), 서방 학문이 동방으로 들어오면서 서방의 저층 과학과 문명이 서서히 중국에 유입되었다. 서방 과학과 문명은 범인(凡人)의 층차라서 그 어떤 고층의 내함(內涵)이 없고 층차가 아주 낮아 유가보다도 더 낮았다. 당시 사회도덕은 이미 서서히 타락해서 유가의 심법조차 적합하지 않았으며 더는 몰락한 유가심법으로 단속할 수 없었다. 때문에 서방 문명으로 서서히 대체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완전히 서방화되어 염황(炎黃)의 향불이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3) 석(釋)
불교는 우리 중화의 본토 문화가 아니라 인도에서 건너온 것이다. 하지만 노자, 석가모니와 공자는 모두 동시대인들이다.
그렇다면 왜 불교는 중화에서 발생하지 않았을까? 필자가 인류 문화의 층면에서 분석해 본 결과 만약 불교가 중화 대지에서 발생했다면 그럼 유가(儒家)가 발전해서 주요한 중화심법으로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도가(道家) 역시 서서히 역사 무대에서 퇴출당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불교(佛敎)는 사람을 널리 제도함을 말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고, 모두 제도할 수 있으며, 문턱이 낮아서 모든 백성을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도(道)와 다르다. 도는 사람을 선별하지만 부처는 선별하지 않으며 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아울러 부처는 내원이 극히 높고 근원이 아주 깊으며 또한 사상 경계가 대단히 박대(博大)하고 고심(高深)해서 이 한 점에서 도(道)에 못지않고 유(儒)보다는 훨씬 높다. 때문에 만약 석가모니가 노자가 막 5천언을 쓰고 공자가 유가를 열 당시에 중화에 태어났더라면 공자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고 도(道)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퇴출당했을 것이다. 때문에 불교는 줄곧 한조에 이르러 도(道)가 몰락하고 유가(儒家)가 성숙해서 대세를 이룰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중국에 전래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문화 층면에서의 분석이다.
불교가 전래되어 들어온 후 한 대(漢代)에는 아직 도(道)와 유학(儒學)을 숭상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줄곧 보편적으로 알려지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때문에 줄곧 보급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서서히 전파되면서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널리 보급되었는데 특히 양조(梁朝)에 이르러 극도로 발전했다.
그 이후 불교는 완전히 중화심법에 깊이 녹아 들어가 삼가(三家) 주체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도가가 서서히 몰락한 후 줄곧 도덕이 고상한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전되면서 더는 전체 사회에 보급되어 대세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일부 사람들이 반발했다. 때문에 불교가 전래된 후 도가(道家)는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불가(佛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개선해서 또한 종교 형세를 형성했으며 도교(道敎)로 발전되고 개량되었다.
때문에 도(道)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는데 문턱을 낮췄으며 더는 단독 수련이 아니었다. 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았고 더는 사람을 고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명조(明朝)에 이르러 어느 한 시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를 믿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개량한 것이라 필경 순수하지 못하고 원래의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후 서서히 몰락했고 더는 흥성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고층차의 원인이 있다. 필자는 여기서 고층차의 원인이 아니라 단지 사람 문화 층면에서만 분석할 뿐이다. 독자 여러분이 만약 보다 많고 보다 높은 원인을 알고 싶다면 파룬궁(法輪功)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저서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법이 말법(末法)에 이르면 더는 사람을 제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때 마왕 파순은 마자(魔子)와 마손(魔孫)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어 그의 절에 들어가 그의 경서를 손에 들고 계율을 파괴하며 그의 법문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는 마왕의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는 일찍이 자신이 전한 불법이 결국에는 부패하고 타락하는 결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승려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거느리는데, 명예와 이익을 위해 다투고 싸우며, 사찰을 관광 명소로 개발해, 부처님을 팔아 돈을 벌고 명예를 날린다. 이것이 가사를 걸친 마왕의 자손이 아니란 말인가?
불교는 이미 타락해서 말법이 되었는데 석가모니는 이미 2천 여 년 전에 이를 보았던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238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