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수련이란 마음을 닦는 것으로 비록 마음을 닦는 길에 마난(磨難)이 가득하지만, 심마(心魔)는 구별하기 어렵고, 참과 거짓은 구별하기 어려우며, 진식(真識)은 지키기 어렵고, 진심(真心)은 연마하기 어렵다. 총체적으로 미혹의 안개를 걷어내 진아(真我)를 되찾으려면 어려움이 더욱 심하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연마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마음이지만 진심(真心)은 오히려 이 속세에서 진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늘 외면(육체)에 싸여 있다. 이렇게 오래 머물다 보면 사회라는 이 큰 염색 항아리에 물들어 생각이 많아지고 일 처리가 교활해져서 자사자리(自私自利)를 배워 남에게 손실을 주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데, 얼굴 피부는 진심을 가리는 가면이 된다. 속담에 “사람 마음은 가늠하기 어려워서 외부인은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오직 마음을 잘 관찰하는 사람만이 그중 일부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전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서유기》는 누구나 잘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속담에 “아는 사람은 비결을 보지만 모르는 사람은 떠들썩함 본다”는 말이 있다. 《서유기》는 명대(明代)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왔음에도, 수백 년간 그 인기가 식지 않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특이한 책이다. 만약 《서유기》가 없다면 인생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중생이 속세에 미련을 지니는데 인생이 또 어찌 서쪽 여행[西遊]에 한걸음에 불과하겠는가? 비결을 보든 떠들썩함만 보든 늘 끝없는 흥취가 있다. 어쩌면 오직 서쪽 여행 중에 神目이 번개처럼 번쩍이고, 요마(妖魔)를 물리치며, 진심(真心)을 단련하는 《서유기》의 다채로운 이야기만이 사람의 본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길을 잃은 속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마다 모두 《서유기》에서 자기 내심의 그림자를 비춰볼 수 있다면 비교적 마음에 가까워질 수 있는데 자신의 초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을 보면서 미묘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고금을 돌아보면 작품의 깊이나 폭 및 인기에서 《서유기》는 그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
서쪽 여행의 첫째 주인공은 비록 당승(唐僧)이지만 두 번째 조연인 미후왕 손오공에 의해 종종 압도되며 심지어 사람이 너무 정직하고 어눌해서 세 번째 조연인 저팔계에게도 놀림을 당한다. 형들보다 정직하고 둔한 사승(沙僧)마저도 그보다 능력이 뛰어나 주인공의 무능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또한 요마귀괴(妖魔鬼怪)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체격을 지녔고, 처음부터 당승의 고기를 한 입만 먹어도 영생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가는 길에 줄곧 요괴들의 주목을 받는다. 때문에 수많은 요괴들은 기미만 보고도 움직이고 일찍부터 솥을 걸어놓고 기름을 끓이고 장작을 준비해 당승이 자기 영역으로 올 때까지 기다린다. 당승을 잡기만 하면 바로 냄비에 넣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에 당승의 존재는 그 자체가 미끼처럼 비참해졌다. 반면 오공은 번개가 치고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또 천궁(天宮)에 돌아가 큰 소란을 피우고 제천대성(齊天大聖)이란 칭호까지 빼앗아 온다. 반면 당의 대장로(大長老)는 처음부터 줄곧 기름 가마와 색의 유혹이 따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대체 누가 이런 소문을 퍼뜨렸는가? 분명 화상(和尙 젊은 승려들의 스승이 될 만한 뛰어난 자질을 지닌 승려에 대한 존칭)이 될 운명임에도 또 여전히 준수한 외모를 지녀 화상에 멈추지 않고 팔방(八方)의 요마들을 끌어들여 침을 흘리게 만든다. 그것들은 모두 당승을 잡아먹거나 아니면 그와 결혼하려 한다. 고비마다 모두 목숨이 위험한데 한입에 삼키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아울러 무능하고 연약한 주인공 당승은 요마귀괴의 박해에 직면해 생사의 관두에서 오직 한마디 말뿐이다. “나는 동토 대당(大唐)에서 경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아울러 언제라도, 설사 육신을 버릴지라도 늘 신념(信念)을 지키며 내려놓지 않아야지만 겨우 고험(考驗)을 통과한다. 이렇게 위험이 해소되고 어려움이 상서로움으로 변하면 여러 신선들이 앞다퉈 그를 구하러 온다. 바로 이 한 구절 대사에 드러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주인공의 위치를 다져주었다. 사부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 및 요마귀괴에 대한 정념(正念)을 볼 수 있는데 고험 속에서 생사를 내려놓고 반드시 진경(真經)을 얻어 중생을 구도하려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만이 취경(取經)에 성공하는 관건이다.
《서유기》 일화 속의 당승은 확실히 실존 인물인 역사상의 현장법사(玄奘法師)지만 오공 등 다른 세 도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순전히 허구에 속할 것이다. 이야기의 줄거리 역시 실제 역사와는 좀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마치 허구처럼 보이는 이런 일화들이 실제 역사를 백배 천배 능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만약 《서유기》가 널리 전해지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 현장의 진실한 사적(事跡)을 아는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일에 우연이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또 세인들에게 무엇을 예시하려는 것일까?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5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