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화하(華夏) 5천년 역사가 다진 문화를 두루 살펴보면, 깊이 말해 모두 수련 문화다.
불가, 도가, 유가, 의가(醫家)라도 좋고, 72종 전문업종이라도 좋은데 모두 조사(祖師)를 모시며 대대로 전해지는 민족정신은 바로 영혼 깊은 곳의 신전문화(神傳文化)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세간 만물(萬物)은 법(法)을 위해 왔고, 《서유기》는 특히나 유석도(儒釋道) 삼교 문화를 포괄하는데, 각각의 대표 인물들이 등장하거나 심지어 구원에 나서 다양한 방식으로, 서쪽 여행 과정에 참가한다. 목적은 최후 정법(正法)에 필요한 수련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당승의 이 한 차례 서쪽 여행은 후세 말법(末法) 시기 신구(新舊) 우주의 교체를 위한 복선이 되며 참여한 인물들도 한편이 되어 인연을 맺고, 정법의 편에 서서 자신의 미래를 위한 기초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신구 우주의 교체와 관련된 수련이념을 어찌 몇 마디 말로 똑똑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치 역사 이야기의 악비(岳飛)처럼, 비장하고 짧은 일생으로 생명을 이용해 세인들에게 ‘충(忠)’이란 한 글자를 연기하는 것과 같다. 또 《삼국연의》라는 책 전체를 사용해 ‘의(義)’라는 한 글자를 생생하게 풀어낸 것과 같다.
인류 도덕의 바탕을 수호하는 충효절의(忠孝節義)란 네 글자는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세인을 구하려면 진정으로 알아야 하고 또한 내심으로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사람 마음속의 탐욕과 욕망을 단속해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하며 또한 《24효(孝)》, 《열녀전》 등의 이야기를 세인들에게 들려줘 세인들이 충(忠)이란 글자를 언급하기만 하면 악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속에 모범이 떠올라야 하고 또한 어떻게 말과 행동을 규범하고 실천하는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옛 성현(聖賢)이 전한 말씀과 행동의 가르침을 통해 말할 수도 있는데, 사명을 지닌 사람이 평생의 경력을 통해 그 함의를 설명하고 책으로 만들어 대대로 전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의 도덕 이념이 사람 마음에 깊이 들어가게 해야만 사람 마음을 단속하고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전통문화는 장차 말법말세(末法末世)에 이르기까지 인류 도덕을 수호하고 정법을 얻을 때까지 기다릴 기회가 있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도에 패괴(敗壞)되면 신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누가 와서 정법에 참여해 구도마저 포기하고 한 가닥 생기(生機)조차 남기지 않는 이런 일을 한다면 이런 것은 신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말법말세에 도덕이 패괴한 지금, 아직도 내심에 한 가닥 청명(淸明)을 간직할 수 있고 가상을 꿰뚫어 이 한 가닥 생기(生機)를 잡을 수 있으며, 진상을 듣고 천기를 증득(證得)해 법을 얻고 수련해 정법제자(正法弟子)가 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뭇신들이 중시할 만한 생명이며, 우주 신명(神明)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정신(正神)으로 수련 성취될 것이다.
지금까지 천만년의 기다림은 바로 이 순간 법을 얻어 수련하기 위한 것으로 역사상 거의 모든 신들이 다 참여해 자신의 문화를 남겨 장래에 자신을 일깨울 계기로 삼도록 했다. 그러므로 션윈(神韻) 공연이 신속하게 유명해지고 전 세계를 석권하게 된 이유는 션윈이 보여주는 전통문화 이야기들이 모든 중생을 일깨울 수 있는 계기이기 때문인데 만고(萬古)의 기연(機緣)은 오직 지금 순간 각성을 위한 것이다.
말법말세의 오늘 우리가 직면한 것은 예언 중의 대도태(大淘汰)다. 사람 마음을 개변해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면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션윈뿐이다. 우리는 오직 전통문화를 회복해야만 인류의 영혼을 각성시킬 수 있다. 도덕을 다시 닦고 심령(心靈)을 정화하며, 사유(思惟)를 새롭게 하고, 생명의 경지를 승화시켜야만 신우주(新宇宙)로 넘어갈 수 있다.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큰 마장(魔障)은 바로 물욕(物慾)인데, 사람 내심 영혼 깊은 곳에서 내원한 선량(善良)이 금전과 물욕에 매몰되어 진상을 보지 않게 만들어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한다. 이 층 물질 껍데기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장벽이며 사람의 본성을 가로막고 진상을 듣지 못하게 한다.
필자가 가장 먼저 해석하고 싶었던 것은 원래 《홍루몽(紅樓夢)》인데 이 책은 세인들에게 인과를 풀어내는 것에 중점을 두어 한 무리 어리석은 남자들과 억울한 여자들의 사랑과 원한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과를 이용해 정에 빠진 세인들에게 홍진(紅塵)을 간파할 한 사발의 냉수를 뿌지는 것이다. 몇이나 청성해질 수 있는가는 오성(悟性)을 보아야 한다. 요컨대, 어진 사람은 인(仁)을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智)를 본다. 같은 이야기라도 심성에 따라 온갖 다양한 세상의 정과 맛을 보아낼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붉은 누각은 세속의 가장 표면이자, 사람이란 이 한 층 물질에서 가장 깊은 층을 깨는 연기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높다.
게다가 나는 학창 시절 3년간 《홍루몽》을 보았고, 그곳에 등장하는 여러 여인들의 숙명을 통해 속세를 간파했다. 왜 인생이란 슬픔 한 마당 기쁨 한 마당으로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꿈속의 사람을 지켜볼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은가? 수많은 인생을 바라보면서 온갖 조화(造化)를 얻을 수 있는데 꼭 직접 경험할 필요도 없다. 또 붉은 누각의 꿈은 모두 환상임을 간파할 수 있으며 모든 것들은 다 하품(下品)이고 오직 독서만이 높은데 책 속에서 온갖 것을 보는 것이 백번 윤회하는 것보다 나아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매년 션윈(神韻) 프로그램을 보면 4대 명작 중 유독 《홍루몽》만 빠졌다. 생각해 보니 《홍루몽》 이야기는 너무 세속적이고 여인들의 세계에서 꿈속 장면을 깨뜨리는 것이라 말로 하기가 쉽지 않다. 정욕(情慾)이 가득한 사람이 보는 것은 넘치는 물욕이지만, 평상심으로 보아만 비결을 볼 수 있고, 순정하게 수련하려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그 속의 깊은 맛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장면이 너무 많고 또 단편적이라 해석하자면 필연적으로 가장 표면의 물질 껍질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지금 시기에는 좀 적절하지 않다. 더욱이 《홍루몽》은 미완성작으로 후인이 나중에 첨가한 뒷부분 40회는 원래 정해져 있던 인물들의 운명을 뜯어고치고 인정화(人情化)해서 작가의 원래 뜻이자 《홍루몽》의 정화적인 부분을 상실했으니 이 역시 큰 패착이다.
《홍루몽》의 흠결은 아마 하늘의 뜻일 것이다. 본래 최후 정법시기는 신(神)들조차 가장 진실한 결말을 볼 수 없다. 사람이 일단 정법 수련에 들어가기만 하면 곧 운명이 바뀌고 변수가 아주 많기 때문에 최후의 대결말은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없으며, 그저 불완전하게 남겨두어 후인이 계속 이어가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홍루몽》의 진정한 정수는 바로 그 흠결에 있는데 인생이란 붉은 누각에서 한 차례 에피소드일 뿐이며 대결말은 오직 창세주(創世主)만 아실 뿐 그 누구도 마무리 지을 수 없다. 역사를 개창한 대법제자들은 그래도 완벽한 결말까지 이어갈 수는 있지만 시기(時機)가 무르익지 않았고 또 이런 것들을 돌볼 겨를도 없다. 애초의 의도와 복선의 진실한 마음 씀을 알려면 모두 ‘호료가(好了歌 역주: 《홍루몽》 작품 속의 시)’ 속에 있다.
그러므로 홍루의 한 차례 꿈은 한 차례 서쪽 여행만 못하다. 지금 시급한 것은 심령을 세척해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다. 서쪽 여행이 걷는 것은 마음의 길이고, 돌아가는 곳은 영혼의 고향인데, 꿈에서 깨어난 곳이 바로 돌아가는 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