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劉曉)
【정견망】
많은 중국인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대륙의 각종 재해(災害), 예를 들어 지진, 수해, 가뭄, 화재, 역병 등이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만큼 다재다난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神)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재난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은 암암리에 배치가 있다고 말한다.
민간에서는 또 물, 불, 칼, 전쟁 같은 재난이 닥치기 전에 저승에서 조겁부(造劫簿 역주: 거대한 겁난이 생겼을 때 살고 죽는 사람들의 명부. 생사부의 일종으로 큰 겁난의 상황에 만들어진다)를 작성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대략적인 재앙의 범위와 유형 및 그에 상응하는 사망자를 정해 놓는다.
청조(淸朝) 이경진(李慶辰)이 펴낸 《취차지괴(醉茶志怪)》에는 청조 신도(信都, 지금의 하북 형수衡水 일대)의 젊은 선비 유옥(劉玉)이 하루는 친구 집에 가서 놀았다. 두 사람이 즐거워하며 술을 많이 마셨다. 밤이 깊어진 후에야 얼큰하게 취한 유옥이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옥이 마을에서 5리쯤 나왔을 때는 이미 이경 무렵, 지금의 밤 9시에서 11시 사이라 길은 캄캄했다.
유옥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름 모를 절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밤에 사찰의 등불이 반짝거려 눈길을 끌었다. 유옥은 스님이나 도사가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셔 목이 말라 절에 들어가 물을 얻어 마시려고 했다.
유옥이 절에 들어서자마자 두 명의 심부름꾼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때마침 잘 왔소, 염라대왕께서 우리를 보내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하고 말하며 심부름꾼이 유옥을 한 대전으로 데려갔다. 유옥은 대전 위에 용포를 입고 주렁주렁 늘어진 장식을 하고 기세가 위풍당당한 왕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유옥은 놀라서 얼른 무릎을 꿇었다. 염왕이 그에게 말했다.
“너를 찾은 것은 너더러 책 등기를 도와달라는 것이니, 네가 무엇을 보든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내년 가을에 일어날 일이니 너와는 상관이 없다.”
유옥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낙했다.
곧 하인이 유옥에게 먹, 종이, 벼루를 가져다주고 계단에 앉아 등기하게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전 동쪽에는 사람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수십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마치 개미들이 집을 옮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운반할 때마다 유옥에게 숫자와 이름을 보고하고, 유옥이 등기한 것을 본 후에야 떠났다.
이리하여 대전에는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유옥은 잠시도 쉬지 않고 등기하였다. 동녘 하늘이 밝아오자 등기는 끝났다.
이때 한 사람이 정당(正堂)에 올라와 염왕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모두 1만여 명쯤 됩니다.”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유옥에게 명부를 달라고 하며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려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옥은 계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차츰 사람 소리는 사라지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유옥이 두 눈을 뜨고 바라보니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슨 대전, 대청, 염라대왕, 심부름꾼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꾼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듬해(1850) 과연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옥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저승에서 미리 계획한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태평천국운동도 역사가 배치한 한 차례 연극이었던 것이다.
별호가 ‘취차자(醉茶子)’인 이경진은 이렇게 평가했다.
“큰 겁난이 닥쳤을 때 옥석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불에 타지만 대체로 난을 당하는 것에 단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없다. 이로부터 저승에 반드시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인지 이경진은 또 다른 저승의 실화를 들려주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광서(光緖) 원년~4년(1875~1878년), 산서(山西)· 직예(直隸)· 섬서(陝西)· 하남(河南)·산동(山東)성 등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을 때이다. 피해 상황은 정축년(1877년)부터 무인년(1878)까지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를 ‘정무기황(丁戊奇荒)’이라 한다. 당시 산서성 순무(巡撫)였던 증국전(曾國荃)은 이를 “200년 이래 없었던 재앙”이라 칭했는데 1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200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떠났다.
광서 3년(1877년)의 극심한 가뭄으로 천진(天津) 성내에 제민(濟民), 즉 ‘보생죽 공장’이 세워졌다. 도시 동쪽 모퉁이에는 전문적으로 부녀를 돌보는 죽 공장 중 하나인 보건소의 여성 공장이 특별히 설립되었으며 죽 공장에는 많은 헛간이 세워져 있으며 그 안에는 여성과 소수의 어린이 2000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12월 4일(1월 6일) 새벽, 보건소의 여성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북풍이 쌩쌩 불었고, 불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져 약 2200명이 타 죽었고, 3~ 400명만이 구조되었다.
당시 ‘신보(申報)’의 보도에 따르면 화재 참상을 보도하며 시신은 모두 불에 타 검게 탔고, 그 모양이 온전하지 못하며, 뻗어 있지 않다고 전했다. 온전한 사람은 대부분 피부가 갈라지고 뼈가 시들고 일반인보다 줄어들었으며 옷이나 모발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 걸려 넘어지고 고개를 숙이면 타는 소리를 들었다. 비록 죽었지만, 남매와 아들과 어머니는 여전히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이마와 머리는 어머니를 기대고, 몸으로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죽음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은 화재 직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헛간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 즉 고함을 지르고 점호하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사람이 관청에서 솜옷을 보내준줄 알고 나가서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화재가 발생했다.
세간에 ‘점귀부(點鬼簿 귀신을 점고하는 장부)’라는 말이 있으니 아마 실재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진시황 때의 명장 백기가 구덩이에서 병졸을 죽이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의 참상은 차마 볼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이 사람을 거둔다”는 설이 절대 허황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늘은 매 사람의 생사를 정한다. 사람들 눈에 죽은 사람이 ‘죄가 없다’는 그 배후의 인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재난은 그 전에 반드시 비정상적인 것이 있었고, 이는 재앙의 전조다.
따라서 점점 갈수록 더 비정상적인 현상, 이상 현상, 예를 들어 역병이 끊이지 않고 혹한과 혹서의 날씨가 나타나며, 정월에 ‘벼락과 번개가 치고, 폭우와 가뭄이 번갈아 가며, 지진이 끊이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하늘이 세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 마음에 정념(正念)이 나오고 하늘의 뜻을 알아들으면, 반드시 재난을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취차지괴》.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