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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무자경전’과 통천하에서 경전을 말린 돌에 담긴 우의

초약미(楚若薇)

【정견망】

《서유기》 제98회에서 당승 사도가 줄곧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겪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야말로 “선(禪)을 얻기 위해 삼천 개의 강을 지나고, 석장(錫杖) 짚고 만 리 절벽을 넘었다.” 마침내 서방 불지(佛地)에 이르러 “공행이 원만해져 진여(真如)를 보았다.”

영산 기슭 옥진관(玉真觀)의 금정대선(金頂大仙)은 이곳에서 이미 14년 동안 이들 취경인들을 기다려 왔는데 마침내 “당승의 손을 잡고 제단 위의 법문(法門)으로 안내”해 당승을 영산(靈山)으로 오르는 구름길로 인도한 후 거기서 영취봉 불조(佛祖)가 계신 성스런 곳까지 가게 했다. 신선과 범인을 가르는 능운도(淩雲渡)를 건넌 후 외나무다리가 아주 가늘고 미끄러워 지나갈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나무보당광왕불(南無寶幢光王佛)이 바닥이 없는 배를 저어 맞이하러 왔다.

“바닥없는 배라 바다를 건너긴 어려우나 예부터 지금까지 숱한 중생들을 건네주었다.”

여기서부터 범태(凡胎)를 벗고 능운선도를 건넜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다시피 만약 맞이하는 사람이 없다면 범계(凡界)에서 불국(佛國)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알 수 없다.

당승이 영산에 올라 뇌음사에 들어가 대웅보전 앞에 와 여래불조(如來佛祖)께 진경(真經)을 구하자 여래께서는 아난과 가섭에게 삼장경 35부(15,144권) 중에서 “각각 몇 권씩을 저들에게 주어 저들로 하여금 동토(東土)에 전해 영원히 홍대한 은혜를 기억하게 하라.”고 분부했다.

아난과 가섭이 당승을 진루보각(珍樓寶閣)으로 이끌어 경전의 이름을 보여주고 당승에게 말했다.

“성승께서 동토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에게 어떤 선물[人事]을 가져오셨습니까? 빨리 꺼내 보세요. 그래야 경전을 전해드리죠.”

삼장이 듣고는 말했다.

“제자 현장이 먼 길을 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 권 한 권 보자기에 싸서 말에 싣고 또 두 개의 봇짐을 묶어 저팔계와 사오정이 짊어졌다. 그리고 여래께 인사를 올리고는 곧장 산문(山門)을 나섰다.

보각 위에 있던 연등고불(燃燈古佛)은 아난과 가섭이 무자경(無字經)을 전한 것을 알고는 혼자 웃으시며 말했다.

“동토 중생들은 어리석고 미혹되어 무자의 경전을 알아보지 못하니 성승(聖僧)이 이번에 헛걸음을 하게 되었구나.”

그리고는 백웅(白雄) 존자에게 세찬 바람을 타고 가서 경전을 떨어뜨리게 했다. 당승이 흩어진 경전을 모으다 그것이 글자가 없는 무자 경전임을 깨닫고는 곧 부처님께 돌아가 경전을 바꿔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여래께서는 말씀하셨다.

“빈 책은 무자 경전이니 그래도 좋은 것이다. 너희 동토 중생이 우매하고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이것만 전해주어도 되느니라.”

하지만 두 존자는 여전히 예물을 요구했다. 당승이 당왕이 하사한 자금발우를 바치면서 “그저 글자가 적힌 경전만 달라고” 청했다. 이에 “각 부에서 5천 48권을 주자” 당승은 경전을 받아 감사드리며 떠났다. 팔대금강을 따라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아난이 두 차례나 ‘예물’를 요구했지만 여래불조는 무슨 일인지 이를 알면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는 대체 무슨 일인가? 사실 이것은 당승이 최후의 사람 마음을 버리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당승은 여전히 당왕이 하사한 자금발우를 소중히 여겼다. 범태를 벗고 출세간(出世間) 층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속세의 황제가 하사한 이 물건을 ‘예물’로 여기는 속인의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자(無字)’와 ‘유자(有字)’ 중 어느 것이 진경일까?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경(經)이란 무엇인가? 오직 불타께서 전하신 법(法)만이 경이 될 수 있다. 수련 중의 사람이 남긴 것은 다 경이 될 수 없다. ‘무자’와 ‘유자’ 모두 진경이 될 수 있지만 그 내함은 층차에 따라 전개되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간 속인 층면에서 펼쳐진 것은 바로 ‘유자’ 경전이지만 보다 높은 층차에서 드러나는 것은 세간의 이런 글자가 아니다. 다만 그 경계에 도달한 후라야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속인 층면에서는 고층차 진경(真經)의 글자와 함의를 볼 수 없기에 무자경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럼 왜 여래불조는 동토 중생들이 어리석고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자진경을 전해도 된다고 했을까? 왜냐하면 인류사회는 본래 반리(反理 반대로 되는 이치)가 주도하는 오독난세(五毒亂世)라 진경을 함부로 세상에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자진경은 단지 그런 경계에 도달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만 펼쳐질 뿐 세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기왕 당왕이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경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유자 경전을 전한 것이다. 하지만 유자 경전을 말하자면 사실 꼭 진경인 것은 아니며 또 뒤에 통천하의 제81난이란 복선을 묻어놓았다.

《서유기》 제99회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관음보살이 말했다.

“불문에서는 구구귀진(九九歸真)을 말하는데 성승은 80난을 겪었으니 아직 하나의 난이 부족해 이 수를 완성하지 못했구나.”

이에 “네 사람과 심지어 말과 경전까지 땅에 떨어지게 하니” 마침 통천하 서쪽 강가에 떨어졌다. 또 마침 전에 강을 건네주었던 자라를 만나 다시 말과 함께 자라를 타고 강을 건넜다. 하지만 당승이 과거 자라가 여래께 문의해 달라고 했던 부탁을 망각했기 때문에 자라는 “네 사람과 말 및 경전까지 모두 물에 빠뜨렸다.”

이 바람에 경전을 싼 포대기와 옷 안장과 고삐 등이 다 젖었다. 이에 경전을 높은 곳으로 옮겨 보자기를 펼치고 햇볕에 말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본행경》 몇 권이 바위에 들러붙어 결국 경전의 끝부분이 파손되었다. 때문에 이 경전은 지금까지 온전하지 않고 경전을 말리던 바위에 아직도 글자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본행경(本行經)이란 바로 《불본행경(佛本行經)》으로 당승이 영산에서 가져온 《불본행경》 116권이다.

불교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석가모니 부처가 세상에 계실 때 어떤 경서도 남기지 않았다. 불교의 경서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세상을 떠난 5백 년 후에야 비로소 정리되어 나온 것들이다. 아울러 완전히 후인이 편집한 내용 역시 경서로 나열되었고 그중에는 이 《불본행경》 또는 《불소행찬(佛所行讚)》이라고도 하는 책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고대 인도의 마명(馬鳴)이 지은 것으로 확인되는데 시의 형식으로 불타의 행적을 기술하며 불타의 전생과 깨달움을 얻었을 때를 기록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책이 바위에서 말리다 손상되었다는 것은 모종의 겁수(劫數)와 예시가 아닐까? 불타가 말씀한 것이 아니면 경(經)으로 삼을 수 없고 또한 세간에 완전한 진경(真經)을 유전되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래불조가 아난과 가섭에게 단지 “매 부에서 몇 권만 골라” 전하라고 했으니 완전한 진경을 당승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주: 원문에서는 전체 삼장경 35부(15,144권)에서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5048권을 전하게 했다.]

그렇다면 왜 세간에 완전한 진경을 전할 수 없었는가?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는 아주 오랜 전설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말법 난세에 이르러 우담바라 꽃이 큰 범위에서 피는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면 바로 세인들에게 진정한 불가의 대법(大法)이 사람을 구하기 시작함을 알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이 그때로 지금의 중생이 어떻게 해야 만세(萬世)에도 만나기 힘든 이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