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清源)
【정견망】
유유한 5천 년, 신주대지(神州大地)에선 여러 차례 역사의 큰 연극이 공연되었고, 막이 오르면 유석도(儒釋道)를 문명의 바탕으로 삼았다. 제왕장상(帝王將相)과 재자가인(才子佳人)들은 배우이자 관객으로, 연기자가 직접 현장에 있기에,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이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빠져, 이 모두가 인류 사회의 문화를 다져 후세 사람들이 구도 받을 수 있는 대법(大法)을 들을 수 있게 하려는 창세주(創世主)의 고심한 배려임을 까맣게 잊었다.
한말(漢末), 군웅들이 다투고 풍운이 변화하면서 위, 촉, 오 삼국이 나란히 서서, 각지의 영웅들이 함께 무대에 등장하여 ‘의(義)’자의 문화적 의미를 함께 연출하였다. 위무대제(魏武 조조)가 병으로 죽고, 유비(劉備)가 아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와룡(제갈량)의 별이 떨어지면서 삼국의 이야기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 다음 조대(朝代)의 배우들이 이미 연습을 마쳤기 때문에 사마씨(司馬氏)가 제위를 노리고 동오(東吳)를 정벌하면서 천하가 다시 통일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태강(太康)의 치(역주: 진 무제 사마염 시기의 치세)는 우담바라처럼 반짝 피었다 사라지고 중원 대지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사마씨 팔왕(八王)이 집안싸움을 하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진조(晉朝)의 국력이 급격히 쇠락하자 ‘오호(五胡 흉노 선비족 등 5가지 이민족)’가 중원에 들어와 주인이 되어 함께 연극을 공연했다. 당시 혜원(慧遠), 구마라습(鳩摩羅什), 각현(覺賢) 등 적지 않은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나타나 불교의 법리를 널리 알린 데다 소수민족들이 대부분 불교를 믿으면서 한인(漢人)과 섞여 사는 동안 불교는 중원 대지에 진일보로 전파되었다.
이와 함께 도가(道家)의 신(神)도 도법(道法)을 전파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고, 삼국과 양진(兩晉) 시기에 진(真)을 닦는 수많은 대도(大道)가 나타났다. 이들은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하거나 인간 세상에 노닐며 많은 신적(神跡)을 남겼다. 도가 학설은 또 갈수록 사대부(士大夫) 계층에서 중시를 받았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갈홍(葛洪)은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났다. 갈홍의 자(字)는 치천(稚川)이고, 단양(丹陽) 구용(句容 지금의 강소성 구용) 사람이다. 진(晉) 태강(太康) 4년(283년)에 태어나 흥녕(興寧) 원년(363년)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포박지사(抱樸之士)’라 불렀기에 이를 자호(自號)로 삼았는데, 포박(抱樸)이란 단어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순수함을 드러내고 소박한 것을 품으며 사사로운 욕심을 줄인다(見素抱樸,少私寡欲)”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그가 도가와 깊은 연원이 있음을 드러낸다.
역사는 갈홍을 선택해 도를 닦는 바른 이치를 천명(闡明)하고, 금단(金丹)을 연마해 신선이 되는 신적(神跡)으로 선가(仙家) 비술(秘術)의 현묘함을 세상에 알리도록 했다. 동시에 그는 또 사람들의 고질병 치료를 도와 약학(藥學) 경전(經典)을 남겼으며, 조정에 은거해 실천으로 관리의 표준이 되었으며, 시대의 병폐를 지적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책략을 편찬했고, 중화 정통문화에서 유의도(儒醫道)의 심오한 함의를 전승(傳承)했다.
난세에 태어나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 탐구
중국 역사에서 양진(兩晉) 시기(서진과 동진)는 전란이 빈번히 일어난 혼란의 시대였다. 불과 10년에 불과한 짧은 ‘태강의 치’를 거친 후, 팔왕의 난, 오호가 중원을 어지럽히고 조정이 강남으로 천도하는 등등. 중원 대지를 뒤덮은 전쟁의 불길과 죽음의 재앙은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진 무제(武帝) 태강(太康) 4년(283년), 갈홍(葛洪)은 장차 이처럼 혼란한 시대에 빠져들려는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인 갈포려(葛浦廬)는 후한(後漢)을 창업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보좌하던 장군으로 전공을 세워 하비동현후(下邳僮縣侯)에 봉해졌다. 갈홍의 조부인 갈계(葛系)는 박학하고 재주가 많아 모르는 것이 없던 동오(東吳 삼국시기 오나라)의 대신으로 수현후(壽縣侯)에 봉해졌다. 부친 갈제(葛悌)는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나서 오나라 때 오관랑·중호군(中護軍)·회계태수(會稽太守) 등을 역임했고, 그의 치하에서 “덕화(德化)가 두드러지고 은혜와 형벌이 적합해, 들에는 찬양하는 소리가 있고 길에는 도적이 없었다.”(《포박자외편》)라고 했다.
나중에 오나라가 진(晉)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도 비항현령(肥鄉令), 소릉태수(邵陵太守)를 지냈다.
갈홍의 출신은 이렇게 의심할 바 없이 빛나는 가문이었지만 불행히도 갈홍이 열세 살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갈홍은 직접 농사일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차례 전화(戰火)를 치르면서 조상들이 남긴 전적(典籍)들도 모두 사라졌다.
셋째 아들이었던 갈홍은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랐지만 갑작스러운 변고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갈홍은 농사와 나무하는 틈틈이 책 상자를 짊어지고 불원천리(不遠千里) 스승을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종이와 붓을 살 돈이 없으면 나무를 해서 돈을 벌었다. 좋은 학습환경이 없으니 텃밭에서 공부했고 땔감을 붓으로 삼았다. 이따금 종이 한 장을 얻으면 그 위에 반복해서 쓰는 연습을 했는데, 글자가 너무 많아 아무도 그가 무엇을 썼는지 읽을 수 없었다.
“땔감을 팔아 종이와 붓을 마련하고 밭에 나가 장작을 붓을 삼았다. 이런 연유로 일찍 문예에 입문할 수 없었다. 항상 종이가 부족해서 쓴 것마다 글자가 겹쳐서 남들은 읽을 수 없었다.”(《포박자외편》) 갈홍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한 데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기 때문에 곧 향에서 유학(儒學)으로 유명해졌다.
도가(道家)를 사승해 절학(絶學)을 잇다
갈홍은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며 기초가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도가(道家)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방술(方術)을 좋아하여 멀리 가서도 물음을 청했으며 매번 기이한 것을 듣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비록 나를 비방하고 비웃는 이가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포박자내편(抱樸子內篇)》)
“옛날의 권세가의 집은 지척에 있어도 따르지 않았고, 도를 아는 선비가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찾아갔다.” (《진서(晉書)》)
즉, 갈홍은 도를 구하는 마음이 아주 확고해서 길이 아무리 험하고 멀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 기연(機緣)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스승을 찾아 도인을 방문하던 중 열여섯 살 때 정은(鄭隱 정사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 들어갔다. 정은은 학식이 넓고 깊은 고인(高人)으로 유학(儒學)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또 도가의 수련 방법을 장악하고 있었다.
“정 선생님은 오경(五經)에 밝고 선도(仙道)를 익혔을 뿐 아니라 구궁삼기(九宮三奇), 추보천문(推步天文), 하락섬기(河洛纖記) 등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포박자내편》)
갈홍은 정은을 따라 수련하는 과정에 사부의 많은 특별한 현상을 보게 된다.
“정 선생님은 당시 80세가 넘었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는데, 수년이 지나자 또 검어지고, 안색이 풍족했다. 강한 쇠뇌를 당겨 백 보를 쏘았고, 하루 수백 리를 걸으며, 두 말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산에 오를 때마다 힘이 좋고 가벼웠으며 위험한 곳을 오를수록 젊은 사람이 쫓아다녀도 미치지 못했다.” (《포박자내편》)
신기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정은이 먼 길을 가다 태풍을 만났고 또 강도들이 길을 막고 동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이 떨어지자 정은이 그들에게 쌀을 주고 자기는 50여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정 선생님이 일찍이 예장에서 돌아오시는데 굴구포(掘溝浦)에서 태풍을 만났다. 또 앞에 많은 도적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동행한 사람들이 정 선생님을 만류해 다른 일행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사람들이 모두 식량이 부족했지만 정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되 자신은 먹지 않았지만 50일이 지나도 배고픈 기색이 없으셨다.”(《포박자내편》)
정은은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평소 학생들에게 《예기(禮記)》, 《상서(尙書)》 등 유가 경전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도가(道家) 수련은 단독 전수를 말하기 때문에 비록 제자가 많다해도 오직 도덕이 높고 근기가 좋은 제자 하나만 골라 본문(本門)의 진정한 수련 방법을 전승하기 때문이다. 그는 50여 명의 제자가 있었지만, 오직 갈홍에게만 수련 법문을 전수했다.
“제자가 50여 명이었지만, 오직 나만 《금단지경(金丹之經)》과 《삼황내문(三皇內文)》, 《침중오행기(枕中五行記)》를 받았으니, 다른 이들은 이 책들을 제목조차 볼 수 없었다.”(《포박자내편》)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정은은 원래 갈홍의 당조부(堂祖父 역주: 할아버지의 형제)인 갈현(葛玄)을 사사했다. 갈현은 일찍이 천태(天台) 적성산(赤城山)에 들어가 도를 배웠고, 오나라 때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다. 간보가 쓴 《수신기》에 그의 초능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두꺼비와 여러 곤충과 참새 따위를 시켜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사람과 같았다. 겨울에 손님을 위해 생과일과 대추를 대접하고 여름에는 눈과 얼음을 내어왔다. 또 수십 전의 돈을 우물에 던지게 하고 갈현이 그릇을 우물에 놓고 부르자 동전이 하나씩 우물에서 날아 나왔다. 손님을 위하여 술을 차리고 잔을 돌리는 사람이 없어도 잔이 저절로 오고, 잔을 다 마시지 않으면 잔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갈현의 사부는 또 누구일까?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갈현은 좌원방(左元放)을 사사해 《구단액선경(九丹液仙經)》을 받았다고 한다. 좌원방은 바로 삼국시대 유명한 방사 좌자(左慈)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좌자는 기이한 술법이 있어 온갖 변화에 능통했다. 한 번은 좌자가 조조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 진수성찬은 거의 다 갖추어져 있었는데 유독 오나라 송강의 농어만 빠졌다. 그는 곧 사람을 시켜 놋대야에 물을 붓게 하고 자기가 대야에서 농어 한 마리를 낚아 올려 자리에 있던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 신족통(神足通)도 지니고 있었다. 손권(孫權)이 이 말을 듣고 의심하며 좌자가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여겼다. 나들이 간 틈을 타서 등 뒤에서 그를 찌르려 했으나, 손권이 말을 타고 달려도 천천히 걷는 좌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좌자가 동오에서 토역장군(討逆將軍 손책)을 만났는데 그 역시 좌자를 죽이려 했다. 이후 나들이를 가자며 좌자를 청해 말 앞에 가게 하고 뒤에서 찔러 죽이려 했다. 좌자는 말 앞에서 나막신을 신고 죽장을 들고 천천히 걸어갔고, 손책은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군사를 몰아 쫓아갔지만 끝내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손책은 그에게 도술이 있음을 알고 그만두었다.”(《신선전(神仙傳)》)
좌자는 도술이 고심(高深)했고 인간 세상에서 노닐다 나중에 갈현에게 도를 전수하고 단(丹)이 완성되자 신선이 되어 떠났다. 이렇게 보자면 갈홍은 바로 좌자 일문(一門)의 제3대 전인(傳人)이다.
난세(亂世)에 수련하여 시해선이 되다
서진(西晉) 태안(太安) 원년(302년), 정은은 장차 강남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나머지 제자들을 이끌고 곽산(霍山)으로 가서 도를 닦았다. 이때 갈홍은 겨우 스무 살이었는데 스승은 갈홍만 남겨 난세에 단련해 도를 닦는 한편 책을 저술해 그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게 했다. 이듬해 강남에서 과연 전쟁이 일어났다. 장창(張昌)이 유랑민들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자 갈홍은 곧 군대에 들어갔고 난을 평정한 공로로 복파장군(伏波將軍)에 봉해졌다. 나중에 공을 이루고 물러나 도가 서적을 수집하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갔다. 그러나 전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그의 벗인 혜함(嵇含)이 광주(廣州) 자사로 임명되었다. 혜함은 곧 갈홍에게 참군(參軍 참모)으로 초청했고, 이에 갈홍은 광주로 떠났다. 하지만 혜함은 뜻을 이루기도 전에 원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갈홍은 광주 일대에서 수련을 계속했고, 이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때 각처에서 그를 불러 관직을 주려 했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던 중 갈홍은 남해태수 포현(鮑玄)을 만난다. 포현은 고심한 도술(道術)이 있어 미래 일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갈홍을 아주 높이 평가했고 또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서진(西晉) 민제 건흥(建興) 2년(314년), 갈홍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에 조정에서 여러 차례 갈홍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훗날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되는 사마예가 승상으로 있을 때, 갈홍을 연(掾)으로 초빙하자, 갈홍은 조정에 은거해 계속 책을 쓰고 수련했다.
진 성제(成帝) 함화(咸和) 2년(서기 327년), 사도(司徒)인 왕도(王導)가 보주주부(補州主簿)로 초치하자, 갈홍(葛洪)은 사도의 속관(掾官)이 되어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옮겨갔다. 당시 저명한 사학자 간보는 갈홍의 재주와 학문을 높이 평가해 “갈홍의 재능은 국사(國史)를 감당할 만하니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아 저술을 이끌게 했으나 홍이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진서》)라고 했다.
갈홍은 쉰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연로해 단을 연마해 장생하고 싶다는 이유로, 또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연단(煉丹) 재료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황제에게 구루령(句漏令)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처음에는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가 진실로 부귀영화보다는 수도하려는 마음이 확고한 것을 알고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갈홍이 아들과 조카를 이끌고 광주에 왔을 때, 자사 등악(鄧嶽)은 갈홍에게 도(道)가 있음을 알고 그를 매우 존경해 강제로 머물게 하고, 갈홍을 동관태수(東官太守)로 삼으려고 상주문을 올렸다. 갈홍은 평생 수도를 위해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고 일찍이 명리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았으며, 등악의 간절한 만류에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악과 작별을 고하고 나부산(羅富山)으로 건너간 갈홍은 이후 3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고 단을 연마하며 책을 저술해 많은 저서를 완성했다. “그외에 비뢰시부(碑誄詩賦) 백 권, 이격장표(移檄章表) 30권, 신선(神仙)·양리(良吏)·은일(隱逸)·집이(集異) 등 각 10권, 또 《오경(五經)》·《사(史)》·《한(漢)》·백가지언(百家之言)·방기잡사(方技雜事) 310권, 《금궤약방(金匱藥方)》 100권, 《주후요급방》 4권을 저술했다.” (《진서》)
진 애제(哀帝) 흥녕(興寧) 원년(363) 갈홍이 갑자기 등악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곧 스승님을 찾으러 떠납니다.”라고 했다. 편지를 본 등악은 황급히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갈홍이 한낮까지 가부좌했으나 우뚝 앉아 마치 잠든 것처럼 떠났다. 등악이 찾아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향년 81세였다.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몸도 부드러웠으며 시신을 관에 넣는데 마치 빈 옷처럼 가벼웠다. 사람들은 그가 시해(尸解)해서 신선이 된 것으로 여겼다.”(《진서》)
갈홍은 16세에 스승을 모셔 65년간 수도하면서 중화 신전문명을 다지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수련 원만했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이뤘다. 후인들에게 수련하면 신선이 된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는 사망할 때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을 보이며 시해해서 떠났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