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陸文)
【정견망】
지금 사람들은 가부좌(打坐)나 정좌(靜坐)를 말하면 흔히 불가나 도가 수련만을 떠올리기 쉽다. 사실 고대에는 유가(儒家)도 가부좌를 중시했다. 예를 들어, 가장 오래된 유가 경전의 하나인 《예기·대학》의 서두에는 “멈춤을 안 후 정(定)이 있고, 정이 있은 후에야 고요해질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 남송의 대유학자 주희의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정좌(靜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정좌란 유가 입문을 위한 기본공으로 아울러 정좌할 때 사상도 고요해지고 “정좌하면 사려를 품을 수 없고 정좌할 때면 곧 공경(敬)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다.
왕양명(王陽明)은 명대(明代)의 대유학자로, 이름은 ‘수인(守仁)’이고 호가 ‘양명자(陽明子)’라서 후인들이 흔히 왕양명이라 불렀다. 명대 유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입정(入靜)을 아주 중시했으며, 심지어 “선경(仙徑 신선의 길)의 비지(秘旨)를 연구해 보면 정좌(靜坐)는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도(道)다.”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정좌에 정진했는지 알려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홍치(弘治) 원년(1488년), 17세가 된 왕양명은 아내 제(諸)씨와 결혼하기 위해 남창(南昌)에 갔는데, 혼례식 날 평소 세상의 번잡함이 싫었던 그는 청정(淸靜)을 찾아 인근 도관(道觀)에 가서 가부좌를 했다. 가부좌로 입정(入靜)에 들어가서 결국 다음 날 아침에야 집에 돌아가 혼례 당일 신부가 독수공방하게 했다. 이 일은 한때 일화로 전해졌으나 나중에 양명에 관한 많은 기록에서 이 일을 언급했다.
아마도 이렇게 오랫동안 가부좌해서 입정(入靜) 또는 입정(入定)한 것과 관련이 있을 텐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확실히 공능(功能 초능력)이 있었다. 홍치 15년(1502년) 왕양명은 양명동(陽明洞 양명이 수련하던 산굴)을 짓고 어느 날 굴에서 가부좌하고 있었다. 벗인 왕사여(王思輿) 등 4명이 그를 탐방하러 왔는데 막 오운문을 들어서자마자 양명이 하인을 시켜 맞이하게 했다. 또 하인에게 그들이 올 때 상황 및 발생할 일을 미리 알려주었는데 그가 말한 내용은 이들 4명에게 방금 일어난 사실이었다. 이 내용이 《왕양명연보(王陽明年譜)》에 기록되어 있고 “모두 놀라서 그가 도를 얻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왕양명은 오히려 “이는 정신적인 장난일 뿐 도(道)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확실히 진정한 수련인은 모두 공능에 집착하지 않으며, 공능이 있다고 해서 도를 얻고 원만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이외에 왕양명은 또 비와 바람을 기도하는 등의 법술(法術)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역사에 명확한 기록이 있다. 정덕(正德) 5년(1510년), 그가 방금 여릉현(廬陵縣) 지현(知縣)이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향촌을 바로 잡았는데 마침 화재가 나자 사람들을 조직해 불을 끄게 한 것 외에 《왕양명연보》에 따르면 “성안에 불이 난” 재앙을 맞아 “바람이 반대로 불도록 기도하고 피로 불을 몰아내자 불이 곧 꺼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덕 12년(1517년) 왕양명이 정주부(汀州府) 상항현(上杭縣)에서 비를 내리게 한 일이 있다. 《왕양명연보》에는 “선생이 상항에 주둔했을 때 행대(行臺)에서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군대가 떠나자 삼일 동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몹시 기뻐했다. 유사(有司)가 행대의 당(堂) 이름을 시우당(時雨堂)으로 고칠 것을 청했다. 왕의 군사는 시우(時雨 제때에 내리는 비)와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선생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
정덕 14년(1519년), 그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복건의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막 강서 풍성(豊城)에 갔는데 당시 영왕 주신호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배를 길안(吉安)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런데 남풍이 세게 불어 배가 전진할 수 없었다. 《왕양명연보》에 따르면 왕양명이 이에 “향을 사르고 하늘에 울면서 고하길 ‘만약 하늘이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제가 사직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 바람을 반대로 불게 하소서. 만약 이 백성들에게 뜻이 없으시면 수인은 살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잠시 후 남풍이 서서히 멈추더니 북풍이 불어 돛을 올렸다.
이를 보면 그는 정말로 비를 부르고 바람을 부르는 법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다만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중생의 이익에 확실히 관련될 때만 부득이 하게 잠시 사용했을 뿐이다. 다른 사료를 보면 고대에 비를 내리게 한 일은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승려나 도사 뿐 아니라 일부 대유학자들도 한 적이 있다.
가령 남송의 대유학자 육구연(陸九淵)은 자가 ‘자정(子靜)’인데 서재 이름에 ‘존(存)’이 있어 흔히 “존재선생(存齋先生)”이라 불렀다. 상산(象山)서원에서 강학(講學) 했기 때문에 후세 학자들은 모두 그를 ‘상산선생’ 또는 ‘육상산’이라 불렀다. 육구연이 쓴 문장을 보면 그가 적어도 3차례 신령께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고 또 세 번 모두 비를 내려주신 신령께 감사드린 일이 있음을 알 수있다. 즉 세 차례 기우제에 모두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육구연이 바로 가부좌를 극히 중시한 유가 인물이다. 사서에 따르면 주희는 육구연의 수련방법을 가리켜 “정좌징심(靜坐澄心 정좌하며 마음을 맑게 함)”이라 했고, 진순(陳淳)도 육구연에 대해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정좌하며 본심(本心)을 지키게 했고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점점 유교는 사람이 되는 지식으로 간주하고, 왕양명 같은 대유학자들도 그저 사람이 되는 철학자로만 간주해 더는 그들이 가부좌를 중시하고 초상적인 능력을 지녔던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유가의 가부좌 전통은 이미 오늘날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하지만 지금 오히려 과거 유가 가부좌의 신비를 완전히 풀어주는 한 가지 공법(功法)이 있으니 바로 파룬따파(法輪大法)다.
《파룬궁》에서는 “고대에는 인체수련을 매우 중시했는바, 유가·도가·불가와 유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망라하여 모두 가부좌를 했다. 가부좌는 일종의 공부(功夫)로서 오래도록 하면 비록 연공을 하지 않더라도 공과 공능이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
또 다른 대법 경서 《싱가포르 불학회 설립식 설법》에서는 “과거의 학생을 유생(儒生)이라고 불렀는데, 수업 전에 모두 가부좌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조용히 한 후에야 책을 보았다. 과거에는 이랬는데, 옛날 중국의 각 분야에서는 거의 다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조용히 함을 중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평소에 하지 못하는 많고도 많은 일들을 해내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기공 수련과 아주 근접한 것이다. 옛 중국인의 사상관념 속에는 줄곧 이런 문화가 관통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파룬따파는 과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거나 심지어 아예 알지 못했던 수많은 수련의 신비를 말해낸 최상승(最上乘)의 공법이자 정법(正法)이며 불법(佛法)이다. 수련을 해보려고 생각하는 분들은 지금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기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설령 당신이 믿지 않더라도 비방하진 말아야 한다. 지금 중국에서 대법 수련자들이 여전히 박해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날이 올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신이 모르는 진리를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당신의 생명이 아주 위험해질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가의 창시자 공자 및 후대의 진정한 대유학자들 역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예를 들어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초라한 몰골로 여러 나라를 떠돈 적이 있다. 왕양명도 일생 여러 차례 위험에 처했고 또 귀주 용장(龍場)이란 아주 먼 곳으로 쫓겨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어려움에 쓰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부좌를 견지하며 도를 깨달았다. 역사에서는 이를 ‘용장의 깨달음[龍場悟道]’이라고 한다. 나중에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고 후세에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