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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관한 10가지 논의 (2)

진정(秦政)

【정견망】

편집인의 말: 이 시리즈는 본래 인민보(人民報)에 연재된 것으로 저자가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금강경》에 대해 논술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종교계(특히 불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데 일정한 참고 가치가 있기에 이곳에 옮겨 싣는다. 종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법제자들은 볼 필요 없다.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기를 바란다.


7. 동냥(要飯 음식 구걸)을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나중에 이를 화연(化緣 역주: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인연을 맺음)이라 불렀다. 사실 화연의 개념은 동냥보다 훨씬 큰 것이다. 동냥은 당시 수련상태와 방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방법일 뿐이다. 동냥 과정에서 제자는 또 심성(心性)을 제고하고, 인연을 맺거나 인연을 마무리 짓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중생과 선연(善緣)을 맺는다. 불교도들이 채택한 생명을 관리하는 방식은 그가 성취한 후 반드시 더 많은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지금 당신에게 밥을 주는 은혜를 베풀면 나중에 훨씬 많은 보답을 받게 마련이다. 이는 또한 불가(佛家) 자비의 한 가지 원용(圓容)인데, 기왕에 수련 방식상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미래에 중생을 구도할 선연을 맺는 것이다.

나중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데, 불교의 고승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동한(東漢) 명제(明帝) 유장(劉莊) 때 중토(中土)에 왔다. 그런데 중국 이곳의 집단 관념에 따르면 대덕(大德) 대지(大智)한 인물이 ‘동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아울러 동냥이란 일을 하지 않고 먹는 것으로 경멸했다. 이에 불교 수행 형식에도 모종의 변화가 발생했다. 황실에서도 초청한 성자(聖者)가 동냥하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들이 머물 곳을 제공하고 또 토지와 공양도 제공했다.

가장 초기에는 홍려사(鴻臚寺, 외국 사신이나 귀빈의 응대를 주관하는 관서)에서 쉬었고, 또 명제가 꿈에 백마가 경서를 싣고 동쪽으로 온 것을 보고 승려들이 머무는 곳을 ‘백마사(白馬寺)’라 불렀다. 그때부터 화상들이 사는 곳은 모두 ‘사(寺)’를 붙여주었다.

중토(中土)에 불법(佛法)을 더 잘 전파하기 위해 섭마등과 축법란은 중국에 적합한 방법을 채택했으며 나중에 여행할 때나 행각할 때만 동냥하도록 했다. 하지만 ‘운유(雲遊 행각)’ 제도 역시 처음에는 대단히 엄격했고, 오직 ‘물병 하나에 사발 하나’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사찰에서는 불교에서는 출가를 말하기 때문에[사대(四大)가 모두 공(空)하다는 것은 석가모니가 보다 높은 무형(無形)의 물질을 개괄한 것으로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공성(空性)이고 집착이 없다는 뜻이다. 나중에는 그들의 구두선(口頭禪)으로 변했다.]

출가하면 집이 없으니 사원은 집이 아니고 또 집으로 간주할 수 없고 학교로 간주된다. 사원은 바로 불교의 대학이고 총림(叢林)이니 바로 불가의 교실이다. 이것이 실질이다. 학교라면 당연히 교육 과정과 체계가 있어야 한다. 원래 사원 제도는 대단히 엄격했으며,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선당(禪堂)에서 경전을 읽고 선방에서 가부좌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선방은 전부 열려 있었고 모두 공동으로 정진했다. 계몽을 위해 두 존자는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에서 핵심 부분을 번역해서 한 권으로 요약했는데 그것이 바로 《42장경》이다.

불문에 들어가는 목적은 아주 명확한 것으로 바로 견정(堅定)하고 용감하게 정각(正覺)을 구해 가급적 빨리 미혹을 타파해 개오하기 위함이다. 고생을 겪고 착실히 수련해, 욕망을 끊고 세속과 단절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음식이나 거처도 가리지 않았다. 최초의 사원에는 무슨 조각상도 많지 않았다. 경전이 위주였지만 나중에 점차 불교가 ‘상법(相法 사람에게 그리 높은 오성이나 영성이 없고 후천적인 오염이 심각해, 한가지 모범을 찾아 외재적인 장엄함으로 중생이 불법을 닦도록 유도한다)’으로 변하자 사원의 격식과 건설이 증가했고 계율도 더욱 완비되었으며 역대 대덕(大德)들은 모두 끊임없이 완벽히 했다.

예전에 승려들은 요리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원을 건축했고 요리할 때 고기 냄새가 너무 심해 사람을 유혹하자 이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선정(禪定)과 독경(讀經)의 청정을 보장하기 위해 나중에 고기를 먹지 못하는 규정이 생겼다.

불교도들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지자 자연히 일부 이론이 생겨났다. 이는 또한 불법의 원융(圓融)한 능력이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의미는 사람이 고기에 대한 강력하게 집착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 고기를 먹지 않는 자체가 무엇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세간의 음식에 대한 집착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강력한 장애물이자 육신의 우매한 속성에 대한 하나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 일부 불교도들은 무슨 채식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니, ‘채식 돼지 콩팥 볶음’이니 ‘채식 회과육(回鍋肉)’과 같은 요리들을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정의와 완전히 반대가 되었는데 음식 맛에 대한 집착이 더 변이되었고 더 심해졌다. 하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청정하게 수행한다”고 여긴다. 진정한 수도인이 본다면 이는 대단히 가소로운 것이다. 마치 상습 도박꾼이, 비록 판돈 대신 작은 돌이나 다른 것을 칩으로 사용해 도박한다 해도 마음은 변화가 없으면서도 “나는 돈을 걸고 도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관건은 도박을 하려는 마음의 존재 여부다. 공성(空性)은 세간의 음식이나 의복에서 모두 자연스럽게 원용하며 집착이 없는 것이다. 회색과 황토색 가사를 입었다고 청정한 것이 아니다. 부처는 찬란한 황금 가사를 입고, 도(道)는 화려한 보라색 옷을 즐겨 입지만 집착이 있겠는가? 그는 (옷을 입어도) 여전히 불도(佛道)이고 이런 개념이 없다. 속인 마음을 바꾸지 못한 사람이 설령 풀로 된 치마를 입고, 흙으로 된 침대에 살며, 음식 찌꺼기를 먹을지라도 마음속에 명리정(名利情)을 제거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가짜 수련일 뿐이다.

8. 초등학교가 대학의 기초이듯 소승(小乘)은 대승(大乘)의 기초다.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소승은 ‘상에 집착[著相]’하고 대승은 ‘공(空)’을 말하는데 그는 사람의 탐욕과 사념(私念)으로 계산한다. 물론 대승을 닦으면 ‘더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50층 건물을 당신이 단번에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고, 50층 높이를 좋아한다면 이에 앞서 49층의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는 너무나 단순한 도리가 아닌가!

마치 유가에서 말하는 “대학(大學)의 도(道)는 밝은 덕을 밝게 하고, 백성과 친하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데 있다”는 것과 같다. 한걸음에 성현(聖賢)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소학(小學)’의 기초에서 성숙하고 이성적인 예의심법(禮義心法), 효제(孝悌 효도와 우애)를 자연스럽게 훈련하고 기르지 않고 그저 겉으로 경전의 구절만 외운다면 당신은 사이비 군자인 소인(小人)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법(正法)과 상법(相法) 단계의 불교에서는, 즉 석가모니의 법이 아직 망가지지 않았을 때, 진수자(真修者)들은 모두 대승은 소승부터 시작해서 고생을 겪고 선(善)을 행하며, 고생스레 선정을 수행해야 함을 알았고 함부로 선(禪)을 말하지 않았다. 이 선이란 실제로 구경(究竟)의 공성(空性)을 집중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空)은 가공(假空)이 아니며 진공(真空)의 경계는 일체에 가득 퍼진 법성(法性)이 원만하고 그 아래의 경계는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린 것이 없으며, 자연히 모르는 것이 없고 또 집착하는 것이 없고 걸림이 없는 공명(空明)이다.

예를 들어 여래(如來) 경계에서는 여래 이하의 일체와 대천세계(大千世界)의 원리, 일체 중생의 생각, 심지어 소나 말의 사상까지도 다 알지만, 그의 사상이 그 속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여래 역시 직접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며, 여래는 바람만 있고 구체적인 일은 보살이 가서 한다.

9. 석가모니의 법이 무너지지(壞) 않은 상황에서, 우주가 만약 전반적인 정법시기(正法時期)에 속하지 않았다면, 석가모니의 계정혜(戒定慧)에 따라 엄격히 닦으면 (부원신이) 수련 성취할 수 있었다. 석가모니는 제6층 우주(宇宙 역주: 제6층 천이 아니다)에서 내려왔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제2층 우주의 중심에 있다. 때문에 극락세계의 수지(修持)는 나중에 온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마치 그가 설한 《아미타경》에 따라 참오(參悟)하고 개량한 정토법문(淨土法門)처럼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개오(開悟)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히 이해하거나 심지어 이치조차 제대로 모르는 말법시기(末法時期) 불교 신도들을 끌어들이며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인다.

사실 석가모니의 층차는 대단히 높아서 그는 직접 6층 우주를 뚫고 내려왔다. 그가 제6층 우주에 창조한 ‘대범세계(大梵世界)’에서 아주 심오한 법(法)을 가져왔다. 동시에 그는 또 그 아래 경계(境界) 중의 수많은 부처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온 중생들을 구도하기 위해, 이런 세계들 및 그 경(經)을 말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전에 어느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온 중생이면 당연히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길 갈망하며, 다른 신불(神佛)의 세계는 본래 그가 내원한 곳의 구조와는 모두 다름을 모른다.

가령 당신이 동방인(東方人)이라면 이미 동방의 사유와 생활에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을 억지로 서방(西方)에 데려가 살게 한다면 당신이 이를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아울러 당신의 그 진정한 부모도 당신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당신을 더 좋은 곳에 데려가 생활하게 한다 해도 당신의 부모는 당신을 추적해서 데려가려 하지 않겠는가? 그럼 당신을 그곳에 데려간 이는 인신매매범이 되지 않겠는가? 원래는 아주 좋은 의도였지만 나쁜 일을 한 셈이다. 신불(神佛)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자신보다 낮은 층차의 많은 부처들을 도와 그들의 세계와 소원을 원용(圓容)하도록 도운 것으로, 그 부처들은 석가모니처럼 직접 세간(世間)에 와서 널리 제도하는 사업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반 길은 마치 석가모니가 닦은 것과 같아서 줄곧 제6층 우주까지 수련(다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할 수 있을 것이다. (제6층 우주까지) 가는 길에 극락과 유리세계(琉璃世界)를 지나간다면, 그럼 이 길을 따라서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소원이 늘 아미타불을 잊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이 구체적으로 당신을 도우러 올 것이고, 그의 법신(法身)이 당신을 위해 호법(護法)하고, 당신을 보호해 당신에게 공(功)을 연화하도록 돕고, 갈 때가 되면 당신을 맞이해 극락세계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전반 길의 특징과 법칙은 석가모니가 개창한 것이라 당신은 반드시 그의 계정혜(戒定慧)에 따라 수련해야만 한다. 설사 염불이라도 겉으로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진정한 심법(心法)과 수행은 반드시 계정혜를 따라야 하는데, 이 역시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것이다.

아울러 하나의 천기(天機)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불도신(佛道神)은 단지 자기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온 사람만 구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불도신이 마치 자신이 손해볼까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다른 부처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여래 이 한 층차의 부처를, 예를 들어 말하자면 마치 변호사와 같다. 변호사도 역할이 나뉘어 있고 다양한 전문 분야가 있다. 어떤 이는 이쪽 분야가 전문이라 저쪽 사건에 대해서는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하다. 때문에 당신이 변호사를 잘못 찾아가면 그가 아무리 명성이 커도 당신에게 꼭 맞는 전문 변호사처럼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바로 이런 뜻이다.

불도신(佛道神)은 자비롭기에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 당신이 진심으로 그를 염송(念頌)하고 진지하게 그를 숭배한다면 그는 당신을 점화해 주거나 기연(機緣)을 안배할 수 있다. 진정으로 일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우주의 법(法)이 널리 전해지는 것이다. 당시 작은 범위에서 석가모니는 제6층 우주에서 내려왔기에 자연히 극락이나 유리 등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저층 세계의 법을 원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아미타불만 못하다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으로 각자(覺者)에게는 그런 가소롭고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 없다. 석가모니가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내력을 똑똑히 알아야 하며 흐리멍덩해선 안 된다.

10. 석가모니가 이 경(經)을 설할 때는 그의 만년(晩年)이었고 이미 여래 과위(果位)를 성취한 후에 설한 것이다. 그가 이 부의 경을 말할 때 이 경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했기 때문에 당시 사리불, 대가섭, 목건련 등 그의 10대 제자들이 대단히 집중했다. 당시 인도에는 아직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입으로 전하는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지혜가 높고 기억력이 좋다 해도 기억에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가르침의 결집(結集)은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정해졌는데, 아소카 왕 시대에 불교는 비로소 국가적인 존중을 받기 시작했고 조건이 더욱 좋아졌다.

그렇다면 이 500년의 구전(口傳) 중에 기록의 누락이나 차이, 잘못이 없었겠는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중 제자들이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 속에 잘못 끼워 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비록 불교가 ‘정법(正法)’ 단계에 있을 때는 제자들이 당연히 이런 일을 몹시 신중히 했겠지만, 전파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런 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금강경》은 이 일을 아주 명확히 보여준다. 후인들이 이 경을 32품으로 나눈 후 제17품부터 대량의 반복이 나타난다. 사실 어떤 사람은 기억한 것이 또 달랐고, 그들의 조사(祖師)는 모두 석가모니 생전의 대제자들이었다. 후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똑똑히 알 수 없었고 뒤에 이런 것들을 첨부해 참조로 삼았다. 목적은 누락시키지 않는 것인데 석가모니가 말한 것에 또 이런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뜻이다.

나중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경전을 번역할 때, 패엽경(貝葉經) 위의 글자에 또 결손이 나타났다. 구마라집은 경을 번역하면서 대개 자신이 구술(口述)하고 제자들더러 기록하게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원래 아무개가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 것이라는 등의 내용들을 일률적으로 삭제했다.

나중에 현장(玄奘)이 번역할 때도 구마라집의 번역을 참조했다. 때문에 후인들은 경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오류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 설사 중언부언하는 곳을 보더라도 감히 의문을 품지 못하고 또 그것을 수호하려는 감정이 있었다. 경전을 수호하는 것을 석가모니 부처를 수호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사실 구마라집이든 현장법사든 번역 과정 중에는 필연적으로 불법(佛法)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후대에 전하고 베끼는 과정 및 또 삼교(三敎)가 지속적으로 서로 분쟁하는 배경 속에서,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 속에 글자를 끼워 넣었다. 이렇게 되자 설사 이 경(經)조차도 번역하면서 어떤 곳은 너무 간략해졌고, 어떤 곳은 불타의 원문이 아니라 개인의 관념이 추가된 곳도 있었으며, 어떤 곳은 당시 삼교 분쟁에서 승리하려는 요소가 추가된 곳도 있으며, 또 어떤 곳은 번역문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 경은 유사 이래 가장 풀기 어려운 경전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경의 심오한 의미를 진정으로 탐구한 사람은 극소수이고, 그 이치를 깨닫고 폐단을 없애 새로 갱신해서 그것을 완전히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뿐이다. 진실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는데, 경(經)에는 그 배후의 요소가 있다. 정상적인 시기에 경의 배후에는 호법신(護法神)이 있기 때문에 이전 사람들도 이 경을 읽으면 속인을 보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고인(古人)은 부처님을 공경했고, 일반인도 감히 불경을 모독하지 못했다. 때문에 스스로 경을 읽기보다는 대덕고승(大德高僧)을 초청해 경을 읽어달라고 했다.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 《금강경》을 보면 그야말로 알록달록한 상태인데, 대체로 석가모니 원뜻에 부합하는 곳은 밝게 빛나지만, 오류는 아니지만 번역이 정확하진 않은 곳은 그 빛이 훨씬 어둡고, 후인이 멋대로 고친 곳은 시커멓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의 내원이 비록 아주 높다 해도 구우주 법리 속에서 그의 법(法) 역시 단지 삼계(三界)에 들어온 부원신(副元神)만 구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체(主體)인 그의 진정한 제자들에 대해, 그는 삼계 가장 높은 무색계(無色界)에 한 층 하늘을 열어 대범천(大梵天)이라 부르며, 줄곧 그곳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반복해서 전생(轉生)하며 거대한 위덕(威德)을 쌓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부동한 층차에서 떨어져 내려온 생명은 인체를 이용해 수련할 수 있는데 또한 극락이나 유리세계 등의 일을 원용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주체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껏 삼계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이 역시 그가 당시 자비롭게 “진실로 어떠한 중생도 멸도(滅度 해탈)를 얻은 이가 없다”(《금강경》)고 말한 진정한 의도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가 세상에 온 것은 대법(大法)을 전하기 위해 불가(佛家)의 문화를 건립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평생 무수한 고생을 겪었고,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그는 또 그의 진정한 제자들이 법을 얻을 수 있도록 안배해 우주 법(法)에 동화한 후 장차 그들을 데리고 삼계를 떠날 것이다. 그의 가장 낮은 제자라도 제6층 우주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당시에 체계적으로 안배한 것이다.

그의 진정한 제자들은 모두 수기(授記)가 있는데 이마에 만(卍)자 부호가 있다. 진정하게 공능(功能)이 있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머리를 깎고 아미타불을 외친다고 해서 석가모니의 제자인 것이 아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