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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관한 10가지 논의 (4)

진정(秦政)

【정견망】

편집인의 말: 이 시리즈는 본래 인민보(人民報)에 연재된 것으로 저자가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금강경》에 대해 논술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이 종교계(특히 불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데 일정한 참고 가치가 있기에 이곳에 옮겨 싣는다. 종교계 인사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대법제자들은 볼 필요 없다.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기를 바란다.


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바로 이런 원인 때문인데 단지 불타(佛陀)의 말씀에 대한 공경과 원래 뜻을 말할 뿐만 아니라 후인(後人)들에게 아주 분명한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역사상 노자가 직접 《오천언》을 쓰고 장자가 일련의 문장에서 도(道)를 밝힌 외에 석가, 예수, 공자가 말한 법은 사실 모두 그들의 제자들이 나중에 기술한 것으로 기억에 의지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석교(釋敎 석가모니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말하고 예수의 기독교에서는 사도들이 “복음서”로 그가 법을 전한 사적과 일부 대화를 기록했으며, 유가에서는 “자왈(子曰)”로 기억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어록체의 방식으로 기술된 경전은 《신약성경》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상황을 묘사한 외에, 《논어》는 대부분 한 구절 대화라 당시 대화의 맥락이나 상황을 아예 말하지 않는데 석가모니교의 경서도 대부분 이와 같다.

이는 후인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특히 후인이 강력한 사람의 집착이나 감정을 지니고 읽을 때면 더욱 그렇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맥락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잘하는 학생과 대화할 때면 미적분을 일반적인 술어로 직접 언급할 수도 있지만, 고등 수학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역사적 일화를 잘 아는 학생과 대화할 때는 미적분학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에 미적분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적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고 해서 미적분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수보리 및 많은 대제자들처럼 이들 상부좌(上部座) 제자들은 줄곧 석가모니를 따랐고 그가 법을 전한 49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수십 년 동안 불타의 옆에서 불타가 부동한 층차에서 한 수많은 설법을 들었다.

석가모니 역시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줄곧 승화했고 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래(如來) 과위를 증득(證得)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그가 끊임없이 설법하고 끊임없이 진보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전에 한 설법에 국한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뒤로 갈수록 더 뚜렷해졌고 심지어 고층 법의 표준으로 전에 했던 설법을 보면 많은 부분이 다 틀린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층차에서는 그 법이 오히려 지도 작용이 있다.

이 제자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불타를 따르며 그의 설법을 아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전 설법에 집착하고 나중 설법에 대해 의혹을 갖는 것 역시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수보리 등 대제자들은 이미 처음에 기초적인 그런 수업을 다졌고 그런 것들을 아주 확고하게 배웠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더 이상 계(戒)와 정(定)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계정혜(戒定慧)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평생 《금강경》을 외워도 계정혜(戒定慧)에 따라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해 고생스레 수련하지 않으면 1만 번을 읽어도 그 취지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불타의 설법은 필연코 모두 겨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마치 명의(名醫)가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아서 한 환자에게 모든 처방을 다 내놓거나 또는 오직 한 가지 약만 사용할 수는 없다. 원만한 공성(空性) 지혜(智慧)는, 완전히 이타적이고 완전히 공성(空性)을 떠난 것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미혹을 타파해 개오(開悟)하도록 도를 강의하고 법을 말했다. 때문에 당시 《금강경》을 설법한 이 배경과 원인을 반드시 똑똑히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이 경전이 나오게 된 연기(緣起)를 알 수 있다.

후인들은 이 경을 32품(品)으로 나눴는데, 사실 후인의 일부 이해를 첨가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은 겨냥성 있는 설법으로 주로 출세간법(出世間法)에 도달한 나한과 보살들을 겨냥해 보다 높은 경계(境界)의 진실한 심법(心法)을 말한 것으로 말하자면 고급과정이다. 후인이 이 경을 외우면 부처님의 보우(保佑)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당연히 불교가 정상(正常)적인 시기에는 석가모니의 법 배후에 관할하는 신(神)이 있기에 당연히 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수련인은 조금의 보호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진수(真修 진정으로 수련)하려면 그럼 반드시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하고 이로써 수행해 밝게 깨닫고 조금의 정보나 평범한 보우는 구하지 말아야 한다.

4. 불교 경전은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500년이 지나서야 후인에 의해 정리되었기 때문에 세 차례 결집(結集)의 역사를 보면 이미 그 당시 많은 곳에서 다소 혼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5백 년은 말할 것도 없이, 일상생활에서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같은 한마디 말을, 열 사람에게 차례로 전하면, 결국에는 원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고인(古人)은 지금 사람들보다 훨씬 마음이 고요했고, 일부 근기가 아주 좋은 불교도들은 많은 것을 듣고 외울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수행 층차에 한계가 있고 수행 단계와 복잡한 요소의 교란으로 3가지 방면에서 석가모니가 말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이미 아주 큰 변화가 발생했는데 많은 곳은 모두 더는 석가모니의 원래 뜻이 아니다.

첫째는 맨 처음 기술이 부처님이 설법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 여러 제자들의 이해가 다르고 표현도 차이가 나는데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17품 이후 중복이다. 사실 당시에 석가모니가 애초 어떻게 말했는지 분명하지 않았으며, 대표성을 지닌 다른 설법을 뒤에 첨부했는데 참고에 쓰라는 의도였다. 그러므로 애초 이 경전이 문서로 정리될 때부터 사실 이미 완전하지 못했다.

둘째, 베껴 쓰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겼고 전파자가 자신의 이해를 추가했다.

셋째 번역 과정이다. 전해지고 전해지다 구마라집이 처음 한문으로 번역한 《금강경》에는 이미 많은 오류와 누락이 존재했고, 구마라집이 경을 번역할 때 흔히 자신의 말로 구술(口述)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기록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또 쉽게 글자나 구절에 착오나 생략이 생겼다.

당조(唐朝)의 현장(玄奘)이 인도 불교의 최후 휘황한 곳이었던 날란다(Nalanda 那蘭陀寺)에 가서 경을 가져올 때, 이 《금강경》은 이미 더는 최초 결집된 상태가 아니었다. 즉 인도 불교 발전의 후기 단계에 이르러 많은 승려들이 명리나 과시 등의 심리를 내려놓지 못했고 경전에 자신의 의견 등을 끼워 넣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비록 현장법사가 대단히 해박해서 정밀하게 고증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구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가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불교는 더욱 변이되었고 면모가 완전히 망가져서 바라문교와 합류해 일종 이도 저도 아닌 종교로 변했다. 불교는 이렇게 인도에서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이 번역과정 중에 더해진 번역자의 이해와 층차는 당시 역사 환경 등의 요소 때문에 석가모니가 전한 법이 지금까지 유전되면서 그 진실한 말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진정하게 공능(功能)이 있는 사람이 불교 경전을 보면 대부분의 소위 ‘경전’은 전혀 석가모니가 말한 것이 아니라 후인이 덧붙인 것이다. 그나마 가장 착란이 적다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얼룩덜룩하다. 진정한 부처님 말씀은 황금빛으로 빛이 나지만 번역 과정에서 마음은 비록 매우 올발라도 원래 경계의 의미를 번역하지 못한 곳은 빛이 어둡고 흐리며, 착오가 있는 곳은 시커멓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읽을수록 더 흐릿해지는 이유는 문장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에도 착간이 있는 경문 자체의 힘이 난잡한 것도 원인의 하나다.

5. “어느 때”는 그날을 가리킨다. 그날은 언제인가? 바로 이 경을 말한 날이다. 당시 석가모니는 어디에 있었는가?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比丘)들 1,250사람과 함께 계셨다.”

당시 인도는 춘추시대처럼 270여 개 나라가 있었는데 사위국은 비교적 큰 제후국이었고 급고독 장로는 불교 역사상 아주 유명한 후원자였다. 사실 그는 불타의 자리 앞에 있던 대붕금시조(大鵬金翅鳥) 호법(護法)이 전세(轉世 세상에 환생)한 것으로 바로 불타가 법을 전하는 것을 협조하려 온 것이다. 그는 당시 사위국에 있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개오(開悟)해 법을 전했고 녹야원(鹿野園) 처음 법륜(法輪)을 굴려 교진여(喬陳如) 등 6명을 구도하셨음을 알았다. 이어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널리 그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알고는 부처님이 사위국에 와서 법을 전하시길 몹시 갈망했다.

당시 많은 나라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법에 대해 잘 몰랐고 그저 왕자의 신분과 그의 전기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고 많은 곳은 이미 패괴(敗壞 부패해서 망가진)한 바라문교의 천하였다.

급고독 장로는 신성(神聖)한 부처님을 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생각했다. 또 법단(法壇)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찾아 헤매다 마침 사위국 태자의 후원이 가장 그윽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이에 태자를 만나러 가서 이 장원을 팔라고 했다. 태자는 당연히 팔기를 꺼렸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가 불법(佛法)을 공경하지 않는다거나 선도(善道)를 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고독 장로가 들어주기 곤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석 달 안에 정원을 덮을 만큼의 금을 가져오면 팔겠다고 했다. 급고독 장로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이것은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일념(一念)인지라 이 힘은 아주 대단했다. 후인들은 당시 수련의 고생을 모르는데 물병 하나에 사발 하나만 들고 옷도 없고 음식도 없이 오직 마음속에 법만 있고 사부님의 지시라면 천 가지 어려움과 만 가지 위험을 겪을지라도 반드시 따랐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바로 금강(金剛)이다.

급고독 장로에게는 한가지 신통이 있어서 지하에 매장된 보물을 볼 수 있었다. 석 달 안에 태자의 장원을 살 만큼 많은 금을 모았다. 태자는 깜짝 놀랐고, 사람에겐 모두 불성(佛性)이 있는지라 급고독 장로의 초연함과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믿음에 탄복했다. 그래서 무상으로 이 장원을 기증했고 나중에 이곳은 불교도들 사이에 “금을 깐 숲[布金林]”이라 불렸다.

6. 물질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보다 높은 경계(境界)와 삶의 가치 지향을 지닌 생명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즉 급고독 장로와 같은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능력이 있다면 부자가 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돈만 있으면 자신도 자선 활동을 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기심을 변호한다. 사실 이런 어리석은 말은 바로 우주 특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한 생명이 초상적인 능력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에게 초상적인 심성(心性)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물질적 재부(財富)는 원래 모두 일종 신(神)의 뜻이 표현이라 정상적인 시기라면 이런 것들은 마땅히 정법(正法)에 이바지해야 한다. 사위 태자는 일념의 불성을 움직여 이 정원을 기증했고 나중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한과를 증득했다.

사실, ‘버림’이란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중생이 진정으로 재부를 잘 쓰면 진정한 과보(果報)는 무량(無量)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것들에 개의치 않으셨다. 설사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에 산다 해도 단지 인간 세상의 이곳을 강당으로 삼아 제자와 중생들이 법을 듣기 좋은 장소로 사용할 뿐이다. 그는 결코 사람처럼 이 공간의 것에 욕심내지 않을 것이며, 한동안 머물다 곧 다른 곳으로 가서 계속 설법하고 도를 전한다.

그가 전한 법은 결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름다운 궁전에 살면서도 여전히 탁발하고 구걸해서 숲속이나 동굴에서 고생스레 수행하며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원래의 계법(戒法)을 유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아주 분명히 볼 수 있다.

“큰 비구(比丘)들 1,250사람과 함께”는 부처님께서 그날 상부좌 제자들과 ‘법회’를 열어 법리를 설명하셨다. 여기서 ‘함께(俱)’라는 글자는 부처님이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제자들과 아무런 간격 없는 사랑을 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사실, 큰 비구들이 서로 교류할 때면 부처님은 주로 들으셨고 제자들이 어느 방면에서 공동으로 두드러진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셨다. 왜냐하면 모두 상부좌 제자들이라 대부분 초기에 나한이라 보살의 성취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겨냥해 《금강경》을 말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7. “그때 세존(世尊)께서 식사 때[食時]가 되자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그 성 안에서 탁발하시면서 차례로 빌어 빌기를 마치고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진지를 잡수시고 나서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여기서 “그때”란 규정에 따라 동냥할 때가 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세존(世尊)께서 식사 때[食時]가 되자 가사(袈裟)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그 성 안에서 탁발하시면서”를 보면 이 기록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첫째, 석가모니는 자신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에 크게 주의했고 가사를 입어 속인과 구별했으며 또한 불교를 선전했다. 당시 불교의 가사는 매우 밝고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이 점에서 나중에 중국에 전해진 후 오늘날 승려들이 입는 황토색 도포와는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나중에 사람들이 의복 장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자 그런 색깔로 변경된 것이다.

둘째, 석가모니는 몸소 직접 실천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후세의 일부 승려들이 절에서 직책을 맡으면 무슨 벼슬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제자들더러 자신의 동냥을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고, 직접 했다. 일찍이 석가 부족의 왕자였던 사람이 이렇게 제자들을 이끌고 동냥하며 고생스레 수행하고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에게 정말 부처님의 자비로운 희생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동냥이란 바로 음식을 구걸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아직 상대적으로 낮았고 다른 한편, 바라문교의 세력이 여전히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다. 당연히 존엄한 불타로 필연적으로 많은 거절, 몰이해 내지 심지어 비난에 직면해야 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초기 불교 이야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몸소 나서서 모범이 되신 것은 무엇때문일까? “차례로 빌어”란 석가모니가 동냥하기 위해 집집마다 차례대로 찾아다녔단 말인데 집집마다 음식을 조금밖에 줄 수 없었고, 어떤 집에서는 음식을 전혀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날마다 충분한 음식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번 배불리 먹으면 한번 굶는 이런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차례로 빌어”는 또 부처님이 중생과 인연을 맺는 각도에서 볼 때, 이는 또한 불성(佛性)의 무분별한 공성(空性)을 표현한다.

“빌기를 마치고는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에 이르면 세간의 그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무슨 들썩일 것도 없고 기이할 것도 없다. 출가(出家)란 세상과 인연을 끊고, 힘껏 정진하는 것으로, 원만에 이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셨고, 당시 제자들은 이를 진지하게 지키고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승려들을 보면 무슨 처장급, 과장급 직위가 있고, 어떤 이들은 자가용을 타고 번잡한 곳을 찾아 다니는데 심지어 석가모니 성지마저 “영업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완전히 석가모니 부처님을 버렸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패괴 시키고 있다. 말세의 사이비 스승과 주장은 마치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데 또한 당시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 예견했던 말겁시기의 상태와 같다. 오늘날의 승려들 중 몇이나 인간 세상의 명리정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수행해 증오(證悟)했는가?

식사를 마친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했는데 당연히 모두 동냥한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부처님은 외출할 때 입었던 가사를 정리ᄒᆞ고 식사한 발우를 설거지했는데 모두 직접 했다. “아무개야 너는 내 제자이니 네가 나를 대신해 그릇을 씻고 옷을 정리하거라”고 하지 않았다.

후대 직업적인 승려들과 비교해 보면 단번에 차이를 알 수 있다. 또 밖에 나가면 많은 길을 걸어야 했기에 물을 길어 발을 씻은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제자들에게 해법(解法)할 준비를 했다. 이렇게 첫 편 첫 번째 문단에서 비록 몇십 글자에 불과하지만 부처님의 원만한 공성과 무량한 자비를 평이하게 서술했다.

사람들은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자비평등인가? 바로 여기서부터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간단한 설명을 더하자면, 자비, 평등, 원용(圓容), 공성(空性)의 심성은 찬연히 존재 하지만 또 자연스럽다.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면 그가 걷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법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