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승
【정견망】
역사적인 현명한 황후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당 태종의 장손 황후, 명 태조의 마황후를 떠올리지만, 위 무제 조조의 아내 변후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삼국지연의》의 간웅 이미지가 너무 깊이 각인되어 조조는 물론 가족들도 많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 같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변후의 현덕과 선견지명이 역대 유명한 현후와 견줄 만하다.
변후는 본래 가무를 공연하는 광대로서, 고대에 지위가 높지 않았다. 스무 살 때 조조에게 첩으로 받아들여진 뒤 조조를 따라 낙양으로 왔다. 동탁이 난을 피우자, 조조는 동탁과 한패가 되기를 원하지 않아 이름을 바꾸고 낙양을 떠났다. 그때 원술은 조조가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조조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변 씨는 “조 군의 길흉을 알 수 없는데 오늘 집에 돌아오면 내일 무슨 면목으로 그를 다시 만나겠소. 바로 재앙이 닥쳤으니, 함께 죽는 것이 무슨 고생이냐!”(삼국지) 그 사람들은 변씨 의정의 엄한 말을 듣고 남기로 했다.
후에 조조가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자, 변씨는 조조를 따라 출정했다. 행군 도중에 그녀는 전란이 백성들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을 목격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볼 때마다 항상 멈춰서 위문하며 견직물 같은 것을 선물하곤 했다. 그만큼 변후의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조는 조비, 조식과 함께 역사적으로 유명한 건안문학을 창시했으며, 역사적으로 ‘삼조’라고 불린다. 그들의 중국 문학사에서의 공헌은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조비와 조식은 모두 변후의 소생으로, 그들이 이렇게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히 어머니 변씨의 훌륭한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비가 태자로 추대되자 좌우에서 변후에게 경하하고 변후에게 천하의 사람들이 다 기뻐하니 창고를 열어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나 변후는 “왕이 나이가 많으므로 후사로 삼았다. 나는 가르침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어찌 무거운 상을 내려야 하는가!” (삼국지) 대강의 뜻은 조비가 연로해서 태자로 세워졌으니 자식 교육에 과오만 없으면 다행이지 무슨 상을 내리겠느냐는 것이었다. 좌우에서 변후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니, 조조는 변후를 찬양하며 “노하여도 얼굴이 변함이 없고, 기뻐도 절개를 잃지 않으니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삼국지) 변후의 이런 처변불경(處變不惊-변화에 놀라지 않고) 희불실절(喜不失節-기뻐도 절제를 잃지 않다)의 표현은 깊은 도덕적 수양과 넓은 도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변후는 조조를 40여 년 동안 섬겼고, 나중에 왕후로 봉해진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그녀의 방에는 귀중한 금은 장식품이 없고, 일반적인 검은 칠을 한 기구만 있을 뿐이었다. 조정의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 그녀는 “황제의 식사 비용을 줄이고 모든 금은 기물을 없애라”고 요청했다. (‘고금도서집성’) “태후 좌우에, 채식에 조밥이고, 생선과 고기가 없었다. 그 검소함이 그러했다.” (태평어람) 책에는 비록 몇 가지 숫자지만 사람이 부귀영화를 손에 넣었을 때 검소함을 유지한 것은 고대에도 귀한 품성이었다.
변후는 스스로 검소함을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엄격하게 요구했다. 그녀는 친척에게 “거처는 마땅히 검소하게 생활하고, 상을 바라지 않으면, 생각을 잊어버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금 도서집성’) 만약 친척이 법을 어기면 엄중히 처벌하라고 했다.
“과금법을 위반한 자는 죄를 기다려줄 수 있으니, 돈이나 양식으로 대신할 수 없다.” (자치통감) 역사적으로나 지금이나 적지 않은 황제, 고위 관리들이 부인과 그 친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변후가 그토록 대의를 잘 알고 있었으니, 변후가 조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만도 했다.
건안 25년(서기 220년) 조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조비는 그 해에 선양받아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조조를 위무제로 존경하고 변씨를 황태후로 삼았다. 한 번은 조식이 법을 어겨 신하에게 탄핵당했다. 위 문제 조비는 변후가 작은 아들 조식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변후의 조카 변란에게 변후에게 어머니의 견해를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변후는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단점을 감싸지 않았고, 단지 조식이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변란에게 조비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나라고 해도 국법을 망치면 안 된다.”(‘고금도서집성’은) 조비를 만나도 변후는 이 일을 피했다.
변후는 조정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조비가 정치를 잘못했을 때 그녀는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비는 어린 시절 조홍이 비단 옷을 빌려달라는 청을 거절하자 앙심을 품었다. 조비가 즉위한 후,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조홍을 감옥에 보내 사형을 선고했다. 이를 알게 된 변태후는 분노하여 조비를 나무랐다. “양, 패(梁, 沛)사이에 자렴(子廉)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자치통감) 여기서 자렴(子廉)은 조홍(趙洪)의 자(字)이며, 변후는 조홍이 패수(沛水) 부근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조조를 구해준 것을 감격하며 조비에게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다. 변후는 또 조비의 아내 곽황후에게 “오늘 조홍이 죽으면 나는 내일 황제에게 칙서를 내려 폐후하라고 할 것이다.”(자치통감) 곽황후는 공포에 질려 여러 번 울면서 조홍을 위해 사정했고, 결국 조홍은 구출되었다. 변후는 은혜에 보답하려고 조홍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결단력 있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 역시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변후는 조조의 내조자로서 자애롭고 덕이 있으며, 대의를 깊이 이해하고 난세에 아들들을 인재로 키울 수 있었으니, 실로 규문의 의범으로 역대 현후와 견줄만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