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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와 북경의 전설

소양춘(小陽春)

【정견망】

영락제의 군사(軍師) 요광효(姚廣孝)가 칙명으로 설계한 명조(明祖)의 팔비나타성(八臂哪吒城) (인터넷 사진)

북경에 오래 살았든 새로 이사 왔든, 여러분은 나타(哪吒 중국어 발음은 너자)와 북경의 전설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북경은 나타의 형상을 본떠 설계되었기 때문에, 북경 사람들은 이 도시를 “팔비나타성(八臂哪吒城 8개의 팔을 가진 나타의 성)”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고인(古人)은 왜 나타의 형상을 본떠 수도인 북경을 건설하려 했을까?

고해유주(苦海幽州)와 얼룡(孼龍)

속담에 “불은 담자사(潭柘寺)를 태우고, 물은 북경성을 잠기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북경이 물이 부족한 도시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다.

아주 아주 오래전 용족(龍族)이 갑자기 고대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 일대) 지역을 침략했다. 원래 물가에서 살던 용족은 자신이 책봉된 동천복지(洞天福地)에 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용왕이 법술(法術)을 펼쳐 땅에 구멍을 몇 개 뚫었고, 그 구멍들이 넓은 바닷물을 끌어당겼다. 이 몇 개 구멍들이 “해안(海眼)”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바다와 연결된 눈이란 뜻이다. 《봉신연의》에서 질투심이 아주 강했던 신공표는 나중에 원시천존(元始天尊)에게 잡혀 “북해의 눈”을 막았다.

용족들이 유주에 온 후, 바람과 비를 부르고, 파도를 일으키며, 바닷물을 범람시켜 원래 평온했던 삶을 망가뜨렸다.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야 했고, 서쪽과 북쪽의 산 위로 올라가서 살았다. 때문에 이 용무리들을 “얼룡(孼龍 재앙을 가져다주는 용)”이라 불렀다. 악룡(惡龍)이 난을 일으키자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고달픈 삶을 살기 시작했다. 고생의 정도가 어떠했을까? 북경에는 지금도 “진흙 냄비로 밥을 짓고, 말로 장작을 재고, 피 묻은 쌀을 먹었다”라는 옛말이 전해진다. 정말로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해유주(苦海幽州)”란 말이 생겨났다.

얼마나 많은 해가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왕년에 진당관(陳塘關)에서 용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고 용궁을 파괴했던 셋째 태자 나타(哪吒)가 천하를 행각하다 마침 이곳을 지났다. 얼용이 고향을 강제로 차지해 좋은 농지를 침수시키고, 한 지방을 지배해 백성들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했다. 이에 의협심이 발동한 나타는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을 드러내며 구구 81일 동안 용족과 싸워 마침내 용왕을 붙잡아 가장 큰 해안(海眼) 속에 봉인(封印)하고, 또 백탑(白塔)을 세워 악룡을 진압했다. “천왕(天王)이 땅의 호랑이를 덮고, 보탑(寶塔)이 강의 요괴를 누른다”라는 속담이 여기서 유래된 게 아닐까?

이어 바닷물이 서서히 물러가면서 큰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고해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시 한번 평화롭고 생업에 종사하며 편안하게 살았다. 나중에 이 지역은 점차 번성하여 최고의 풍수 요지가 되었고, 원명청(元明淸) 등 여러 왕조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때문에 폭력을 물리치고 선량한 이들을 보호해 이 지역 백성들에게 복을 준 나타는 자연스레 이 신기한 땅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신동(神童)이 꿈에 나타나 황성을 세우다

전설에 따르면 원(元)의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을 총설계한 유병충(劉秉忠)은 몽골의 초원 문화와 중원(中原)의 예제(禮制)를 결합해 북경성(北京城) 설계했다고 한다. 특히 민간에서는 그가 설계한 11개의 성문을 또 나타의 “세 개의 머리, 여섯 개의 팔, 두 개의 발”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남쪽에 있는 여정문(麗正門), 문명문(文明門), 순정문(順正門)은 세 개의 머리를 상징하고, 동쪽과 서쪽 양쪽에 있는 제화문(齊化門), 숭인문(崇仁門), 광희문(光熙門)과 평칙문(平則門), 화의문(和義門), 숙청문(肅清門)은 여섯 개의 팔을 상징한다. 또 북쪽에 있는 안정문(安貞門)과 건덕문(健德門)은 두 개의 발을 상징한다. 따라서, 원대(元代) 시인 장욱(張昱)은 《연하곡(輦下曲)》에서 “대도에는 주변에 11개 성문이 있는데 풀로 덮고 흙을 쌓아 나타성이라”이라 한다고 썼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명의 영락제가 북경 자금성(紫禁城)을 다시 수리하기 위해 유백온(劉伯溫) 요광효(姚廣孝) 두 군사(軍師)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주원장이 제업(帝業)을 완수하고 명조(明朝) 개창에 도움을 준 유백온은 어렸을 때부터 경사(經史 경전과 사서) 및 천문, 역법(曆法), 병법, 성리학 등 다양한 서적을 폭넓게 읽었는데 특히 천상(天象)과 참위(讖緯)에 정통해, 후인들은 그를 제갈공명과 비유했다. 중국 민간에는 “공명은 천하를 삼분했고, 유백온은 강산을 통일했다. 이전 왕조의 군사 제갈량이 이후 왕조의 군사 유백온이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

[역주: 유백온의 전생이 제갈공명이라는 의미]

대명 최고의 참모로 꼽히는 요광효도 마찬가지로 “음양에 통달하고 술수(術數)에 정통한” 것으로 강호에 유명했다. 그는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정난(靖難)의 역(役)을 일으켜 제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경으로 천도해 ‘천자가 국문을 지키자[天子守國門]’는 전략을 제안함으로써 대명의 국운을 다졌다. 그야말로 “학문이 문무(文武)에 정통하면 제왕가에서 모셔간다”는 말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다.

성지(聖旨)를 받은 신기묘산(神機妙算 신처럼 뛰어난 지략)의 두 고인(高人)는 즉시 북경성 설계에 착수했다. 그들은 도시 설계의 절반을 각각 담당하기로 합의했고, 유백온이 동쪽 절반을 맡고, 요광효가 서쪽 절반을 담당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고대 건축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하기에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이 용맥(龍脈)과 풍수의 격국이었다. 당시 예전 북경성(즉 원조의 대도성)은 여전히 얼룡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지하의 노룡(老龍)을 놀라게 해서 다시 해안에서 뛰쳐나와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와 명조 북경성의 성벽과 문을 비교한 사진. (인터넷)

그 결과, 두 사람이 고민하며 머리를 짜낼 때 며칠 연속 밤마다 신기한 동자가 꿈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풍화륜(風火輪) 위에 서 있었고 몸에는 혼천릉(混天綾)을 입었으며, 8개의 팔이 마치 천수관음(千手觀音)이 사면팔방으로 팔을 뻗친 것과 같았다. 두 군사는 꿈에서 깨어난 후, 즉시 이는 나타의 신령이 나타나 점화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본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 서로 뜻이 잘 통했기 때문에 각자의 설계 계획을 신속히 그려냈다.

속담에 “기연이 없으면 책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듯이, 그들이 각자 설계한 두 장의 도면을 하나로 합쳤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전체 북경성이 8개의 팔을 가진 나타를 기반으로 삼았고, 마치 하늘이 내린 것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대칭을 이뤘다. 이는 마치 《삼국연의》에서 주유와 제갈량이 동시에 손바닥에 글자를 썼는데 손을 펴서 확인해 보니,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불(火)’이란 한 글자를 쓴 것과 같다.

고인은 “성(城)이 도장처럼 네모나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원대의 북경 고성(古城)은 성벽이 네모 반듯한 사각형이었다. 그러나 명대 요광효가 북경 성벽을 그릴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바람에 뒤집힌 종이가 우연히 성벽의 북서쪽 모서리를 덮었다. 그 결과 오늘날 북경의 서직문(西直門)은 사선으로 기울어져 모서리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하늘은 서북이 부족하고 땅은 동남이 불완전하다”는 하늘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역시 암암리에 “천지는 본래 완전하지 않고 만물은 모두 흠이 있다”는 현기(玄機)와 일치한다고 본다.

팔비나타(八臂哪吒)로 진을 펼치다

명조의 수도 북경은 비록 원조의 대도(大都)와 완전히 같진 않지만, 여전히 많은 기밀을 간직하고 있다. 명조 남쪽에 있던 정양문(正陽門)이 바로 나타의 머리가 되고, 북쪽에 있는 안정문(安定門)과 덕승문(德勝門)이 나타의 두 발이며, 중축선(中軸線)은 나타의 척추가 되고, 자금성 핵심 지역은 나타의 신체가 되는데 태화전이 심장이고, 동쪽에 있는 숭문문(崇文門), 동편문(東便門), 조양문(朝陽門), 동직문(東直門)은 나타의 왼쪽 4개 팔이고, 서쪽에 있는 선무문(宣武門), 서편문(西便門), 부성문(阜成門), 서직문(西直門)은 나타의 오른쪽 4개의 팔이 된다. 부성문의 백탑(白塔)은 바로 나타가 손에 든 화첨창(火尖槍)인데 바로 얼룡을 제압한 곳이라 풍수를 든든히 하고 그것이 뛰쳐나와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팔비나타성의 독창적이고 세심한 배치는 확실히 제갈공명의 신비막측(神祕莫測)한 ‘팔진도(八陣圖)’와 어느 정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북경에는 동쪽 바다로 통하는 세 개의 해안(海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북경 서쪽 옥천산(玉泉山)에 있는데 큰 절 지하에 눌려있다. 다른 하나는 북해(北海)에 있는데, 영안사(永安寺) 백탑에 눌려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북신교(北新橋)에 있는데 무엇에도 눌려있지 않았다.

용왕은 연왕 주체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 위에 ‘팔비나타성’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다면, 우리 용족은 장차 영원히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 성이 건설되기 전에 기회를 포착해 도시의 모든 물을 다 거둬 그들이 목말라 죽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용왕은 노부인으로 변장해 성안의 모든 우물물을 두 물통에 채워 수레에 싣고 운반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북경 노인들이 즐겨 말하는 “고량간수(高亮趕水)” 이야기다.

경성(京城) 공사가 끝난 후 용왕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다시 몰래 빠져나가 소란을 일으켰다. 결국 북경에 주둔하던 요광효에게 붙잡혀 긴 쇠사슬에 묶인 채 북신교의 해안에 갇혔는데 또 쇠못으로 사슬의 다른 끝을 땅에 박았다. 안전을 위해 요광효는 또 사람을 시켜 북신교의 해안(海眼)을 가로지르는 우물을 만들게 했고, 우물 옆에 정충묘(精忠廟)를 만들고 사당 안에 악비와 관우를 모셨는데 이때부터 “우물이 악룡을 쇠사슬로 묶고 사당이 해안을 누르는[井鎖惡龍,廟鎮海眼]” 진법이 생겨났다.

용왕은 이제는 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광효에게 물었다.

“요 군사, 설마 나를 천 년, 만 년 동안 가두려는 겁니까? 언제나 나갈 수 있겠소?”

요광효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 다리가 낡아서 수리가 필요할 그때가 바로 당신이 나갈 날이 될 것이오.” 그리고 후환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그곳의 지명을 “북신교(北新橋)”라 지었다. 다리가 영원히 낡지 않아 용왕이 영세(永世)토록 갇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북경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윗세대 어른들이 북신교 해안이 얼룡을 제거하고 또 일종 강저(江猪 물속에 사는 돼지 형상의 괴수)라는 신수(神獸)를 눌러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일단 해안이 눈을 뜨면 북경성에 곧 난(難)이 생기고 장차 물이 고갈될 것이다. 심지어 전설에 따르면 쇄룡(鎖龍)이란 노인이 있어 용과 뱀을 우물 속에 던져 넣고 용과 뱀의 충돌을 막기 위해 우물 입구를 부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1976년 당산 대지진 당시, 묘응사(妙應寺) 백탑 꼭대기를 지탱하던 8개의 쇠사슬 중 6개가 끊어졌고, 탑의 첨탑이 하필 동북 방향으로 기울어졌는데 기문둔갑에서 말하는 생문의 방위다.(인터넷 사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항일 전쟁 기간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한 후 이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심에 쇠사슬을 당겼지만, 결코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물에서 검은 물이 솟아올라 강한 비린내가 났고 지하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일본군이 쇠사슬을 우물 속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일본군의 이 예상치 못한 행동은 큰 재앙을 초래했다. 마치 수호전에서 홍(洪) 태위의 실수로 요괴들이 뛰쳐나오게 만든 것과 같다. 중국 대지에 수많은 사악한 마와 난잡한 귀신들이 뛰쳐나와 예기치 않게 중공사령(中共邪靈)의 세력을 키우게 만들었다.

1958년, 대약진 운동 시기, 북경에서 북신교 도로를 건설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로를 공사하던 인부와 주변 주민들은 100년 넘게 우물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밝혀내고자 함께 우물에 가서 쇠사슬을 당기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매우 컸다. 그 후 3년 동안 계속된 기근으로 중국 전역에서 최소 3천만 명이 사망했다.

1966년, 중국 공산당은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삿된 것을 믿지 않는’ 홍위병 혁명 소장(小將)이 다시 한번 우물 속의 큰 쇠사슬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봉인(封印)이 다시 풀렸고 이때 방출된 사악한 에너지는 더욱 거대했다. 게다가 이때 우물 주변에서도 ‘다리 날개(난간)를 수리’했다. 때문에 10년 문화대혁명이란 사상 유례 없는 거대한 겁난이 발생해 유혈이 낭자했다.

1985년, 중국 공산당은 ‘정신적 오염 근절’ 운동을 벌였다. 이 무렵, 악비묘(岳飛廟)는 이미 철거되었고, 옛 우물만 남았다. 이 자리에 대화(大華) 백화점이 들어섰다. 이듬해, 호요방은 ‘자산계급 자유화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결국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이어졌다.

1999년 7월 22일, 중국 공산당은 국가 대극원 설계 계획을 채택했다. ‘두꺼비 요괴’가 환생한 강택민(江澤民)은 호수로 둘러싸인 이 커다란 반타원형 언덕을 직접 결정했다. 이 언덕은 사실 사람이 만든 “해안(海眼)”이다. 그것의 목적은 지옥과 연결된 모든 통로를 열어 모든 마(萬魔)들이 소굴에서 뛰쳐나오게 한 것으로 지금까지 26년 동안 지속된 파룬궁 탄압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사악한 세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2004년 북경에서 지하철 5호선을 건설할 때, 원래 계획된 노선이 쇄룡정(鎖龍井 용을 쇠사슬로 묶어둔 우물) 지역을 통과했다. 공사 기간에 북정낭랑(北頂娘娘) 사원 철거처럼 비정상적인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가령 3일 동안 폭우가 내리고 우물물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등이다. 결국 지하철 노선을 우회해야 했다. 이때는 100년 이상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국제 공산주의 운동, 특히 중국 공산당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린 《9평 공산당》이라는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사설이 출판된 시기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중국 공산당은 더 이상 흐름을 바꾸거나, 스스로 재충전하거나, 사악한 에너지를 보충할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왕조의 도성 수호신

“팔비나타성의 전설”은 다소 신비로운 색채가 있고, 일부는 사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가령 유백온은 북경이 수도로 정해지기 훨씬 전에 사망했다. 이는 마치 ‘관공(關公 삼국시대)이 진경(秦瓊 당태종 시기 장수)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원조의 “삼두육비성(三頭六臂城 3개의 머리와 6개의 팔을 가진 성)”이든, 명조의 “팔비나타성(八臂哪吒城)”든, 모두 황성의 근처 크고 작은 골목길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들이다. 또 민간 설창(說唱) 예술인들에 의해 더 다듬어진 후, 다양한 무대에 올랐다. 유명한 민속학자 김수신(金受申)이 편찬한 《북경의 전설》에 따르면, 옛날 북경 백성들의 전설에 등장하는 팔비나타성은 바로 악룡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진 상징적인 랜드마크였으며, 나라와 백성을 수호한 팔비나타는 북경성의 수호신이 되었다.

고대 ‘천인감음(天人感應)’과 ‘인체는 하나의 소우주’라는 관점에서 볼 때, 팔비나타성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성(古城)이라기 보다 어떤 신비한 힘의 화신(化身)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덟 개의 거대한 팔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팔에는 서로 다른 법기(法器)를 들고 있고 이는 각기 다른 법력(法力)과 신통(神通)을 상징한다. 이 팔들은 성(城) 지하에서 십자로 얽혀 땅속으로 뻗어 나가면서 구궁팔괘(九宮八卦) 진법을 형성하는데 각각 일방(一方)을 진수(鎭守)하고 있다.

매일 밤이 되어 도시의 번잡함이 가라앉으면 제6의 감각을 지닌 사람들은 고궁 담벽에 그려진 궁녀와 같은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악룡(惡龍)의 울음소리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의 노래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수많은 억울한 혼들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현상들은 모두 다른 공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이며, “과학이 끝나는 곳이 바로 현학(玄學)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우연히도 최근 몇몇 고인(高人)이 북경 ‘해안’속에 눌려 있는 악룡처럼 공산당도 다른 공간에서 한 마리 붉은 색 악룡[紅色惡龍]임을 발견했다. 유구한 문화를 지닌 이 오래된 대지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찬탈하자마자 역사건축 대가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경 고성의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인류에 반대하고, 천지에 반대하며, 우주에 반대하는 中共邪敎는 여전히 민족의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북경의 용맥과 풍수를 훼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강희자전》과 《사해(辭海)》에서 “나타”를 찾아보면 “나(哪)”는 “나儺(악귀를 쫓음)”로 풀었다. 즉 본래 뜻이 “바른 것을 지키고 삿된 것을 물리친다[扶正祛邪]”는 뜻이다. “타(吒)”는 “질타(叱咤)”의 뜻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나타(哪吒)는 바로 나타(儺吒)이고 의미는 귀신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본다. 또 어떤 학자는 나타의 의미는 악룡을 항복시키고 사악한 마를 몰아내는 정의(正義) 세력의 화신이라고 본다.

1969년, 서직문(西直門)이 철거된 후 북경에서는 더 이상 성문이 철거되진 않았지만, 성벽은 이미 오래전 철거되었다. 양사성(梁思成)은 임종 전 한숨을 내쉬며 “800년 된 고성이 사라졌으니 50년 후에는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 사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의의 세력에 의해 제거당할 것이 두려운 중공 마귀는 최근 중국 고전 소설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영주자(靈珠子 태을진인의 제자이자 나타의 전생)의 환생인 나타가 바다에서 소란을 피우고, 용을 죽이며, 뼈를 발라 부친에게 돌려주고, 연꽃으로 다시 태어나 주(周)나라를 도와 폭군 주왕(紂王)을 토벌했고 최후에 육신을 지니고 수련 성취된 나타라는 전기적인 신동(神童)의 이야기에서 줄거리를 뜯어고치고 함의를 반대로 뒤집어 악의적으로 천명(天命)을 믿지 않고 천지와 싸우는 반역의 마동(魔童)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혁명 이후 세대”에게 중국의 옛이야기를 날조해 세뇌하고 공산 정권의 붉은 색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몽상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