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흔
【정견망】
목차
제1회, 여희가 몰래 세자를 해치자 중이(重耳 진문공)가 화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다
제2회, 넓적다리 살을 베어 군주를 봉양하여 충의를 다하고 중이는 생명의 은혜에 눈물로 감사하다
제3회, 중이가 신구(新舊)를 분별하고 강변에서 공을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하다
제4회 문공이 자리를 이어받아 모두에게 상을 내리고, 개자추는 짚신을 엮어 청빈하게 살다
제5회, 상상상덕(上赏赏德)과 장상 상재 상공 상신근(赏才赏功赏辛勤)
제6회, 여러 신하가 공로를 다투고 개자추는 안빈낙도하며 공을 탐하지 않다
제7회, 가난하게 살면서 청렴을 즐기다 모친을 업고 밤새 면산으로 숨다
제8회, 문공이 면산에 불을 내어 모자가 타죽어도 상을 받지 않다.
제9회, 근정 청명 복청명. 자추가 혈시로 단심에 기대다
제10회, 죽어도 상을 받지 않음으로써 세풍을 바로잡고 성현을 칭송하다
제11회, 문공이 자책하여 개산介山을 봉하고 백성들은 은혜에 감사하여 한식을 바치다
제12회 천추동안 개신에게 제사지내고 사해에 같은 민속이 된 청명절
제13회, 청명한 성심으로 선조에게 절하고 성현의 미덕은 천고에 전해지다
제14회, 단오의 굴원이 개자추를 생각하며 눈물 콧물로 임금이 밝기를 희망하다
제15회, 왕조 대대로 많은 성현들이 중화 5천년을 찬란하게 하다
제16회, 한식에 감사하여 개공에 제사지내고 인심을 깨끗이 하고 선한 신을 선택하다
제1회, 여희가 몰래 세자를 해치자 중이(重耳 진문공)가 화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다
한식절은 금연절, 냉절, 백오절이라고도 하며, 동지 후 105일 째, 청명절의 이틀 전이다. 불을 금하고 찬 음식만 먹는데 2천여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한때 민간 최대 제삿날로 불렸다. 이는 한족 전통 명절 중 유일하게 음식 풍습으로 명명된 명절로, 2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단오절보다 358년 일찍 생겼다. 한식절은 청명절의 어머니로 불리며, 이는 한 성현과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개자추(介子推)이다.
이야기는 춘추 시기에 발생했으며, 모두들 춘추오패(春秋五霸), 그 다음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을 알고 있다. 굴원은 전국 말기의 사람이니, 개자추는 굴원보다 300년 이상 빠르다. 춘추오패 중 첫째는 제 환공(齊桓公), 둘째는 진 문공(晉文公)이다. 이야기는 진문공과 연결되어 있으며, 진문공과 개자추는 모두 산서성 사람이었다.
당시 진晋나라에는 진헌공(晋献公)이 있었는데, 여희(骊姬)라는 이름의 총애하는 비가 이름있었다. 이 여희는 매우 아름다웠고 막내아들 해제(奚齊)를 낳았다. 물론 누구나 저가 아들을 사랑하니 여희는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당시 진헌공에게는 몇 명의 아들이 있었다: 신생(申生), 중이(重耳)와 이오(夷吾)였고 여희의 아이 해제는 그들의 동생으로, 덕행이 크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면 세 명의 형이 장애물이었다. 그녀는 장애를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사용한 것은 모두 음모와 악랄한 속임수였다.
여희가 먼저 진헌공에게 태자가 자기를 희롱했다고 말했는데 헌공이 믿지 않자 진헌공에게 다음날 위층 높은 곳에서 지켜보라고 했다. 여희가 미리 머리에 꿀을 바르고 화원에 놀러 갔을 때, 벌들이 모두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 때 그녀는 태자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했다. 태자가 소매를 휘둘렀고, 저쪽 위층에서 헌공이 보니, 이건 자신의 애희를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진 헌공은 매우 화가 나서 태자를 폐위시켰다. 이 신생은 비록 억울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말한다면 그건 군주 아버지를 불의에 빠뜨리는 것과 같으며, 아버지를 난감하게 하고 곤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
신생이 자살한 후 태자가 없어지자 그 두 형들도 여희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도망쳤다. 나중에 진헌공이 죽자 해제는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진나라는 그 당시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짧은 시간 동안 진 헌공의 장례식에서 해제가 칼에 찔려 죽었고, 나중에 여희의 죄가 드러나 살해당하여 남을 죽이니 결국 자신을 해쳤다.
생각해 보라. 때때로 사람은 정말 모른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도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작은 길을 질러가려고 한다. 마치 여희가 이렇게 작은 길이나 가까운 길을 질러가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해쳐서 권좌와 “행복”을 얻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얻었는가? 오히려 그녀의 아이는 매우 단명하여, 비록 군주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칼에 찔려 죽었으니 불쌍하고, 슬프고, 한탄스럽다! 그는 한 나라의 군주가 될 덕행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실 그가 그 군주 자리를 다투지 않았다면, 분명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뒷이야기인데 여기서 먼저 말했다.
중이(重耳, 나중의 진목공)는 19년 동안 도망쳤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찾아갔다. 고난의 도피 길은 겹겹이 험난했다. 한 번은 중이가 굶어 죽을 뻔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무엇 때문에 살아났을까? 2회를 보라:
제2회, 넓적다리를 베어 군주를 봉양하여 충의를 다하고 중이는 생명의 은혜에 눈물로 감사하다
그때 태자인 큰 형이 해쳐 죽었고, 그 두 형도 여희의 모함에 걸려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중이는 덕행이 있는 공자이지만, 온데로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 중이는 총 19년 동안 도망쳤는데, 나중에 진문공이 패업을 이룬 것은 이미 60대 후반의 일이었다.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
이 도망치는 19년 중 한 차례 매우 비참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자 모두가 산나물을 조금 캐서 먹었다. 그는 도련님이라 호의호식하는 데 익숙했는데, 이때 산나물을 먹으려 해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배고파서 기절했다. 이 가장 위급한 시기에 개자추가 그에게 고기국을 한 그릇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먹고 나니 몸에 힘이 생겼다.
그는 살아난 후 문득 나물도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고깃국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기는 어디서 났는가? 개자추는 이것이 자기 허벅지를 자른 살이라고 했다. 개자추의 이러한 충성심은 공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당신의 행복이다. 만약 이런 부하 직원과 직공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사장, 상급자, 그리고 지도자의 복이다.
생각해보면, 이 중이(重耳)는 그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먹을 것이 없었고, 개자추 역시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굶주린 상황에서 자신의 살을 잘라 공자에게 바친 것이 ‘충’의 표현이다. 개자추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효자는 몸을 죽여 그 부모를 섬기고, 충신은 몸을 죽여 그 임금을 섬깁니다.”
그는 이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이는 또한 고대인들이 말한 ‘의(義)’이다.
중이는 그 말을 듣자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말했다:
“그대에게 폐를 심하게 끼쳤구려.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겠구려? 나는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공자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쳤소이다. 나와 함께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신 살을 베어 저에게 먹이게 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는 것을 정말 큰 은혜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필요할 때 자신의 살을 베어 먹인다.
개자추는 오히려 “공자가 빨리 진나라로 돌아가 신 등의 고굉지의(股肱之義 허벅지와 팔뚝- 왕을 돕는 유능한 사람을 비유한다)를 이루면 되지 신하가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했다.
그 뜻은: 내가 다리를 베는 이유는 당신이 현덕하기 때문이고 앞으로 진나라에 당신같은 현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귀국해서 백성을 잘 대해주고 부지런히 정치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답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국가와 백성을 좋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개자추가 생각한 것은 군주와 백성이었지만, 그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당신은 내게 보답하는 것은 나에게 관직과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국가를 잘 다스려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충성에는 내가 없고, 허벅지를 베어 군주를 받든다(忠義無我,割股奉君)”라고 요약한다.
중이가 배가 고파 쓰러지자 넓적다리를 베어 임금을 받들다. 자추의 충의는 무아이다.
중이는 19년 동안 도망다니며 각종 시련을 겪었고, 결국 진(秦)나라에서 진(晋)나라로 데려와서 진문공이 되었다. 귀국길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는데, 정말 ‘새로움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제3화를 보시라: 중이가 귀국하여 신구를 분별하며 강변에서 공을 잊지 않기로 맹세한다.
3회, 중이가 귀국하면 새사람과 옛사람을 분별하고 공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다
중이는 19년 동안 도피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결국 진(秦)나라로 도망쳤다. “진진의 좋은 점(秦晋之好)”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에는 유래가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하의 서안과 동쪽 해안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현재의 협서(陕西)와 산서(山西)가 있으며, 진(秦)나라는 진(晋)나라와 역대로 혼인을 맺었다. 돌이켜 다시 진(晋)나라에 대해 말하자면, 진 헌공 후의 있는 두 국군은 모두 덕행을 중시하지 않고, 소인을 중용하려는 욕심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진 혜공(晉惠公)과 진 회공(晉懷公)은 모두 죽었고, 진나라에는 군주가 없으니 중이에게 돌아와 달라고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망명 19년 후, 중이는 진(晋)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진나라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아래에 의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도망간 지 19년이 지났으니 고난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협서에서 산서의 진나라로 돌아오는데는 황하를 건너야 했고, 황하에 도착한 후, 후방에서 재무를 관리하는 호숙(壶叔)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호숙은 돗자리, 썩은 장막, 망가진 제기, 남은 콩 등을 배로 옮겼는데 도망치는 것에 익숙해지고, 고생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먹을 것과 쓸 것들도 많이 배에 실었는데 모두 비교적 오래된 것들이었다.
진 문공이 보고 호숙에게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귀국하여 일국의 왕이 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한 쪽에 있을테니,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을텐데 이런 낡은 것을 왜 가져가느냐? 다 버려라.” 그가 이 물건들을 모두 배에서 내리라고 명령하자, 호숙은 다시 물건을 아래로 옮겼다.
이때 중이의 외삼촌 호언은 이 광경을 보고 생각했다: “중이가 도망친 지 19년, 새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하는구나. 아직 왕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낡은 물건을 싫어하는구나. 장래 아첨하는 새 사람들이 많을텐데 그를 따라 함께 고생했던 우리 노인들은 분명 그때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떠나려고 했다. 호언은 진秦나라 군주가 그에게 준 백옥 한 쌍을 꺼내 무릎을 꿇고 중이에게 바치며 말했다.
“우리가 19년 동안 당신을 지켜주면서 비록 약간의 고생은 했지만, 당신에게 죄를 지은 것도 적지 않습니다.”
도망다니는 과정에서 중이를 고생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 유명한 한 가지 사건이 있는데, 제나라에 있을 때 중이가 아내를 얻어서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거의 예순 살이 되어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안일함을 탐내면 포부가 사라지게 된다. 결국 모두가 그를 술에 취하게 만들어 강제로 제나라를 떠났다. 화가 난 중이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이 국군(國君)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들이 떠오르면 그럼 자신을 죽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국군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보좌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같은 노인들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진秦나라에 남아 평생을 살 것입니다.”
중이 역시 훌륭한 사람이었다. 깨달음이 있어서 간언을 들을 수 있어서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외삼촌이 자신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새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할 수 있는가? 그래서 호언에게 말했다:
“제시한 의견이 너무 옳습니다. 저는 새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며 그런 것들을 모두 실어라고 했다. 이어 말했다:
“귀국해서 외삼촌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면 내 자손이 창성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외삼촌에게 맹세했다.
모두가 “벼락맞아 죽는다”는 말을 알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쾅”하고 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국군으로서 “자손이 창성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지만, 그것은 정말 큰 일이며, 중대한 맹세이다. 옛 사람들은 맹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중이는 말하면서 벽옥을 황하로 던져버리고 강의 신인 하백에게 증언을 요청했다, 즉, 외삼촌이 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도움을 주었는지 언제나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4회, 문공이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상을 많이 주고 개자추는 신발을 지어 청빈하게 살다
중이가 외삼촌 호언과 대화할 때, 옆에서 일하고 있던 개자추가 모두 듣고 은거할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국군, 이런 대신, 그는 이런 군신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만약 여러분이라면 원하겠는가? 개자추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국군을 보라. 아직 귀국하지도 않았는데도 부귀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백성이 있을까? 이런 대신은 10여 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자신이 국군을 보위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공로와 상을 다투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상은 국군 자기 것을 주는 것인가? 모두 백성들의 것이 아닌가? 국군이 상을 많이 줄수록 백성들이 더 많이 바쳐야 한다.”
그래서 개자추는 은거할 마음이 생겼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19년 동안 도망쳐서 국군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는 모두 고생을 많이 했는데 모두 국군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국군이 될 수 있는지는 그 자신의 현덕과 하늘이 그에게 내린 선택이지, 그를 보호한 사람의 공이 아니다. 그를 보호한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당신의 양심이고 책임이다. 옛사람들은 말한다.
‘군자는 의리를 알고, 소인은 이익을 안다.‘
국군, 대신은 모두 군자나 어른이며, 소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자신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신하로서 주공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고, 고생하고 굶주리는 것도 당연하지, 어떻게 하늘의 공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자(介子)는 이 신하들을 모두 ‘하늘을 공을 탐하는 자’라고 했고, 내심 고결한 그는 이들과 한패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귀국 후, 중이는 풍광 당당하게 대국의 왕이 되었고, 바로 진문공이 되었다. 개자추는 한 번 조정에 올라가서 시련을 겪었고, 왕을 받드는데 성공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그때부터 집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뭐를 했을까? 삼베를 짜고 짚신을 엮어 파는 일을 했다. 짚신을 팔면 얼마에 팔 수 있는가? 가끔 끼니를 거르기도 했지만 그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바로 옛사람이 말한 안빈낙도이다.
진 문공은 귀국한 후, 큰 상을 내리며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따랐던 공신들을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여러 사람에게 상을 준 후, 아무것도 받지 못한 호숙은 불만을 품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왜 나에게 상을 주지 않았을까? 나는 19년 동안 은을 짊어지고 재물을 관리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을 주었는데, 왜 나에게 상을 주지 않을까? 나를 잊은 거 아닐까?”
그는 후방 재무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19년 동안 매우 고생했다. 호숙(壶淑)은 진문공(晋文公)을 찾아가 상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그는 진문공에게 물었다.
“저 19년 동안 매우 고생했습니다. 피로가 쌓일만큼 뛰어다녔는데, 당신은 왜 나에게 상을 주지 않습니까?”
진 문공은 “나는 세 종류 사람에게 상을 내린다. 첫 번째 사람은 어진 사람, 나에게 인덕을 가르치며, 도덕을 가르치고, 나의 흉금을 넓게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일등 상을 받는데 상상덕상이라 부른다, 상은 덕을 갖춘 사람에게 내린다. 두 번째 상은 여러 나라의 왕들로부터 모욕을 면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준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그래서 차상상재라고 한다. 세 번째로 상을 내리는 사람은 죽음과 창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화살 한 발을 쏴고 몸으로 나를 보호해 주는 사람으로 삼상상공이라 부른다. 목숨을 걸고 주공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 전통 문화에서 이 세 종류 사람에게 먼저 상을 주는 것을 알수 있다.
진 문공이 세 종류 사람에게 상을 내리며, 고생한 호숙은 그 안에 없었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일까? 호숙은 상을 받았을까? 제5회를 보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