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
【정견망】
불법은 박대정심하고 역사가 유구하다. 하지만 불교가 남긴 경서는 끝없는 불법의 ‘한 바가지 물’일 뿐이다. 그러나 유교, 불교, 도교 문명의 교양을 깊이 받고 사회 도덕 기준이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중국 고대에서는 사람들이 부처에게 향하는 마음만 있다면, 단지 경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천인의 감응을 형성하고 신불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위험이 안전하게 되고 위기를 안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덕을 쌓고 선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경건한지에 따라 신불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가 얼마나 불가사의한지 알 수 없다.
유검이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경을 통독하여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나다
유검(柳俭, 530년~618년)의 자는 도약(道約)이며, 하동군 해현(解縣, 지금의 산시성 남서부에 위치) 사람이다. 일찍이 북주 시대에 그는 조정의 명신이었으며, 이후 수 문제 시대에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현명하고 인덕 있는 좋은 명성을 남겼다. 수 양제 때가 되어 계속해서 공인된 청렴함으로 황제의 표창을 받았다. 그런데 수나라 공제(恭帝)가 막 즉위한 지 1년 만에 누가 누명을 씌워 죄를 선고받고 대리사 감옥에 갇혔다.
유검(柳俭)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에 옥중에서도 태만하지 않고 부지런히 불경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지막 두 페이지를 읽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꿈에서 한 스님이 말했다:
“시주는 경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풀려날 수 있소!“
그때 유검이 갑자기 깨어났고, 그래서 계속해서 경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 갑자기 법정으로 이끌려가서 재판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유검이 출옥한 첫날 밤에도 그는 삼경까지 경을 읽었다. 이때 감방에는 이상한 향기가 가득했고, 날이 밝아도 흩어지지 않았다.
심가회가 동악신의 지점을 받아 경을 읽은 후 다시는 귀양가지 않다
당나라 정관 연간에 심가회라는 이름의 교서랑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란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쪽을 향해 태산에 절을 올리며 동악신에게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이백여 일이 지나고, 영휘 6년 10월 3일이 되던 날 밤, 그는 꿈에서 두 명의 동자가 당당한 모습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그의 앞에 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심가회에게 자신이 동악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특별히 명을 받아 그를 청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나 심가회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태산이 여기서 3천여 리나 떨어져 있는데,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몸을 뺄 수 있겠는가?“
동자는 걱정하지 마시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잠시 후, 심가회가 눈을 뜨자 웅장하고 장엄한 궁전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동자를 따라 들어가 동악신을 알현했다. 그리고 동악신은 그를 밀실로 데려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악신은 그에게 말했다:
“요즘 세상에 악을 행한 자는 주살당하지 않더라도 지하에 가면 귀신에게 징벌을 당하니 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네가 불경을 하루에 한 번씩 읽을 수 있다면, 어떤 죄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의 귀신도 감히 너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동악신은 또 말하기를 ”나의 인간세상에서 성은 유씨다. 이전의 동악신이 죄를 지어서 하늘의 관아에서 그를 파면했다.“
심가는 가만히 듣고만 있으며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동악신은 그에게 매우 정중하게 대했고, 함께 바둑을 두자고 초대했을 뿐만 아니라 연회까지 베풀어 그를 대접했다.
자리에서 그는 옆에 있는 작은 홀에 도착했는데, 마침 고장(姑臧)의 현령이 홀판(笏板)을 들고 한쪽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심가회에게 “동악신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지 60일이 지났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직도 처리되지 않고 있다.“
심가회는 곧 동악신께 아뢰었다.
그러자 동악신은 사람을 시켜 고장 현령을 데려오게 하고 말했다.
“당신 현에 아조(阿趙)라는 이름을 가진 부인이 당신 관아의 현위에게 모진 고문으로 죽었다. 아조가 저승에 가서 고소를 했고 귀신이 너를 잡아왔다.“
밖에 마당에 물이 한 대야 있는데, 동악신이 그에게 얼굴을 씻으라고 한 후 동자를 불러서 그를 돌려보냈다. 이때 심가회는 동악신에게 작별을 고했고, 동악신도 두 명의 동자를 보내 그를 배웅했다.
그는 태산에서 총 28일을 머물렀고, 유배지로 돌아온 후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는 고장현령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었고, 이후 한 장사(長史)의 조사 결과 그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이후로 심가회는 매일 경문을 낭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대사면을 받고 그는 고향으로 보내졌다.
소우(蕭瑀)가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독경한 후 무죄 석방되다
소우는 양무제의 현손이자 양명제 소규(蕭巋)의 아들이자 수나라 소황후의 친동생으로, 이후 당 고조 이연에게 투항하여 송나라 공으로 봉해졌고, 친근하게 그를 ‘소랑(蕭郎)’이라 불렀던 조상의 영향 때문인지 일찍부터 불법을 깊이 믿었고, 평소에는 항상 ‘금강경’ 한 권을 들고 뒤적거리며 읽었다.
당시 수 양제가 출병하여 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자, 소우는 전력을 다해 말렸고, 두 번이나 황제의 뜻을 거역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를 명신 고경(高熲), 명장 하약필(贺若弼)과 함께 가두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과 달리, 소우는 감옥에서 8일 동안 ‘금강경’만 외웠다. 칠백 번이나 읽었을 때 그의 몸에 있는 족쇄가 갑자기 풀렸다. 옥졸들은 놀라서 얼른 다시 족쇄를 채웠다. 황제를 만나는 날, 황제는 고경과 하약필을 엄벌에 처하고 두 사람을 함께 처형했지만, 오히려 소우는 풀어주었다.
출옥 후 소우는 ‘반야경영험18조’를 썼고 단향나무로 석 자 높이의 보탑을 세워 경서를 보관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마당에 황동 불상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매우 경건하게 불상을 목탑에 모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탑 안에 사리 백 개가 또 나타났다. 정관 11년, 그는 보현보살이 탑에서 천천히 솟아올라 서쪽으로 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
포로가 된 최문간이 독경 후 족쇄가 저절로 열리다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가 재위할 때 최문간(崔文簡)이라는 사람이 방주(坊州) 사마(司馬)직을 맡고 있었다. 방주는 토번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당시 토번군의 괴롭힘과 침범을 자주 당했다. 어느 날, 그는 토번군에게 잡혀 두꺼운 족쇄를 찼다.
최문간은 불자로서 체포된 후 줄곧 경문을 경건하게 낭독했는데 셋째 날이 되자 족쇄가 스스로 풀렸다. 그를 잡은 사람은 그가 속임수를 쓰는 줄 알고 채찍으로 호되게 때렸다. 그러나 그는 족쇄가 저절로 풀렸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말했다:
“너는 무슨 법술을 아느냐.“
그는 “매일 금강경을 읽는다.”
그 사람들은 믿지 않고 다시 그를 가두고 경문을 읽게 했다. 결국 경을 다 읽기도 전에 족쇄가 풀렸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여 즉시 그를 토번에서 내보냈다.
사형수가 성심성의껏 경을 읽고 죽을 죄가 황제에 의해 사면되다
당 현종이 재위할 때 매우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장안현의 일부 죄수들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들은 감옥에서 40일 넘게 경건하게 불경을 낭송하며 하루도 쉬지 않았다. 처형되기 직전, 그들의 몸에 있던 족쇄가 갑자기 풀렸고, 자물쇠는 수십 장의 빛을 뿜어내며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현 전체가 매우 밝았다. 후에 현령이 이 일을 상소하자, 황제는 그 범인들의 죄를 모두 사면했다.
참고자료: 《법원주림》, 《보응기》, 《광이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