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 정리
【정견망】
청나라 도광 연간, 절강성 소계진 육도촌에는 양씨 가문이 있었는데, 선비 가문으로 가정 형편이 꽤 부유했다. 그들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딸은 태어날 때 먹을 젖이 없었고, 부모는 유모를 찾아 헤매도 찾지 못했다. 나중에 서안현(西安县 현재 취저우시) 예현문(禮賢門) 밖에 있는 오두당(吳頭塘)에 홍씨 성을 가진 집이 있다고 들었다. 방금 아이를 낳았고 젖이 나오고 있었다.
홍씨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양씨 집 사람들은 홍씨와 상의했다. 홍씨는 “그 아이를 우리 며느리로 삼으면 먹여 키울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내 젖을 내 아들에게만 먹일 수 있습니다.”
양 씨 부모는 딸이 젖을 먹지 못하면 굶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씨네는 비록 가난하지만, 딸을 홍씨네 집으로 시집보내면 어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동의했다.
양씨 집의 딸이 자라서 아름답고 총명했다. 그녀의 부모는 다소 후회하여 딸을 되찾고 싶어했지만, 홍씨 집안은 거절했다.
“처음에 이왕 그녀를 며느리로 삼겠다고 약속했고 지금은 이미 십여 년을 키웠습니다. 당신들이 이제 와서 번복한다면, 저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씨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홍씨 집안의 생활을 위해 10무의 논을 홍씨 집안에 기증했다. 이렇게 하면 딸의 생활도 좀 더 나아질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씨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양씨 모친은 딸을 아끼며 다시 홍씨 부부와 딸을 불러 딸을 집으로 찾아오는 일을 상의했다. 홍씨 부인은 끝내 거절했다. 양씨 모친은 딸에게 “집에 가서 능라 비단을 입고 고기를 먹겠느냐, 홍씨 집에서 무명옷을 입고 나물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시 열네 살이었던 딸은 “저는 어려서부터 홍씨 집안의 며느리로 시집을 갔습니다. 가난해도 제 팔자입니다.”
양씨 모친은 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딸이 홍씨 집에 돌아가는 것을 금했지만, 딸은 양씨 집안에서 며칠을 보낸 후 기회를 찾아 홍씨 집으로 도망쳤다.
또 얼마 후, 양씨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고, 양씨 형제 일곱 명은 홍씨 가문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홍씨 가문과의 결혼을 취소하고 싶어 여동생을 집으로 불렀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양씨 딸은 거친 천 옷을 입고 집에 돌아왔다. 오빠와 형수는 그녀에게 비단 옷을 갈아입혀 집에 머물게 했고, 온 가족이 함께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란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양씨 딸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겨울이 되자 양씨 딸은 홍가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의 올케는 매우 화가 났다. “네가 홍씨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앞으로 양씨 집안에 오지 마라. 입고 있는 옷도 가져갈 수 없다.”
양씨 딸은 올케가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체면을 부수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려한 옷을 벗고 원래의 무명옷을 입고 홍씨 집으로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그가 돌아오자 매우 기뻐했다.
“네가 안 돌아오는 줄 알았다.“
양씨 딸은 “나는 살아서 홍씨 집안 사람이고, 죽어도 홍씨 집안 귀신입니다.”
한 달여 후, 홍씨 집안의 남자 주인이 중병에 걸렸고, 홍씨 집의 아내는 아들과 양씨 집의 딸을 하루빨리 결혼시켜 양씨 집안의 생각을 없애도록 했다. 그래서 열다섯 살 된 양씨 딸은 홍씨 집의 아들과 결혼하여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남편도 세상을 떠났고, 단지 10무의 밭과 어린 아들만 남았다. 양씨 딸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자서 농사일과 바느질을 하며 아들을 키웠고, 나중에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았으니 정말 절부였다. 안타깝게도 아들도 젊은 나이에 죽고 조손(할머니 며느리 손자) 세 명만 남았다.
함풍 8년(1858년), 손자가 막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조정과 맞선 태평군이 취저우로 왔고, 피난민들이 분분히 홍씨 집을 지나갔다. 곧 태평군도 홍가문 밖에 도착했다. 홍절부는 급히 어린 손자와 며느리를 데리고 세 벌의 도롱이를 들고 쌀 두 말, 장막 한 개, 그리고 약간의 옷가지 등을 메고 집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태평군은 그녀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홍절부도 자신이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지, 왜 이렇게 많은 물건을 휴대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뒤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태평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바로 전날, 홍절부는 갑자기 기절했고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이 보고 그녀를 문밖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는데 한 무더기의 콩이 있었고, 손으로 다시 왼쪽을 가리켜서 그쪽을 보니 세 개의 수세미가 있었다. 노인은 말했다.
“내일 콩이 있는 쪽으로 가지 말고 수세미가 있는 쪽으로 가라.“
말하고 사라졌다. 홍절부는 마치 꿈을 꾼 듯 깨어났다.
다음날 조손 세 사람은 왼쪽으로 달려갔고, 과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7~8일 동안 있는 힘을 다해 걸었고, 깊은 산속에 숨어 세 사람 모두 목숨을 건졌다. 손자가 성장한 후, 집에는 이미 80여 묘의 논이 있어 생활이 풍족해졌다.
이것은 하늘이 홍절부가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암암리에 도와 위기를 모면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함풍 연간에도 절강성 강산현에는 감생 왕요남의 아내인 절부 임씨가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공부하여 예의를 잘 알았다. 스물네 살에 왕가로 시집갔다. 시댁은 가난했고 임씨는 혼수가 풍성했지만 교만한 기색 없이 시어머니에게 효도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왕요남은 세상을 떠났고, 두 사람은 아이가 없었지만, 임씨는 절개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절대 개가하지 않았다.
함풍 8년, 태평군이 절강성 강성현에 침입했을 때, 그곳에서 교관으로 일하던 임씨의 친오빠 온 가족이 난리통에 죽었다. 임씨 집안은 어린아이 한 명만 남았는데, 바로 임씨의 일곱 살 된 남동생이었으며 태평군에게 납치되었다. 임씨는 비보를 들은 후 모든 혼수와 금은보석을 팔고 친척인 범씨의 집에 찾아가 동생을 구해 임씨 집안의 대를 잇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범씨는 흔쾌히 승낙했고, 결국 거액을 들여 임씨의 어린 동생을 되찾았다.
나중에 임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막내아들이 남았다. 임씨는 동생을 키우려 애썼고 어느 집에 시집가지 않은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운 뒤 그 둘을 결혼시켰다.
왕과 임 두 집안의 제사는 모두 임씨의 양육 아래 보존되었다. 임씨는 절조를 지키고 정직하며 지조를 굳건히 지킨 것은 온 현에서 다 알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7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