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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만 좇고 해로움은 피하는 짓은 하지 않는 선비 유새

【정견망】

유새(俞塞), 자는 오체(吾體), 호는 무해(無害)이다. 그 생년을 따져보면 명나라 시대일 것이다. 숭정 말년에 그는 외지를 여행했고, 어떤 사람은 석성현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군청 동문의 성루에 살았고, 나중에는 산속의 사찰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는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인품과 학문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석성 일대의 선비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와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현지의 어느 동씨 성을 가진 현령이 그의 명성을 알게 된 후 직접 방문하여 그에게 돈과 재물을 보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청대에 이르러 유새는 자신의 성을 독고(獨孤)로 바꾸었다. 그는 광범위한 도서를 섭렵했으며, 특히 의서를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후 《역경》을 연구한 후, 의학과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습니다. 후세에 그의 전해진 의서 《본초정오》는 청대에 쓰여졌다. 그가 쓴 의역(醫易)이란 책에는 ‘의(醫)가 역(易)에 통하지 않으면, 그 의술(術)이 정통하지 못하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역(易)에 통’한 그는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할 때 항상 탁월한 방법이 있었다.

그의 고향은 고휘주에 위치해 있으며, 후에 그는 또 많은 곳을 가보았다. 그는 성격이 인자하여 윗사람은 윗사람에게 효도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우애로왔다. 그는 매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책을 너무 열심히 읽어서 자주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책에 담긴 내용을 깨달을 때 비로소 기분이 좋아졌다.

유새는 “이윤·주공(伊尹、周公) 같은 현명한 재상이 되기는 어렵지만 공자와 안회 같은 군자가 되기는 쉽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동의하지 않자 그는 말하기를 “선비들이 뜻을 얻지 못하면 이윤·주공처럼 임금을 보좌할 기회가 없다. 하지만 공자·안회처럼 속세에서 몸을 닦고 자신의 도덕을 높이는 군자가 되려면 마음만 먹으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이어 “선비가 모든 것이 운명에 달려있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매일 이익과 해악을 피하는 방법만 생각하다 보면 속세에서 본성을 잃게 된다“고 덧붙였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유새는 조정에서 외지로 파견되어 직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식량과 여비를 가지고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지 한 명을 만나 그에게 구걸을 했다. 유새는 그가 불쌍해 보여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몽땅 그에게 주었다. 거지가 떠나자 혼잣말을 했다.

“내가 배고플 텐데 어떡하나.“

조금 걷다가 그는 갈증을 느꼈고, 마침 산길에 샘물이 있어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갑자기 물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들어보니 금은 그가 거지에게 준 것과 꼭 같은 분량인 것 같았다. 그는 금으로 식량을 좀 바꾸었고 그래서 길에서 굶어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이 발생한 후, 그는 항상 옛 사람들이 금을 주워도 가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이렇게 재물을 보고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을 떠올리며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때 또 한 친구가 그 금과 같은 가치의 은냥을 보내왔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빨리 샘으로 돌아가서 한 푼도 빼지 않고 은냥을 모두 거기에 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새가 돈이 있어도 줍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가 진부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항상 이러한 신념이 옳다고 믿었다.

유새는 오랫동안 외지에서 떠돌았지만, 다른 사람이 준 돈을 쉽게 받지 않았다. 비록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낡고 신발이 망가져도 그는 태연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매번 사람들에게 세상의 흥망성쇠와 고금의 성패라는 큰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손목을 꽉 잡고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사람들과 사귀는 데 항상 원칙이 있었다. 권력과 권세가 있고 그를 지극히 우대하는 사람이라도 품행이 바르지 않으면 사귀지 않았다. 그는 여태껏 시류에 편승하여 권세에 빌붙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그와도 고난을 같이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명나라 말기 전란 때 그는 신주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장상국(장거정張居正)의 증손자 장동창을 만났다. 장씨는 “나의 선조 상국이 어떤 사람인지 역사책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는데 왜 후손들이 그를 비난하느냐.”

유새는 “세상 사람들이 장상국을 간신이라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다. 사실 나는 그를 권상(權相-권력을 가진 신하라는 뜻)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권(權 권신)과 간(奸-간신)은 실 한오라기 차이다. 그가 더 현명한 재상이 되려고 노력했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동창은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동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그가 복건성에 부임할 때, 유새를 불러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유새는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예전에 남경에 살았는데 그의 생활은 매우 가난했다. 어느 부자가 인자하지 못했는데 서로 아는 사이였다. 어느 날 편지와 축의금을 가지고 자기 아들의 교사가 되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에 대해 당시 관학을 담당했던 한 사대부는 “유새의 재능과 식견, 성품은 남송의 대유 육구연과 중흥의 4대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양만리의 결합체였다. 그는 탁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안빈낙도하며, 명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순수함과 명석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 정말 얻기 어려운 일이다!”

고대인들이 독서를 한 것은 종종 이치를 깨닫고, 수신양성을 하며, 정신적으로 더 높은 경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것은 선비인 유새에서 지극히 잘 드러난다. 유새는 책을 깊이 연구한 후, 대장부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는 것은 결코 공명정대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저서로부터 후세에 참고할 수 있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정신적 유산을 남긴 것을 볼 때, 그는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이민과 이타적인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는 바로 중화 5천 년 문명에 담긴 가장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참고자료: 민국 25년 《완지열전고皖志列傳稿》 권2 《본전本傳》.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