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顏丹)
【정견망】
청대 하북(河北) 천안(遷安)에 양덕빈[楊德賓 자는 흠약(欽若)]이란 의생(醫生)이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과 총명을 지녔다. 독서를 좋아해 20세에 수재(秀才)가 되었고 이후 국자감(國子監)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해 추시(秋試 3년에 한 번씩 성 단위로 열린 향시를 가리킴)에 몇 번 응시한 후 과거의 길을 포기했다.
그의 조상 중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한 조상이 기문둔갑(奇門遁甲)에 능통하여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의술을 지녔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자신의 의술을 후손에게 전수하지 않고 집에 수장한 의서들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양덕빈은 의도(醫道)에 대한 조상의 뛰어난 이해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독학으로 의학을 익혔지만 그의 의술은 조상에 못지않았다. 그의 치료 방법은 약으로 치료하는 것보다 신기해서 약을 전혀 쓰지 없고도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손녀가 병에 걸려 축 늘어지고 기력이 없는 듯했다. 양덕빈은 가족들에게 약을 쓰지 말라고 하며 “비린 음식을 좀 먹으면 나을 것이다”라고만 했다. 가족들이 여전히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는 나가서 잉어를 사 와서 요리하여 먹이게 했다. 나중에 그는 물고기 비늘과 뼈를 불에 태워 재가 될 때까지 구워 아이에게 술을 부어 먹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녀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또 한 번은 전당포에서 잡일을 하는 젊은이가 어느 날 밤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깨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보는 사람들은 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양덕빈을 데려오게 했는데, 양덕빈이 그를 흘끗 보더니 “이 병은 치료하기 쉽지.”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사람을 시켜 등을 세게 치게 했다. 잠시 후, 그는 깨어났다.
어느 날, 그가 볼일을 보러 갔다. 가는 길에 목이 말라 길가 마을에 들러 물을 달라고 했다. 그때 방 안에서 누군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16~7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갑자기 심한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양덕빈이 말했다.
“내장이 뒤틀렸으니 일으켜 세운 후 거꾸로 서면 좋아질 겁니다.”
가족들이 그의 말대로 하자 소년의 복통이 정말로 멈췄다.
현지의 한 상인이 왼손에 종기(瘡)가 생겼는데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았다. 양덕빈을 청해 진찰을 받자 그가 말했다.
“이것은 ‘대창(對瘡 역주: 서로 대칭하는 창 즉 종기란 의미)’이라고 합니다. 오른손에 종기가 생겨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오른손에 종기가 나지 않으면 왼손도 낫지 않습니다.”
상인이 이 말을 듣자 날마다 오른손을 응시하며 종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오른손에 종기가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왼손의 종기도 나았다.
호기심에 어떤 사람이 양덕빈에게 어떻게 치료했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그 사람의 종기는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치게 걱정해서 날마다 상처를 만져 심화(心火)를 그쪽에 모이게 했을 뿐입니다. 제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려 더는 왼손 종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자 자연히 빨리 좋아진 것이죠.”
양덕빈은 병을 치료할 때 가급적 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약의 이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내린 처방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한 관리의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설사를 앓아 점점 야위어 갔다. 여러 의사를 불렀지만 보약(補藥)을 써도 사약(瀉藥 역주: 땀이나 소변 대변 등으로 사기를 몰아내는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아이를 진찰한 후 양덕빈이 곧바로 처방을 내렸다. 옆에 있던 다른 의생이 보니 부인이 젖이 나오는 것을 촉진하는 처방이었기에 당황했다. 그러나 단 한 첩을 복용하자 아이의 설사는 즉시 멈췄고 재발하지 않았다.
또 다른 처방인 ‘익원산(益元散)’은 보통 여름철 더위를 식히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양덕빈은 다른 접근법으로 웅황(雄黃) 등 다른 약을 조금 추가해, 이 처방으로 치질을 치료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약 처방 외에도 그는 망문문절(望聞問切 보고 듣고 묻고 진맥하는 전통 의학의 진단법) 진단에도 매우 뛰어나, 환자의 생사 예측을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장(章)이라는 성을 가진 남성이 딸꾹질을 했는데, 치료를 받을수록 상태가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너무 쇠약해져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외풍이 두려워 문과 창문을 닫아야 했다. 양덕빈이 그를 진찰하더니 “그는 병이 난 게 아니라 그냥 근심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창문을 열게 하고 처방전을 써 주었다. 세 번 먹자마자 증상이 다 사라졌다.
학(郝)이란 성을 가진 관리가 양덕빈과 알고 지냈는데 그들은 자주 서로 방문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늘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양덕빈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열흘 후에는 학 아무개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의술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저 무심코 말하는 줄 알았다. 일주일 후, 학 아무개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양덕빈은 그를 찾아가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이삼일 만에,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양덕빈은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인품(人品)과 기질 또한 남달랐다. 그는 본래 사람됨이 정직했고 환자를 치료할 때도 자신의 원칙을 지켰으며, 함부로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시골에서 우연히 평범한 백성을 만나도 기연(機緣)이 촉성되어 병든 사람을 보면 곧 약을 처방해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장터를 돌아다니다 인과(因果)로 생긴 병이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설령 그 사람이 아무리 부귀한 집안이고 거액을 준다 해도 치료를 거부했다.
그의 의술은 출신입화(出神入化)했지만, 다른 사람이 무슨 비방(秘方)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솔직히 고백했다.
“살고 죽는 것에는 다 정수(定數 정해진 운명)가 있으니 저는 다만 본래 살아야 할 사람을 구할 뿐입니다. 정말로 무슨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깊이 헤아렸기에, 생전에 여러 권의 《양방(良方)》을 남겼는데, 이 처방들은 후세에 줄곧 귀중하게 전해지고 있다.
참고자료: 동치 12년 《천안현지(遷安縣志)》 광서 5년 《영평부지(永平府志)》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