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악(仰岳)
【정견망】

하북성(河北省) 웅현(雄縣)은 고대에 ‘와교관(瓦橋關)’이라 했으니 송대 명장 양육랑(楊六郎, 양연소)이 진수(鎭守)했던 ‘삼관(三關)’ 중 하나다.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지였기에 많은 전장(戰場)과 문물 유적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이 “송요고지도[宋遼古地道 송과 요 사이의 옛 지하도]”다. 이 지하도는 역사가 깊으며, 사료에 따르면 북송(北宋) 시기에 건설되었고 만리장성처럼 변방을 방어하고 중원 문명을 수호하는 사명을 짊어져, 세상 사람들에게 “천년을 잠자던 지하 군사 기적”이라 불린다.
웅현 경내에는 이 지하도 외에도 명월선사(明月禪寺)라는 유명한 선사(禪寺)가 있다. 이 사찰 안에 특이한 전각이 하나 있는데 ‘육랑전(六郎殿)’이라 한다. 바로 북송 명장 양연소를 기념하여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는 그를 “연소호법존자보살(延昭護法尊者菩薩)”이라 칭한다. 전통적인 불교 사찰은 보통 부처나 보살 등 각자(覺者)의 명칭으로 전각의 이름을 짓는데, 이곳에는 어찌하여 무장(武將)의 이름을 딴 전각이 있는 걸까?
이는 바로 현지 백성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기원한다. 즉, 양연소가 불법을 수호하고 춤을 춰서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다.
고승의 계책으로 지하도를 이용해 성을 함락
북송이 건국된 초년, 웅주(雄州)를 진수하던 장수는 조정의 권신 반인미(潘仁美)의 아들 반표(潘豹)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싸울 능력이 없어, 하루 종일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괴롭힐 줄만 알았다. 현지 백성들은 그를 미워해 “반구자(潘狗子, 반 씨 개새끼)”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어느 날 요나라 대장 한창(韓昌)이 군대를 이끌고 웅주를 공격해 오자, 반표는 스스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성을 버리고 도망쳐 후방인 막주(莫州)까지 달아났다.
당시 양연소는 원래 막주를 진수하고 있었는데, 패퇴하는 반표를 보고 그를 성 안으로 맞이하고는, 자신은 수천 명의 양가(楊家) 장군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싸움에 임했다. 성을 나서자마자 뒤쫓아 온 요나라 군대와 마주쳤는데, 양연소는 단번에 선두에 선 자가 자신의 “오랜 원수” 한창임을 알아보았다.
양연소(楊延昭)
그는 즉시 창을 들고 싸웠고, 한창과 수백 합을 겨루었다. 양가 장군과 병사들은 비록 수는 많지 않았으나, 모두 일당십(一當十)의 용사들이었다. 하루 종일 싸운 끝에 한창은 점차 패색이 짙어졌고, 요나라 군대도 그를 따라 북쪽으로 40여 리를 후퇴해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그제야 양연소는 진영을 설치하고 휴식할 것을 명했다. 다음날 양연소는 승세를 타고 추격에 나서 요나라 군대를 북쪽으로 30여 리를 더 몰아붙였고, 결국 요나라 군대는 모두 웅주성(雄州城) 안으로 퇴각했다.
한창은 양연소의 무서움을 알기에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양연소가 군대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자, 요나라 군대는 성벽 위에서 만 개가 넘는 화살을 동시에 쏘아대 양가 장수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양연소가 며칠 동안 날마다 도전했지만, 한창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요나라 군대는 수적으로도 우세했을 뿐만 아니라 웅주성은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라 일시에 빼앗기 어려워, 성 밖에 진영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양연소는 적을 물리칠 계책을 고심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장막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스님이 찾아와 양연소를 보더니 합장하며 말했다.
“양 장군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쉬지 않으십니까?”
양연소는 승려를 매우 존경했기에, 즉시 앞으로 나아가 합장으로 답례하며 말했다.
“사부님(老師父), 들어오시죠.”
노승이 말했다.
“저는 성내에 있는 명월선사의 주지입니다. 깊은 밤을 무릅쓰고 찾아왔으니 장군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연소가 물었다.
“노스님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오시니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노승이 말했다.
“성을 격파하기 위해 왔습니다. 원래 반표가 성 안에서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혔지만, 나중에 요나라 군대가 들어와 더욱 심하게 약탈하고 불태우며, 저희 사찰을 훼손하고 승려들을 모욕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육랑성(六郎星)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으로 유연(幽燕 유주와 연주) 지역을 진압할 주인이십니다. 성 안 백성들은 밤낮으로 장군께서 웅주성을 함락시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은 높고 성벽이 견고하여 장군께서 강공으로 공략하실 수는 없고, 지혜로 취해야 하는데, 기습적인 방법으로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역주: 육랑성은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로 특히 북방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노스님은 양연소가 바로 육랑성이 세상에 내려온 인물이라 지금의 북경과 하북성 북부 일대에 해당하는 유주와 연주 등 북방지역을 진압할 능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말을 마치고 지도를 한 장 꺼내 양연소에게 건네준 후 작별하고 떠났다. 양연소가 그림을 열어보고는 연달아 “좋은 계책이로다, 좋은 계책이야!”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성 안의 옛날 지하도로 지도였다. 이 지역은 예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일찍이 성 안에 사방으로 통하는 지하도를 파서 전란을 피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관리가 되지 않아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병사를 배치해 성 밖 동남쪽 출구에 굴을 파서 지하도와 연결하기만 하면 성 안의 명월선사로 들어갈 수 있고, 이렇게 사찰 안에서 출병하면 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양연소는 병사들에게 굴을 파게 하고, 파낸 흙은 진영 앞으로 운반해 거짓으로 성을 쌓는 시늉을 했다. 성 안에 있던 한창은 이 광경을 보고 양연소가 장기적으로 포위할 성을 쌓으려는 것으로 여겨 경계를 더욱 늦췄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양연소는 굴을 다 파놓고, 수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노승의 안내를 받아 명월선사 안으로 잠복했다. 밤이 되자 양연소는 병력을 이끌고 심야에 진격해 한창의 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성 밖의 병사들도 안팎으로 호응해 일제히 성을 공격하니, 일시에 함성이 하늘을 찔렀고, 웅주성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한창은 그제야 잠에서 놀라 깨어났고, 송군(宋軍)이 이미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다. 허둥지둥 적을 맞이했지만 몇 합 만에 패배했고,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친위병들을 이끌고 도망쳤다.
양연소가 지혜로 웅주성을 탈환한 후, 한창은 패배에 불만을 품고 다시 소태후(蕭太后)에게 정병 10여만 명을 청하여 특별히 웅주를 공격하러 왔다. 기필코 이전의 치욕을 씻으려 한 것이다. 양연소는 요나라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것을 보고 성문을 굳게 닫고 사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은 대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했지만, 며칠 동안 한 발짝도 성벽을 넘지 못하고, 웅주성을 겹겹이 포위해 양가 병사들을 굶겨 죽이려 했다.
신적(神跡)이 내려 칼을 뽑아 춤을 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양연소가 비록 힘껏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성 안의 비축 식량이 날로 줄어들어 오래 버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양연소는 다시 명월선사를 찾아가 주지 스님에게 합장하고 홀로 대전(大殿)으로 들어섰다. 양연소는 간절하게 하늘에 기도하며,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이렇게 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자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날씨가 갑자기 급변했다. 원래 무더웠던 팔월 날씨에 갑자기 눈이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했다. 성 밖에서 홑옷을 입고 있던 요나라 병사들은 모두 추위에 떨며 천막 속으로 숨어들었고, 성 안의 장수들도 비록 집이 있었지만 역시 추위에 몸을 떨었다.
이때 양연소는 서재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병사들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고 문득 영감을 얻어 칼을 뽑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대당(大唐)의 검성(劍聖) 배민(裴旻)이 정예군을 이끌고 유주와 연주 지역에서 돌궐 대군을 격파하고 개선했을 때와 같았다. 당시 당 현종이 화악루(花萼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할 때, 잔치 자리에서 배 장군은 검무를 선보였는데, 악대가 종을 치고 북을 울리며, 천 명이 함께 춤추고 만 명이 소리 높여 노래한 적이 있다. 이 진동 소리가 진령(秦嶺)의 풍운을 바꾸게 했고, 위수(渭水)의 물결까지 넘실거리게 했다.
양연소가 검무를 추던 중, 문득 흥이 올라 삼군(三軍)에게 모두 함께 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장수와 병사들이 춤을 추자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듯했고, 온몸에 힘이 넘치며 추위가 사라졌다. 백성들도 이 모습을 보고 함께 북을 치며 축하하니, 온 성의 사기와 전투력이 드높아졌다. 이 모습은 배민이 화악루에서 추었던 검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고, 주위의 산하(山河)까지 진동했다. 이 소리가 진영 밖의 한창을 놀라 깨어나게 했다. 그는 웅주성 안에서 하늘을 찌르는 함성을 듣고 송나라 군대가 야습을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는 놀라서 깊이 잠든 장수들을 깨워 성 밖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웅주성은 여전히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고, 성벽 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들은 밤새 교대로 경계를 서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고, 새벽녘 눈이 그쳤지만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요나라 병사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 쉬었다. 반면 성 안의 장수들은 춤을 마친 후 땀을 흘리며 쉬었고, 충분히 힘을 비축했다. 다음날 양연소가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라고 명령하자, 한창은 병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추위로 얼어붙어 힘을 써 활을 당길 수 없었다. 억지로 싸우러 나섰지만 이미 지쳐 있었기에 양가 장수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몇 번의 공격에 요나라 병사들은 투구와 갑옷을 버리고 도망쳤다. 한창은 10여만 대군이 대부분 궤멸하는 것을 보고 승산이 없음을 깨달아, 말을 타고 북쪽으로 도주했고, 웅주성은 이렇게 포위에서 벗어났다.
이 전투 후, 양연소는 삼관(三關) 총사령관(大帥)으로 봉해져 북방을 진수하게 되었고, 웅주도 와교관으로 개명되었다. 이번 신적을 경험한 후, 양연소는 이곳에서 현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고 선을 행하도록 교화했고, 명월선사에는 육랑전이 세워졌다. 백성들은 양연소를 “연소호법존자보살”로 존칭하며, 그의 조각상은 갑옷을 입고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마치 하늘에 높이 걸린 육랑성처럼 중원 백성들을 수호하고 있다.
부기(附記): 성을 버리고 도망친 반표는 본래 죄를 물어 참수되어야 마땅했으나, 권신 반인미의 보호 아래 겨우 관직에서 해임되는 처벌만 받았다. 그러나 훗날 무술시합에서 양칠랑(楊七郎)에게 실수로 살해되어 웅주에서 가혹하게 백성들을 괴롭힌 죄업을 갚았다.
참고자료:
《양가부세대충용통속연의(楊家府世代忠勇通俗演義)》 명나라 작자 미상 저, 진회묵객(秦淮墨客) 교열
《양육랑위진삼관구(楊六郎威鎮三關口)》 하북인민출판사 1984년 출판, 조복화(趙福和), 이거발(李巨發) 등 수집
《양가장외전(楊家將外傳)》 하북소년아동출판사 1986년 출판, 조운연(趙雲雁) 수집 정리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45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