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말하자면 오공은 사부에게 머리를 맞고, 심지어 사형들에게 원망을 들었음에도 화내지 않고, 그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원래 오공이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이다. 조사가 그를 세 번 때린 것은, 그에게 삼경(三更)이란 시간을 명심하라는 것이고, 뒷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가서 중문(中門)을 닫은 것은, 뒷문으로 오면 은밀한 곳에서 그에게 도(道)를 전해준다는 뜻이었다. 참으로 지극히 영민한 원숭이라, 조사의 몸짓 언어까지도 정확하게 해독할 수 있었으니, 진정으로 심령(心靈)에 복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 다 이로운 법이다. 그렇다면 저 수수께끼란 대체 무엇인가? 본 장의 제목에서 이미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보리(菩提)의 참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마(魔)를 끊고 근본으로 돌아가 원신(元神)과 합한다”[悟徹菩提真妙理,斷魔歸本合元神].
먼저 조사는 오공에게 세 가지 고험(考驗)을 안배했다.
① 7년간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마음을 닦은 것은, 사부에 대한 믿음과 사부의 배치에 의문을 품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를 고험한 것이다.
② 술(術), 유(流), 동(動), 정(靜)의 연막탄은 오공의 분별 능력과 도심(道心)이 견정한 지 고험한 것으로, 초심(初心)을 지키고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으며, 적당히 넘기려 하지 않고 수련의 엄숙함을 알 수 있는지 고험한 것이다.
③ 세 번 머리를 친 고험은 바로 지능과 오성(悟性)을 본 것이다. 표면을 꿰뚫어 실질적인 내함(內涵)을 보고, 조사가 설정한 수수께끼를 풀어 사부가 은밀하게 도(道)를 전수하려 함을 알고, 때를 놓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도를 구하는 것은, 도제가 사부와 일치하는 정도를 고험한 것이다.
만약 사부와 도제가 사유하는 주파수가 다르다면, 일을 해도 서로 엇박자가 되어 사부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부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기어코 서쪽으로 가면서, 여전히 사부의 깃발을 내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할 것이다. 게다가 한없이 팽창해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고, 사부님과 법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문제를 일으키려고 온 것이다. 사부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수련하는 것은 결국 한바탕 농담이 될 뿐이다. 그것도 전혀 웃기지 않는 농담이다.
수련 중에서 사부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총명하다 여기면서 고만한 지혜를 과시하면서, 오랫동안 사람의 집착을 붙잡고 놓지 않거나, 심지어 의기양양하게 서로 치켜세운다면, 그것은 진수(真修)가 아니라 사오(邪悟)다. 구우주의 위사(爲私)한 기점을 바꾸지 않고, 신우주의 무사(無私)한 기점에 서서 마음을 닦지 않는다면, 모두 진수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법(法)에 있지 않는 것이라 결국 사오(邪悟)라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게 마련이다. 수련이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법(法)에서 너무 많은 천기(天機)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해도 불가능하다. 천기를 모두 누설했는데, 사람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있겠는가? 진수하지 않으면 곧 법을 훔친 것이니, 결국 부처가 되지 못하면 곧 마(魔)가 된다.
마음의 누락은 체(篩子)와 같아서, 또한 제때 바로잡을 줄 모른다면, 기껏해야 다른 사람을 위한 숫돌이 될 뿐이다. 자신의 미래를 망칠 뿐만 아니라 추악한 본색까지 드러내 영락없는 대악당(大反派)이 되고 만다. 제자와 사부의 에너지 주파수의 일치도가 높을수록 얻는 전승(傳承)은 더욱 순수하고 높아진다. 마치 현악기의 소리(絃音)을 듣고 음악에 담긴 고상한 의미를 아는 것처럼 사부의 눈빛 한 번이라도 제자는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사부의 일념(一念)이 움직이면 제자는 곧 집행해야 한다. 사부와 도제 사이에 마음과 뜻이 통해야 비로소 가장 완벽한 수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제간의 일치도는 무엇으로 도달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부님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이란 입으로 몇 번 말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제자의 사유와 언행 및 법(法)에 대한 이해 능력과 실행력에서 체현된다.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요구에 따라 수련하고, 정념과 정행 속에서 법에 대한 믿음을 체현한다. 따라서 수시로 지혜가 열리고, 언행에 법의 위력이 담겨 있어 말을 하면 법(法)이 따르니, 사악이 저절로 소멸된다.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과정에서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며, 심지어 건곤(乾坤)를 되돌리는 신적(神跡)이 나타나기도 한다. 본래 수련이란 창조이니, 정념정행(正念正行) 속에서 우주 에너지를 동원하고, 불법신통(佛法神通)으로 일체 중생을 조화(造化)할 수 있다. 진수(真修) 제자의 체험은 아주 많을 것이니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내가 쓰는 글이 아무리 깊은 층면을 다루더라도 모두 공능(功能)과는 무관하다. 이것은 내가 법에서 정오(正悟)한 후, 법의 내함을 체득한 후 자신의 이해로 쓴 것이다. 속인 중에서도 하나를 들면 셋을 미루어 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법 제자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우주 창궁(蒼穹)을 관통할 수 있으니, 아예 공능을 사용해서 볼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공능은 많은 진상을 볼 수 없고, 또한 가상에 오도되기 쉽다. 기왕에 수련한다면, 닦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을 써서 깨달아야 한다. 각성한 본성(本性)은 스스로 일체를 환히 알 것이다. 오직 마음을 써서 보아야만 진정으로 깨달은 후의 진상을 볼 수 있으며, 오직 법에 입각한 시각(視覺)만이 360도 사각지대 없이 법의 내함을 깨달을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하나가 통하면 백 가지가 통하니,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지혜는 무변(無邊)하다.
그렇다면 사부님을 믿지 않은 후과(後果)는 불 보듯 뻔하다. 겹겹의 마난(魔難), 저애력, 심신의 박해 등 장기간 마난에 처하는 근본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신사신법(信師信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마난 속에서 조금이라도 의지를 주저하면[遲疑] 마난은 한 층 더 가중된다. 사람 마음은 고험을 견디지 못하니, 오직 법에 녹아든 그런 자비로운 마음만이 마장(魔障)을 제거하고 본래의 참모습[本真]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믿음[信]’이란 단지 하나의 글자가 아니라, 고차원의 에너지와 연결되는 마디이자 통로이다.
세간을 바라보면 한눈에 만(萬) 년을 볼 수 있는데 운운중생(芸芸衆生)이 주마등처럼 등장하고 사라지고 윤회하며, 생명은 순환하고 왕복하면서, 각종 역할을 연기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남긴 후 대법이 널리 전해지기를 기다려왔다. 전 세계 인구가 70억이 넘지만, 법을 얻을 수 있는 이들은 오히려 얼마 되지 않는다. 설마 중생이 창세주(創世主)의 자비하신 구도 속에 없단 말인가? 같은 지구,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는데 왜 우리는 법을 얻고 그들은 얻지 못하는가? 원인은 아주 간단한데, 우리는 믿지만,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으면 신(神)과 함께하고, 법(法)과 주파수를 같이하며, 우주 창궁과 뿌리를 같이한다.
믿지 않으면 법과의 인연이 끊어지고, 근원 없는 물이나 뿌리 없는 나무가 되어 신(神)을 등지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똑같이 법광(法光)에 잠긴 중생이지만, 단지 인식 차이로 인해 선택하는 길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고, 이때문에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 진실로 일념(一念)에 천국과 지옥이 달라진다.
마치 오공에게 길을 알려준 나무꾼처럼, 비록 신선의 이웃이 되어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먼저 사부로 모시고 수련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저 마비된 채 인간 세상의 효자 노릇에 만족한다. 사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신(神)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남은 이렇게 큰 소망이 있는데 그는 단지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면 그만이며, 인식 또한 매우 현실적이어서 마음 편히 노동하는 백성이 되는 것에 만족했다. 당신이 그에게 하늘만큼 큰 기연을 주어도 잡지 않고, 몸이 보물산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보지 못한다. 오공이 그에게 함께 신선을 찾아뵙자고 권하며 다시 기회를 주었건만, 그는 오히려 좋아하지 않으며 땔감을 베어 몇 되의 쌀과 바꾸는 일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수련의 기연이 나무꾼의 눈에는 썩은 장작 몇 개보다도 실속이 없었다. 이를 통해 보자면 신(神)이 중생에 대해 불평등한 것이 아니라, 인식이 중생의 지혜를 제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신(神)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너무 작아 그저 개인의 사욕만 담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신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인식과 심지(心智)가 신(神)의 방대한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몸이 업력으로 가득찬 사람은 그저 신의 눈빛을 한 번 보기만 해도 파멸적인 재난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에너지의 연결이니, 이 한 몸의 업력이 순식간에 신의 에너지에 의해 정화되고, 영혼도 그에 따라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정인간(法正人間) 전에 먼저 신적(神跡)을 볼 자격이 없는 그런 사람들을 도태시켜야 한다. 이는 신이 자비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신을 믿지 않고 사악한 영[邪靈]을 믿으며, 온몸에 사기(邪氣)가 가득하기 때문이니 어떻게 신(神)의 광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 순정(純正)한 에너지는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못한다. 이것은 고차원 에너지의 자연적인 정화력이다. 다만 이런 만고의 기연을 놓치는 것이 너무나 애석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진상을 알리는 것은 사실 사람을 도와 기연(機緣)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대법이 널리 전해지니 기연은 누구에게나 있고, 우주 에너지는 차별적인 대우가 없지만 신성(神性)을 각성해 기연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서약(誓約)을 이행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중생을 도와 그 한 층의 창호지를 좀 뚫어주어, 사람을 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위덕(威德)을 성취하고, 동시에 인과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수한 중생의 명(命)을 짊어지고 나서야 서약을 맺고 정법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인과(因果)는 이미 심어졌고, 지금은 기연(機緣)이 성숙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 희망의 열매를 중생의 손에 전달해 그들을 일깨워, 사부님께 보내 구원받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과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온몸에 (해결하지 못한) 인과를 잔뜩 짊어진 당신이 때가 된들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지혜와 능력을 운용해 인연을 마무리해야 하며, 세간에 지니고 온 모든 인과를 마무리하고, 몸에 묶인 모든 밧줄을 풀어내야만 가벼운 차림으로 참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연(鳶)과 같아서 아무리 높이 날아도 소용없는데, 남의 손에 줄이 있으니, 한 번 당기기만 해도 떨어진다.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이 어찌 신(神)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이치로도 떠날 수 없는데, 신(神)의 이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인연을 마무리짓고 천상의 신선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5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