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
【정견망】
중국인의 ‘성황’에 대한 신앙은 유래가 깊다. 기록에 따르면, 가장 이른 것은 주나라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천자의 제사에 한정되었다. 당시 제사는 ‘팔랍’ 신에게 바쳤는데, 그중 ‘수용(水庸)’은 바로 성황신[수(水)는 황(隍)이고, 용(庸)은 성(城)이다]이다.
당송 시대에 민간의 성황신에 대한 신앙도 절정에 달했다. 명청 시기까지 지방에서는 성황에 대한 제사 활동이 약화되는 기미가 없었다. 제왕부터 각지의 주정 관료들까지 모두 성황 신앙을 매우 중시했다. 예를 들어, 명 태조 주원장은 각 주, 부, 현의 성황신을 통솔하기 위해 북경에 성황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각급 관리들도 부임할 때 성황신에게 취임 선서를 해야 한다. 지하에서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선악이 모두 조사될 것이며, 이를 통해 성황신도 복을 내리고 재앙을 내릴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승이든 저승이든 누구도 잘못 판단하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요행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매우 낮다.
중국 고대에는 성황의 신령이 드러내는 일이 종종 발생했으며, 역사서에는 많은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청대의 《용한재필기(庸閑齋筆記)》에는 이러한 두 가지 일이 적혀 있다.
원나라가 말년에 접어들었을 때, 처음 세워진 명나라 정권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원나라 말기의 장수 장사성(張士誠)이 반란을 일으켜 장강 이북의 많은 지역이 전란에 처해 있었다. 당시 진경용(秦景容)이라는 또 다른 원나라 관리는 비록 상해로 피신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충효절의 유가 도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원나라 지정(至正 마지막 연호) 연간의 진사였고,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4품 관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상하이에는 ‘유백제교’에서 말하는 장빈석교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성은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천우를 연호로 삼아 대주(大周) 정권을 세웠다. 그는 진경용을 휘하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나중에 주원장도 즉위하면서 사신을 보내 그를 청했다. 그러나 진공은
“나는 원나라에서 20년 넘게 봉록을 받은 신하인데, 이제 와서 옛 주인을 저버리면 불충입니다. 어머니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상복을 벗고 조정에서 임하는 것은 불효입니다. 불충하고 불효한 사람이 어떻게 등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명나라 황제의 임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의 충효심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결국 그를 상해 현의 성황신으로 봉했다.
청나라 순치 10년 가을, 한 무리의 해적이 상해를 침범했는데, 성을 지키는 장수 왕경(王燝)이 몇 차례 패전한 후 백성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왕경은 민의를 듣거나 민심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앙심을 품고 당시 강소성 순무였던 주모에게 참언을 하고 백성들이 적과 내통했다고 무고했다. 주모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왕경의 말만 믿었다. 그는 악랄한 계략을 품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성 안의 백성들을 마구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날 밤, 성황신으로 봉해진 진공이 갑자기 영험해져서 부아문 밖의 계단 앞에 섰다. 그를 본 순무 주모(周某)는 놀라 부하들에게 계획을 멈추라고 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주모도 백성을 계속 도살하고 싶었다. 그러자 진공이 다시 나타나 주씨 앞에 섰다. 두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모가 너무 놀라서 도살 하려는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됐다. 백성들은 모두 이 성황신의 생명의 은혜를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현지 성황당의 향불도 더욱 많이 피어 올랐다.
또 다른 성황신은 청나라 양주 강도현의 한 열녀와 관련이 있다. 이 여자는 결혼할 때에 한 남자와 약혼했지만, 두 사람이 막 결혼하려고 할 때 뜻밖에 남자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열녀는 그러자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개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시집을 가서 남자를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고집했으므로, 부모들은 그녀를 꺾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남자의 집은 직물 염색으로 생계를 꾸려 가세가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었다. 여자는 이 집에 들어온 후 줄곧 부인의 도를 지키며 언행도 매우 신중하여 집안에서 그녀에 대한 험담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죽은 남자에게 나이가 적지 않은 질녀가 있었는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나중에 여자는 그 질녀가 왕씨 성을 가진 염색공과 내통한 것을 발견하고는 설득했다. 질녀는 들통이 날까 두려워 염색공과 공모하여 열녀를 제거하려고 했다. 어느 날 밤, 질녀는 염색공에게 먼저 열녀 방에 숨으라고 했고, 그녀가 잠든 후에 범행을 저지르려고 했다. 열녀는 깨어난 후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고 끊임없이 저항하여, 염색공이 한동안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질녀딸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열녀가 여전히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화가 나서 아예 이불로 열녀를 숨막히게 했다. 다음 날, 열녀의 시신이 발견되었지만, 질녀는 그녀가 악몽 때문에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열녀의 시신에는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녀의 부모는 아마도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이 일을 관청에 고했다. 당시 현령도 부검 후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즉시 재검사를 명령하지 않았다. 결국 현령의 아들이 범인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사건은 졸속으로 종결됐다. 관가에서는 열녀의 사인이 ‘병사(病死)’라고 발표했다. 많은 백성들이 믿지 않았는데 이 사건에 억울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처 성황당에 어느 점쟁이가 있었는데, 사건이 발생한 후 밤에 꿈을 꾸다가 성황신이 법정에 올라 재판을 하는 꿈을 꾸었다. 당 아래의 여자 귀신은 강도현에서 온 사람으로 울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성황신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즉시 범인을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뜻밖에도 끌려온 사람이 강도의 현령이었다. 그러자 점쟁이도 꿈에서 깨어났다. 다음 날, 그는 꿈속의 광경을 모두에게 말했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에서 현령이 급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이후로 그 성황이 사건을 심리하는 꿈도 강도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그 후, 신임 군령이 이 사건을 재조사하여 진실이 밝혀졌다. 그 질녀는 염색공과 함께 참형당했고, 열녀는 억울함이 풀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열녀’로 표창받았다. 얼마 후 뇌물을 받은 현령의 아들도 급사했다.
보아하니 신은 눈은 횃불 같아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억울한 사건이 밝혀지자, 그 점쟁이는 갑자기 꿈속에서 성황의 이름을 물었던 적이 있음이 생각이 났는데 그 대답은 “송나라 승상 문천상”이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573
